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혁명의 위험이 퇴조한 후 미국의 원조 줄어들며 강력한 불황 출현
최근 흥미롭게 읽은 책, "대한민국 만들기 1945-1987"에 대한 여섯 번째 서평입니다. 5편에 걸쳐, 이승만 정부가 얼마나 막장인지 잘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1960년 강력한 불황이 출현했을까요? 오늘은 그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지난 번 서평을 못 본분들은 아래 링크를 클릭하시기 바랍니다.
대한민국 만들기 1945-1987:이승만 외의 대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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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 4.19 혁명의 발생 원인(취업난과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등)에 대해 자세히 살펴본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1960년을 전후해 왜 강력한 불황이 출현했을까요? 역설적이게도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공산혁명'의 가능성이 사라졌기 때문이었습니다(178쪽).
1955년 미국 국무부가 작성한 <한국의 대전복전 능력에 대한 보고서 Report on the Counter-Subversive Capacity of the Republic of Korea〉에 따르면 “현재 상황에서 공산주의자들이 내부 전복을 통해 한국을 장악할 가능성은 잠재적으로 존재하긴 하지만 긴박한 것은 아니다"라고 평가하였다. 이 보고서는 또한 "북한이 한국전쟁 중에 내부에서 조종하던 게릴라는 '완벽하게 진압된 상태이며, 따라서 "한국 내부에서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을 나타내는 징후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고 밝혔다. 이 보고서가 작성되고 약 2년 후에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이 약간 늘어났으나 “공산주의자들의 내부 전복 시도로 인해서 한국 정부, 한국군의 준비 태세 혹은 공공기관이 위험에 처했음을 알려주는 증거는 찾을 수 없었다.”
아래의 '문서'에 인용된 것처럼.. 당시 이승만 정부는 대단히 강대한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대통령 직속의 경무대 경찰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대통령의 수족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런 환경에서 공산혁명으로 남한이 전복될 위험은 대단히 낮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https://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55-57v23p2/d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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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체제경쟁에서의 패퇴' 가능성이 미국의 심기를 지속적으로 거스르고 있었습니다(179쪽)
CIA(Central Intelligence Agency, 미국 중앙정보국)는 1956년에 작성한 보고서에서 북한이 산업 발달, 1인당 국민소득, 그리고 주요경제지표에서 한국을 얼마나 앞서고 있는지에 대해 자세히 밝혔다. 1957년의 보고서는 “북한은 심각한 전쟁 피해, 부족한 인력, 숙련된 기술 인력의 부족, 1953~1955년의 흉작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소련의 지원에힘입어 꾸준히 경제를 재건하는 데 성공하였다"고 지적하였다. 이 보고서는 "이러한 사실이 한국과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 북한과 공산주의 체제의 우수성을 알리거나 홍보하는 소재로 사용될 수 있다”는 미국 관료들의 우려를 반영하였다. 한국이 아시아에서 자본주의의 본보기가 되리라고 기대했던 미국 관료들은 한국의 장기적인 경기 침체와 북한의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비교하면서 근심에 빠졌다.
남한이 북한에 비해 경제성장 면에서 크게 열위에 처하게 된 이유는 이미 지난 번 글("대한민국 만들기4 - 전쟁 이후 이승만 정부가 저지른 경제정책 실수들")에서 다 밝혔기에, 스킵하고.. 이제 본격적으로 이승만에 대한 교체를 검토했던 정황을 살펴보겠습니다(180쪽).
미국 정부는 이승만이 이러한 기준(경제발전을 주도할 의지와 능력 등)에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하였다. 1957년에 한국에서 근무하던 미국 외교관 두 명은 “1948년 이후 이승만이 대내적으로 잘한 것은 국내 질서를 유지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한국이 더 나은 국가로 발전하는 데 필요한 정치적 리더십을 보여주지못했다"고 평가하였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1957년 말에 작성된 한국 상황에 대한 요약 보고서는 “대통령과 행정부는 국민에게 사회와 정치의 발전을 이끌 수 있는 영감과 상상력을 제공하지 못했다"고 평가하였다. 결국 미국 관료들은 이승만이 오히려 국가 발전에 방해가 되고있다고 평가하면서, 그에게 경제정책을 수정하라고 압박을 가했다. 미국은 이와 동시에 이승만 반대 세력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였다.
1957년 이후 한국 정부에 대한 미국의 지원은 이승만 정권을 점차 약화하는 방향으로 선회하였다. 미국 정부는 매년 한국에 대한 경제 원조를점차 삭감했는데, 1957년에는 3억 8289만 3000달러, 1958년에는 3억2127만 1000달러, 1959년에는 2억 2220만 4000달러였다. 이승만은 정권 유지에 드는 비용을 미국 정부가 제공하는 경제 원조에 의존하였는데, 미국의 원조가 감소하면서 그의 정치적 위상과 지위도 점차 낮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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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들이 졸업 후에 왜 직장을 찾지 못했는지가 드러나는 대목인 것 같습니다. 특히 돈을 찍어 부족한 재정을 충당하던 이승만 정부의 오래된 습관을 제어하는 데 성공했죠(180~181쪽).
또한 미국 정부는 한국 정부에게 안정화 정책을 추진하라고 요구하면서 1948년 이후 재정이 부족할 때마다 화폐를 발행해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유발하던 이승만의 관행을 중단시켰는데, 이는 그에게 또 다른 경제적 압박으로 작용했다. 이 안정화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실시한 곳은 한미 합동경제위원회CEB(Combined Economic Board)이다. 1952년에 설립된 이 조직은 양국의 경제 관료들이 한국의 경제정책을 논의하던 곳이다. 초창기에는 활동이 미미했으나, 1956년 이후 미국은 이 조직을 통해서 한국에 적합한 경제정책을 실행하려 하였다. 특히 합동경제위원회에서는 한국 정부가 더 이상 화폐를 발행하지 못하도록 억제함으로써, 이승만이 정치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또 다른 수단을 박탈하였다. 물론 미국 관료들이 이승만 정권을 의도적으로 약화하려고 계획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한국의 안보 상황이 호전됨에 따라 경제 원조를 삭감하고, 그동안 이승만이 구축한 정경유착에 투입된 낭비를 줄이려고 하였다.
미국의 원조 삭감에 위기를 느낀 이승만은 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더욱 발악하였다. 그는 1958년 12월 국회를 압박하여 <국가보안법>수정안을 통과시켰는데, 이 법안으로 정부는 언론의 자유를 상당 정도 제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이승만은 그동안 자신을 비판하던 일부 신문 때문에 언론을 심각한 걱정거리로 여기고 있었다. 그 때문에 경찰을 동원하여 야당 의원의 국회 진입을 저지하면서까지 이 법안을 통과시켰다. 언론계를 포함한 대다수 국민들은 이와 같은 이승만의 행동이 독재에 가까울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제한된 자유마저 빼앗으려는 위험한 행동이라고 판단하였다.
결국 이승만 정부는 '미국 지지상실 → 경제지원 축소 → 화폐증발 정책 중단 → 불경기 → 경찰 독재 강화 → 국민 반발 심화'의 에스컬레이트를 탔던 셈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4.19 혁명 이후 들어선 장면 정부가 얼마나 막장이었는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