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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이 있는 일상 May 10. 2024

인생이란 결코 계획될 수 없는 것

다만 선택할 뿐이다.

열다섯 살짜리 학교 친구들은 의사, 변호사, 생화학자 아니면 미생물학자가 될 것이라고 했고, 그 가운데 어떤 아이들은 자기들이 되고 싶은 것을 위해 이미 준비하고 있었다. 이러한 현실은 나의 말문을 막히게 만들었다. '인생의 계획'이란 말은 나에게 무의미한 단어였다. 왜냐하면 내가 느끼기에 인생이란 결코 계획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영원과 하루, 한스크루파>


열다섯 살의 나는 판사가 되고 싶었다. 세상의 옳고 그름을 판결해 주는 일이 멋져 보였기 때문이다. 나에겐 옳은 일과 그른 일을 잘 분별하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판사가 되려면 다른 능력이 더 출중해야 한다는 것도 모르면서, 일 년 후 꿈은 다시 바뀌고 되도록이면 좀 더 그럴듯한 사람이 되고 싶어 세계 4대성인 중 한 사람이 되는 건 어떨까? 잠시 고민해보기도 했다. 도덕적으로 흠결이 전혀 없는 완전한 사람이 되고 싶은 열망은 어디에서 왔던 건지 아직도 밝혀내지 못했다. 이후로는 이렇다 할 꿈이 없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방황한 시간이 길어지자 꿈은 저 멀리 먼 나라로 떠나버렸다. 그리곤 인생이란 결코 계획될 수 없는 것이라는 문장 나타나 내가 한 실패들을 모조리 설명가능한 일로 바꿔 주었다.


잘하고 싶었던 공부는 늘 중간에서 머물렀고, 뾰족한 힐을 신고 바쁘게 출근하는 커리어 우먼이 되고 싶었던 열망은 한 곳에서 오래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못난 성격 때문에 번번이 무너졌다. 직장인과 백수의 나날을 오가면서 뭔가 새로운 일을 하고 싶다는 소망만 키웠지 계획처럼 풀리는 일은 없었다. 4년제 대학을 나오고 키는 180 정도 돼야 하고, 인상 좋고 집도 어느 정도 사는 남자를 결혼 조건으로 걸었던 친구는 계획대로 그런 남자를 만나 결혼에 성공했다. 어느 날 그 애와 전화통화를 하며 " 인생이 계획대로 되니?"라는 말로 목에 핏대를 세우던 내게 친구는 " 난 계획대로 되던데, 아이도 가지려고 맘먹었을 때 바로 생겼고, 내 집마련도 내가 생각한 대로 되고 있고, 난 거의 계획한 대로 되는 것 같아"란 대답을 내놓아 ' 그래 넌 좋겠다. 이누무 가시내야'란 혼잣말을 하게 만든 그 애는 지금도 그렇게 계획된 인생을 살고 있을지 궁금하다.




계획대로 되는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나는 무언가를 계속 선택하면서 살아왔다.  신앙인이 되겠다고 결심해 세례를 받았던 일이나, 잠깐 동안이라도 웹디자이너의 삶을 살았던 경험. 목표한 만큼의 돈을 모아본 일이며, 더 나이 들어 글을 쓰고 다시 학업을 이어가는 일 모두 내가 선택한 일들이다. 하지만 그 선택 거창한 계획 없었다. 그때 그때 하고 싶은 걸 선택했고, 선택한 후에는 그냥 그 일을 해냈을 뿐이다. 선택한 일들을 열심히 잘 해냈다고 말하진 못하겠다. 다만 삶을 계획하지 않았어도 일련의 선택들이 내 삶의 이야기들을 만들어 왔으며, 그 과정 속에서 나만의 서사가 쌓였다는 건 확실하다. 계획한 대로 차곡차곡 밟아 나가는 인생도 있을 테지. 오래전 내 친구처럼. 허나 인생 전반을 결산해 볼 때, 계획한 일이 이루어지는 빈도보다는 선택한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경우가 훨씬 많지 않을까.


당신과 나는 늘 선택한다. 모퉁이를 돌아 더 나아갈지 그대로 되돌아갈지 하는 문제들을 말이다. 더 나아간다면 못 보던 것들을 보고 못 만났던 사람들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지만 되돌아간다면 오던 길에 보아온 익숙한 풍경에 평안을 느끼거나 지금껏 만나온 사람들과  오랜 시간 돈독한 우정을 쌓을지도 모다. 어떤 것이 더 나은 것인지 알 수 없으니 선택은 늘 어렵지만, 어느 쪽으로 가든 선택이 삶을 완전하게 결정짓진 않는다. 삶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건 선택보다는 선택을 받아들이는 마음자세에 있으니 말이다.


앞으로 내 삶이 어디로 가든 여전히 계획대로 되지 않을 테다. 더 많은 글을 쓰고, 책을 내고, 또 글을 쓰는 삶을 살고 싶다는 내 바람이 계획한 대로 흐를지 알 수 없다. 다만 나는 지금 여기에 한 편의 글을 쓰는 선택을 다. 마음을 살피고, 생각을 헤집고 글이 될만한 이야기를 끄집어낼 뿐이다. 이 글이 나의 마지막 글이 될 수도 있고, 혹은 더 나아가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받는 좋은 글을 써낼 수도 있다. 알 수 없는 미래를 계획하기보다는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내 시간을 쓴다. 계획을 잘 짜고 알뜰하게 삶을 꾸리는 사람들이 부러울 때도 많지만, 부족한 계획성을 한탄하기보다는 지금 당장에 할 일을 선택하는 것으로 그 부족함을 채운다.


살아갈 방도는 어디든 있다. '인생의 계획'이란 나에게도 무의미한 단어다. 대신 다른 의미를 찾으면 그만이다. 스무 살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든가 사십이면, 오십이면, 꼭 살아봐야 할 인생 같은 건 없다. 인생을 결정짓는 열두 가지 법칙이란 말도 나에게는 그럴듯한 사기에 불과하다. 다만 꽃을 볼 테고, 하늘과 구름에게 눈 마주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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