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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결국

04. 우리가 연습해야 하는 것

by 허니베리


수화기 너머로 남편의 경쾌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님 괜찮으신 거지?”

그는 실바람 부는 청명한 하늘 아래에 있었다.

내가 서있는 이곳은 어둡고 습한 숲속, 게다가 '암'이 독사처럼 몸을 숨긴 채 나를 노려보고 있는데.

그를 이곳으로 불러들이기가 망설여졌다.


“아버지.... 암이래. 췌장암.”

한참 후에야 남편이 입을 열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단어에는 떨림이, 단어 사이에는 머뭇거림이 배어있었다. 그의 말이 석양처럼 가라앉았다.


지난 십여 년 동안 남편은 친아버지와 나눠보지 못했던 삶의 즐거움을 장인과 함께 누렸다. 계절을 따라 여행을 다니며 제철 음식을 맛보았다. 그리고 음식에 어울리는 술잔을 기울이면서 매일 자라나는 아이에 관해 반짝이는 눈으로 대화를 나눴다. 이러한 시간 속에서 아버지는 손주뿐 아니라 사위의 내면에 숨겨진 어린 마음도 길러주셨다.


남편과의 통화를 마치고 오빠에게 전화했다. 20여 년 전 엄마의 재혼으로 생긴 오빠였다.


오빠는 전화벨이 한 번 울리기도 전에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의 상황을 알리자 짧은 침묵 후 말을 꺼냈다.

“일단, 아버지 심장도 안 좋으시다고 하시니까, 낭종 떼는 수술 하신다고 하자.”

“네.”


부모님이 기다리시는 병원 복도로 돌아갔다. 울긋불긋해진 눈두덩이를 보이지 않으려고 부모님을 앞장서서 주차장을 향해 걸었다. 두 분은 마치 선생님 눈치를 살피는 학생들처럼 나를 따라오셨다.

얼핏 바라본 엄마의 스카프 끝자락이 젖어있었다.


차에 타자 그동안 아무 말씀도 없으셨던 아버지께서 물으셨다. 귀 기울이지 않았다면 혼잣말로 지나쳤을 법한 목소리였다.

“무슨 안 좋은 결과를 들은 게냐?”

뭐라고 답해야 하나. 오빠의 말이 떠올랐다.

“입원하셨을 때 낭종 발견했던 거 기억하시지요? 그걸 제거해야 한다네요. 다른 걸로 발전하면 안 되니까.”

부모님을 댁에 모셔다드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 모시고 어디 가까운 곳으로 짧게 여행 다녀올까 봐요. 수술이나 항암치료 받으시기 전에.”

밤늦게 들어온 남편에게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남편이 고개를 끄덕이는 듯하더니 이내 머리를 푹 떨궜다.

그때, 곁에서 이야기를 듣던 아이가 불쑥 끼어들었다.

“엄마, 할아버지 많이 아프셔? 항암이 뭐예요?”

아이가 걱정스러운 듯 커다란 눈을 찌푸리며 물었다. 거북 등에 붙은 따개비처럼 할아버지의 등에 찰싹 붙어 자라서, 할아버지 손과 팔을 의지해 땅에 발을 디디는 법을 배운 아이였다.

“항암은, 나쁜 병을 태우는 거야.”

"나쁜 것들 모두 싹 타버리면 좋겠다."


식구들이 모두 잠든 뒤에도 홀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가라앉는 몸과 달리 정신은 또렷해졌다. 침실을 빠져나왔다.


거실 바닥에 앉아 소파에 고개를 파묻었다.


‘하나님, 제발....’

신음을 뱉듯, 기도가 흘러나왔다.


얼마 만에 찾는 신인가. 스스로의 비아냥을 무시하려 애쓰며 기도를 이어 나갔다.


아버지에게 치료의 빛을 비추시길,

엄마가 또다시 상실의 그늘에 거하지 않으시길,

그리고 내가 부모님을 돌볼 수 있을 때까지

부모님께 이 땅에서의 시간을 더 허락하시길'.


기도를 마치고서도 한참 동안 신 앞에 머리를 조아린 채 엎드렸다.


고요 속에서 질문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하나님이 만약 부모님에게 얼마만큼의 시간을 줄까, 묻는다면 뭐라 답할까. 10년, 20년? 그 세월이 더 주어진다 하더라도 실로 짧은 시간이다.

인간은 모두 날 때부터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잊은 채 살고 있었다.


어둠 속에 선 채 사랑하는 이들의 얼굴을 한 명 한 명 떠올렸다. 상상 속에서 손을 뻗어 그들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우리는 결국, 헤어짐을 연습하며 살아가야 한다.











이미지 출처: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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