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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춘욱 Dec 15. 2022

대한민국 만들기3 - 전쟁 이후 이승만 독재 강화

막장 중에 막장이었지만.. 전쟁 중에 지도자를 교체하기는 어려워

최근 흥미롭게 읽은 책, "대한민국 만들기 1945-1987"에 대한 3번째 서평입니다. 혹시 지난 번 서평을 못 본분들은 아래 링크를 클릭하시기 바랍니다. 


대한민국 만들기 1945-1987:이승만 외의 대안은?

대한민국 만들기2 - 이승만 정부와 농지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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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직전,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의 남침 위협에 제대로 대응하기는 커녕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에만 노력을 집중했습니다(56~57쪽).


1948년 12월에 제정된 <국가보안법(國家保安法)>은 표면상으로는 여수·순천사건의 후속 조치 중 하나였는데, 이승만은 이를 근거로 국가 안보상의 목적으로 군대와 경찰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했다. 모호하게 규정된 이 법안을 근거로 이승만은 정부와 국가 정책을 비난하는 세력에 대한 처벌에 나섰다. 그 결과 1950년에 투옥된 약 6만여 명의 수감자 가운데 80퍼센트가 <국가보안법 위반 사범이었을 정도로 권력 남용이 심각했다. 

특히 경찰은 이 법안을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을 무제한적으로 행사하여 시민을 감시했다. 이 시기에 한국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했던 그레고리 헨더슨Gregory Henderson은 1948년부터 1950년 사이에 경찰이 제출한 체포 영장이 단 한 차례도 기각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1949년 봄이 되자, 미국 정부는 이승만이 반정부 인사에게 <국가보안법>을 적용하는 것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미국 대사관은 특히 당시 가장 큰 신문사였던 <서울신문>을 “적절치 않은 이유"로 정간한 것, 공산주의자라는 소문만으로 현직 국회의원을 체포한 것 등에 대해서 우려를 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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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명 높은 국가보안법의 출현이 1948년인 줄은 몰랐네요. 그리고 1950년 한국 전쟁을 계기로 미국은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방파제로서 한국의 중요성을 새삼 인식하게 되었습니다(57~58쪽). 


북한의 기습 공격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한국의 안보에 대한 미국의 지원이 전면적으로 확대되고 한국에서 국가와 사회의 관계를 재편하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은 한반도에 대규모 병력을 파견했고 한국군을 증강하기 위한 비용을 제공했다. 미국의 지원에 힘입어 한국은 전쟁 전보다 안전해졌으며 전전(戰前)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대규모 군대를 보유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사회에 대한 국가의 통치력이 더욱 강화되었다. 또한 전쟁이 격화되는 동안 미국의 인적, 물적 자원이 대한민국의 국가 체제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중략) 양국 정부는 한국군의 규모를 43만 7240명까지 증강하기로 합의했다. 한국 정부는 어려운 재정 상황을 계속해서 강조했으며, 한국이 미국의 군사 원조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호소했다. 재무장관은 “국가의 재정이 바닥난 상태이며, 거의 파산지경이다"라고 주장하며, "대한민국은 (70만 명이나 되는 대규모 군대를 유지할 여력이 없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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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이후 시작된 본격적인 냉전 과정에서 미국은 더 이상 공산세력을 '대화의 파트너'로 볼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소련과 중공의 반대편에 서 있는 나라들에게 강력한 지원을 하기에 이르렀죠. 한국 대만 남베트남 같은 나라들이 대표적이었습니다. 특히 한국을 무장하는 데 드는 비용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저렴했다는 것도 매력적인 포인트가 되었습니다(59~60쪽).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미국 정부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다시 말해서 미국 정부는 한국 정부가 요구하는 만큼의 엄청난 군사 원조를 지원하거나, 아니면 더 많은 미군 부대를 한국에 투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사실 이 문제에 대한 미국 정부의 해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한국군의 증강을 지원하는 것은 전쟁에서 미국인의 희생을 줄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훨씬 저렴한 비용으로 한국전쟁을 치르는 방법이며, 장기적으로는공산주의를 봉쇄할 수 있는 효과적인 정책이었다. 

1952년 4월에 유엔군 사령관에 취임한 마크클라크는 합참의장에게 보낸 서한에서 한국군 1개 사단에 소요되는 비용은 "미군 1개 사단에 소모되는 비용의 일부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미국은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와 맞서 싸울 수 있는 잘 무장되고, 훈련 수준이 높은 아시아 국가의 군대를 육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군 증강의 필요성에 대한 클라크와 밴 플리트 등의 긍정적인 평가는 미국 정책 결정자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그결과 미국 정부는 1953년까지 한국군을 20개 사단으로 증강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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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환경 변화는 이승만 정부에게 더할나위 없이 유리했습니다. 전쟁이라는 국가 비상사태를 활용해 라이벌을 제거하고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으니까요(60~61쪽).


모든 한국군 부대가 전투에 투입된 상황에서도 이승만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일부 군 부대를 동원하곤 했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이승만과 미국 사이에 마찰이 잦아졌다. 왜냐하면 미국이 한국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 싸우고있는 동안, 이승만이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무시했기 때문이다.그러나 이승만은 미국 정부의 간섭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통제하는경찰과 일부 특수부대를 지속적으로 정권 강화에 동원했다. (중략)

한편 이승만은 1952년부터 자신의 재선에 필요한 헌법 개정안을 여당 국회의원들이 반대하자, 이들에 대해서도 강압적으로 대처하였다. 당시 헌법은 국회가 대통령을 선출하며, 그 임기를 4년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한국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52년 8월에 대통령 선거가 실시될 예정이었는데, 당시 국회에서는 비록 국가가 전쟁을 치르고 있지만 이승만을 다시 대통령으로 선출하지 않겠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이러한 상황을 간파한 이승만은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국회에 의한 대통령 선출 방식을 직접선거로 변경할 것을 골자로 하는 헌법 수정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국회에서 헌법 수정안이 거부되자, 이승만은 임시 수도였던 부산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헌병을 동원하여 수정안에 반대한 국회의원들을 감금했다. 그리고 이들이 1952년 7월에 수정안에 동의한 이후에야 비로소 석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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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북한의 집권세력은 남한의 정부를 향해 '미제의 괴뢰'라고 부릅니다. 요즘은 '삶은 소대가리' 같은 변형도 쓰긴 하지만 말입니다. 어떤 의미로든.. 독자적인 의사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미국의 꼭두각시 같은 세력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러나, 이런 남한 정부에 대한 지칭은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미국 정책당국자들은 어떻게든 이승만 정부의 목을 날려버리고 싶어했지만, 4.19 혁명 이전에는 결코 실행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62~63쪽).


이승만이 헌법을 개정하려 했을 때 국회뿐만 아니라 한국군 지도부와주한 미국 대사관까지 반대하고 나선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승만이 부산일대에 선포한 계엄령을 집행한 부대는 정규 전투 부대가 아닌 헌병 부대였다. 이승만은 원래 계엄령을 실행하기 위해서 전방의 전투 부대 중 일부를 동원하려 했으나 육군참모총장 이종찬(李鐘贊)이 이를 반대했다. 이승만은 자신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이종찬에 대한 분풀이로 그를 해임했다. 이종찬은 해임되기에 앞서 주한 미국 대사관의 앨런 라이트너 E. Allan Lightner 공사를 만나서 "소수의 병력만으로도 대통령, 내무부 장관, 계엄군 사령관을 가택연금시킬 수 있다"고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한국에서 근무하던 다른 외교관들처럼 라이트너 공사도 이승만을 싫어했는데,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국무부에 "이제 한국군 총참모장이 (이승만을 제거함으로써) 이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 과연 미국 정부가) 채택할 수있는 방안인가에 대해서 고민해볼 단계라고 생각한다" 라는 의견을 제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이승만을 제거하자는 의견을 묵살했다. 미국의 도움으로 이승만이 권력을 쥔 1948년 이후, 한국의 국내 정치 상황이 크게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는 이승만을 제외하고는 한국에서 자유민주주의를 구현할 수 있는 능력과 리더십을 가진 다른 마땅한 인재를 찾을 수 없었으며, 따라서 최소한 국내 안정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준 이승만을 선택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판단했다. 딘 애치슨 Dean Acheson 국무장관은 “대한민국에는 강력한 리더십을 갖춘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전제하고, 가장 바람직한 것은 "이승만에게 압력을 행사하여 그를 지금보다 약간 누그러뜨리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미국 정부의 고위 관료들이 이승만의 독재를 용인하자, 이승만은 한국전쟁 기간 중에 자신의 정권을 더욱 강화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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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중에 미국이 주도하는 쿠데타가 발생했다면.. 이것이야 말로 문제였겠죠. 전쟁 중에 지도자를 바꾸는 것은 절대 해서는 안되는 일 중에 하나이니까 말입니다. 부시 대통령(2001~2009년 재임)이 대표적인 사례일 겁니다. 그는 테러리스트의 공격을 미리 막지 못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지만, 아프가니스탄에 이어 이라크 전쟁을 시작함으로써 선거에서 연승한 바 있습니다. 미국 사람들이라고 해서 부시 대통령이 무능한 인간이라는 것을 몰랐을리는 없습니다만.... 그를 교체한 다음 이미 전쟁터에 파견되어 있는 군인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또 전쟁의 승리 가능성이 멀어지는 것에 대해 경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미국이 쿠데타에 동참하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었습니다만, 이승만이 제 정신을 차리는 일 따위는 없었습니다(63쪽).


한국전쟁의 휴전협정이 체결될 즈음, 이승만의 정치적 영향력은 더욱 막강해졌다. 이승만은 미국이 제공한 군사 원조와 한국군 증강에 사용될 각종 추가 지원을 자신의 정권 강화에 전용했다. (중략) 한편 이 시기에 한국군에 대한 미국의 장기 군사 원조가 확정된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휴전 직후 체결된 한국과 미국 사이의 새로운 협정에 따라 미국은 한국에 대규모 군사 원조를 제공할 예정이었다.

1953년 10월에 한미상호방위조약(韓美相互防衛條約)이 체결되었고, 이 조약을 실행하기 위한 구체적 방안이 1954년 9월의 한미합의의사록에서 재확인되었다. 이에 따라 미국은 한국에 72만 명에 달하는 군대를 육성할 수 있도록 군사 원조를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그 결과 1960년대까지 미국이 한국에 제공한 군사 원조는 매년 약 3억 달러에 달했는데, 이는 한국이 사용하는 국방비의 87퍼센트에 해당하는 막대한 금액이었다.


이후 1956년의 3선개헌, 그리고 1960년의 3.15 부정선거까지 이어지며 한국은 끊임없는 정치적 불안에 시달리는 한편.. 점점 군부의 쿠데타 위험이 높아지게 됩니다. 다음 시간에는 5.16 쿠데타가 벌어지기 이전, 미국이 4.19 혁명으로 집권한 장면 정부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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