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나이로 열아홉이 채 되지 않았던 해에, 아버지를 꽁꽁 언 땅에 묻었다. 꽃 이름을 딴 OO공원이라는 공동묘지는 서울에서 머나먼 깊은 산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아빠가 갑작스러운 사고로 돌아가셨을 때, 장지를 선택한 것은 외삼촌들이었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홀로 된 막내 여동생이 날마다 남편 무덤 곁에 가서 우는 꼴은 보지 못하겠다고 먼 곳에 묫자리를 알아본 것이다. 당시 경황도, 힘도 없던 나는 어른들의 선택을 바꾸지 못했다. 지금이야 잘 닦인 길을 차로 쌩쌩 달리면 서울에서 두 시간도 채 걸리지 않지만, 당시에는 버스를 몇 차례 갈아탄 후 시외버스터미널 종착역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비포장도로를 달려서야 다다를 수 있는 머나먼 길이었다.
아버지를 여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다음 해였을까. 아빠가 너무 그리웠다. 시외버스터미널에 내리자 정강이까지 푹푹 잠길 만큼 눈이 쌓인 탓에 택시를 잡을 수 없었다. 몇 시간 눈길을 걸어 축축하게 젖고 감각마저 둔해진 발로 간신히 공원까지 찾아갔다. 안도감도 잠시, 무덤까지 올라가는 산길이 빙판길로 변해있었다. 아연질색했다. 하지만 그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햇빛에 반사되어 반들반들 빛나는 얼음길을 엉금엉금 기어올라 아빠 무덤 앞에 도착하자, 슬픔 보다도 힘들고 서러운 마음에 꽁꽁 언 땅 위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어느 해 여름에는 외삼촌 차를 타고 산소에 가는데 갑작스러운 폭우로 인해 땅이 움푹 패어 길이 끊긴 적이 있다. 목적지를 가까이에 두고 돌아섰는지, 멀리 돌고 돌아 아빠에게 다녀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진흙투성이가 된 군인들이 채 삽을 들고 도로를 복구하던 장면만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세월이 흐르며 옛말대로 산은 그 형태가 놀라울 만치 변했다. 냇물 위로 솟아오른 바윗돌처럼 듬성듬성 올라와 있던 무덤은 어느새 냇물 안에 깔린 조약돌처럼 빽빽하게 산을 채우고 있었다. 산 중턱에 서서 위아래를 쳐다보면 가지런히 정렬하여 세운 비석은 대단지 아파트처럼 보이기도 했다. 죽은 자들이 차지하는 공간으로 인해 산 자들의 공간이 사라지고 있다는 말이 실감 나는 장소이다.
아빠가 누워계신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다가 비어있는 자리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곳 역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누군가가 누워계시던 곳이었는데. 아빠 무덤까지 다가가서야 비어있는 자리가 누구의 묘였는지가 떠올랐다. 그곳은 한 젊은 여자가 묻혀있던 곳이었다.
그 무덤이 생긴 것은 아빠를 이곳으로 모신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여자의 무덤 앞에는 늘 풍성한 생화가 놓여있었다. 호기심에 무덤의 주인공이 궁금하여 비석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까끌까끌한 연회색 돌이 아닌, 잘 다듬어진 크고 매끄러운 검은색 돌판 위에는 한 젊은 여성에 대한 애끓는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아름답고 총명하던 여인에 관한 남편의 애가였다. 그녀를 평생 잊지 않고 사랑할 거라는 남편의 약속이 지켜지고 있다는 것은 계절의 변화를 드러내는 꽃다발로, 여인이 곱게 단장한 것처럼 잡초 하나 없이 정갈한 무덤 봉분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십 년이 두 번 지나갔다. 어느 날부터인가 여자의 묘 화병에 생화 대신 조화가 꽂히기 시작했다. 오염되지 않은 하늘에서 내리쬐는 강렬한 햇볕과, 거침없이 쏟아붓는 비와, 크고 작은 무덤을 공평하게 덮는 눈을 맞으며 여자의 무덤 앞 조화의 색이 바랬다. 태풍이 심하게 몰아쳤던 여름이 지나고 아버지의 무덤이 걱정되어 찾아갔을 때, 그녀의 무덤을 살펴보니 비어있는 돌 화병만 놓여있었다. 색 바랜 꽃은 어디로 날아갔을까.
무덤이 생긴 지 삼십 년 가까운 세윌이 흐른 오늘, 그녀의 무덤이 사라졌음을 발견하고는 무덤의 주인인 그녀와 그녀를 사랑했던 남자에 관해 생각했다.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남자는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나갔을까, 아니면 그녀의 뒤를 따라갔을까. 그것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어떤 것이든 간에 그녀가 그를 떠난 뒤로도 그는 그녀를 사랑하겠다는 약속을 오랜 세월 지켜왔다. 이를 산이 보았고, 하늘이 보았고, 구름이 보았고, 해가 보았고, 달과 별이 보았고, 하늘을 나는 새가 보았고, 또 내가 보았다.
여인이여, 사랑의 기억만을 가지고 편히 쉬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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