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방 일지
호모 리그렉투스
현대무용을 처음 접한 것은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의 거꾸로 간다>였다. 어둠 속 우아한 몸짓을 뽐내는 케이트 블란쳇은 그 자체로 완벽한 자유로움이었다.
그 이후 <댄신9>을 섭렵, 임샛별 무용가에 푹 빠져 드래프트 미션 때 2NE1 <살아봤으면 해>에 맞춰 췄던 영상을 몇십 번 돌려보고, 학부생 때 나갔던 대회 영상까지 찾아봤다. 감탄의 감탄을 마지않았지만 춤이라는 건 전문가의 영역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배워볼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풀 영상은 아래에!
https://www.youtube.com/watch?v=UKSAoNyOB7U
그렇게 잠잠했던 나의 마음이 <스우파>가 시작되고 다시 뻐렁치기 시작했다. 내 맘을 사로잡은 팀은 역시 프라우드먼이었다. 재치 있는 아이키님의 춤과 이게 바로 섹시다를 외치는 허니제이님, 가비님의 춤도 좋았지만, 스트릿 댄스라고 규정하기 어려운 전위적인 몸짓에 해방감을 느끼게 만드는 모니카님의 춤에 빠져버렸다.
마치 오랜 시간 명상을 통해 수만 번의 번뇌를 느낀 뒤 마주할 수 있는 정신적 자유처럼 육체적 자유 또한 근육 하나하나를 컨트롤하는 훈련을 통해 도달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현대무용가는 예술가보단 수련가로, 그 어느 경지에 도달한 사람, 그 사람이 보여줄 수 있는 자유로움. 거기서 느껴지는 해방감.
물론 춤이 즐거워 춤을 추는 사람들에게 수련, 훈련이라는 단어가 불편할 수 있겠지만, 현대무용을 보는 나의 감상은 언제나 자유로움, 해탈이었다.
올해 초 사는 게 조금 지겨웠다. 소모임 어플을 두리번거리며 어떤 딴짓을 해볼까 고민하던 차, 우연히 동네 근처 현대무용 클래스를 발견했다. 별생각 없이 자기소개를 올리고 수업을 듣게 다고 연락을 드렸는데. 막상 수업 전날이 되니 고민이 되었다.
나 춤 왜 배우지? 많지 않은 나이였지만 (젊다고 생각함) 굳이, 지금, 내가, 생전 해보지 않은 춤을 춰서 뭐하지? 아니, 무엇이 되지? 하는 생각이 스쳤다. 재밌긴 하겠지만 전문가가 될 것도 아니고.
그래서 그런지 첫 수업은 춤을 배운다라기보다는 운동을 한다에 초첨을 맞춰 참여하기로 맘을 먹었다. 댄서들의 자잘한 근육들을 되뇌며.
운동 이야기를 먼저 꺼내서 말하자면 운동 효과는 정말 최고였다. 워밍업 시간, 복근 단련을 위해 누워서 다리를 올렸다 내렸다 하는 동작을 하는데 첫 수업 때 15회 한 세트도 못했던 나 자신. 한 달이 지나 5회 차 수업을 들을 땐 4세트까지 도움 없이 (물론 엄청 힘겹게) 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첫 수업 나의 근력 상태에 매우 상심했기 때문에 집에서도 매일매일 복근 운동을 해주었다. 할 수 있는 운동의 양이 가시적으로 보이기 시작하니 재미가 붙었다. 상체 힘이 약한 편인데 수업 때마다 하는 팔굽혀펴기도 나에게 딱 맞는 운동이었다. 집에서 따로 연습하지 않아도 무릎 대고 20번은 할 수 있는 근력이 생겼다. (원래 무릎 대고 2개도 힘들어했다)
얼마 전부터 날이 따뜻해져 유연성을 기르기 위한 다리 찢기 수업도 병행 중이다. 말도 안 되는 각도로 무지막지하게 나의 다리를 갈라놓지만 유연성이 높을수록 가용할 수 있는 몸의 범위가 넓어진다는 말에 일자 다리 찢기. 꼭 성공하고 싶다!
현대무용을 배우면서 2022년 운동 목표도 세웠다.
1. 다리 찢기
2. 무릎 대지 않고 팔굽혀펴기 (상체 힘이 약해 티라노사우르스라는 말을 들은 적 있어ㅜㅜ)
춤을 추는 것에 대한 걱정이 많았다. 웃기게도 못 추면 어떡하지 보단 이걸 배워서 뭐하지의 걱정. 그러니깐 말이야. 춤이라는 건 가닿을 수 없는 어떤 열반의 경지 같은 것(?)인데, 내가 취미로 배워봤자 그 경지에 오르지 못할걸 그냥 돈 낭비 아닐까. 아니 이건 어쩌면 가성비의 걱정....? (지금 생각하니 너무 슬프네)
선생님이 몇 가지 규칙들을 (손을 리드로 곡선을 끝기지 않도록 만들어보라) 정해주었고 거기에 맞춰 몸을 움직여보았다. 기껏해야 팔 하나 내 맘대로 움직이는데, 와 이게 재밌다. 열반의 경지는 모르겠고 내 손과 팔을 내가 원하는 데로, 마음껏, 움직인다는 데서 오는 자유로움.
춰보지도 않았으면서 걱정은.
오히려 특정 안무를 따라 하는 과정이었다면 금세 그만뒀을 것이다. 다른 분들이 하는 걸 함께 지켜보았는데, 각자 성격에 따라 취향에 따라 움직이는 속도와 모양이 다르다. 정말 기껏해야 팔 하나 움직이는데 말이다.
그 다음 스텝에서 어디로 손을 뻗을지 고민의 순간들이 있고, 그때마다 물리적으로 내가 내 몸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 인지가 되면서, 비로소 내 몸이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영역이다. 라는 느낌이 들어 좋다.
선생님이 동작을 봐주실 때마다 하는 말씀이 있다. 가보지 않은 길을 찾아보자. 움직일 때, 할 수 있는 한 크게 근육을 쓰자. 정답 없는 시험지를 두려워하고 눈에 띄는 게 싫어 항상 중간으로 숨어버리는 나의 콤플렉스를 자극하는 말이기도 했다.
깨버리고 싶은 것을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이 되어 현대무용은 몸뿐만 아니라 마음에도 터닝포인트를 만들어 주었다.
현대무용. 2022년 최고 잘한 일 중 하나. 이제야 배운 것을 후회한다. 다음에는 더 발전된 실력으로 영상 기록을 남길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