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화 강세, 대일 국교정상화 거부, 요소비료공장 설립 등등
최근 흥미롭게 읽은 책, "대한민국 만들기 1945-1987"에 대한 4번째 서평입니다. 혹시 지난 번 서평을 못 본분들은 아래 링크를 클릭하시기 바랍니다.
대한민국 만들기 1945-1987:이승만 외의 대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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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직전, 남한 경제는 이미 파탄 상태였습니다(66쪽).
일제 강점기 동안 한반도의북부와 남부는 일본과 하나의 잘 조직된 경제 연합체로 운영되었다. 산업이 발달한 북한 지역은 남한 지역의 농업 생산에 필요한 비료 등의 물자를 생산하여 지원했고, 남한의 잉여 곡물은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한반도의 산업구조는 자본재와 일부 소비재 생산을 전적으로 일본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해방 직후부터 남한과 북한 모두에서 농업과 산업 생산이 현저히 감소했다.
그리고 북한과 소련이 오랜 계획 끝에 시작한 전쟁 이후 상황은 더욱 나빠졌죠(66~67쪽)
해방 직후 남한이 처한 경제적 어려움은 한국전쟁 직후 나라 전체를 뒤덮었던 가난과 절망에 비교하면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한국이 입은 재산 손실은 약 30억 달러로 추정된다. 3년 동안의 전쟁으로 무려 900여 개의 공장이 파괴되었고, 직물 산업은 3분의 1로 감소했으며, 자동차 트럭· 증기기관을 포함한 차량의 절반 이상이 파괴되었다. 목공소, 제재소, 제강소 등 소규모 산업체도 큰 타격을 입고 사라졌다. 또한 전쟁은 60만여 채의 가옥을 파괴하거나 폐허로 만들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국민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500만여 명이 집을 잃고 거리로 나앉은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전쟁 직후에 북한 피난민의 유입으로인구가 증가하자, 어려움을 겪고 있던 산업과 농업 부문의 실업난과 식량 부족은 더욱 악화되었다. 미국 정부는 한국의 피폐한 경제 상황이 정치 안정을 위협할까 봐 걱정했다. 따라서 한국의 경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 경제 원조를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에 따라 미국은 한국에 막대한 금액의 경제 원조를 제공하고, 이를 집행하기 위한 경제 발전 전문가도 파견했다. 이때 파견된 전문가의 임무는 한국의 경제구조를 재편성하여, 장기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미국의 경제 원조를 낙후된 국가 경제를 재건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신의 정치적 도구로 판단하여 정권 강화에 우선적으로 사용하려 했다. 미국은 당연히 격렬하게 반대하고 나섰지만 이승만은 미국의 경제 원조를 이용하여 자신이 원하는 정치경제, 즉 정경유착 체제를 형성하는 데 성공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적산불하'를 다룬 또 다른 글("R의 공포가 온다 - 이승만 정부의 경제정책 이야기")에서 자세히 설명했으니, 신속하게 넘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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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이승만 정부의 이해가 서로 엇갈리는 가운데, 미국은 경제 원조를 돈이 아닌 현물 형태로 지급하는 게 더 나은 선택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67~69쪽).
한국전쟁 전에도 미국이 한국에 제공한 경제 원조 액수는 상당한 규모였지만, 이것은 경제 발전을 추진하기보다는 가라앉고 있는 배의 구멍을 하나둘 막는 성격이 강했다. 1945년부터 1948년 사이에 미 군정은 점령지역구제기금 GARIOA(Government Aid and Relief in Occupied Area)을 통해서 약 3억 100만 달러를 지원했다. 그러나 이 지원금은 경제 성장을 도모할 수 있는 장기 자본 투자에 사용되지 않고 한국 국민의 낙후된 생활 개선, 특히 의식주 문제 해결에 사용되었다. (중략)
한국에 대한 경제 원조에 인색하던 미 상원의 태도가 바뀐 계기는 한국전쟁이었다. 전쟁 중에 한국인이 겪고 있는 비참한 생활과 경제적 고통은 세계 각국의 미디어로부터 많은 주목을 받았다. 따라서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외국 원조 중에서 한국에 대한 지원을 항상 최우선적으로 다루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해마다 한국에 2~3억 달러를 지원하였다. (중략)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에 작성된 2개의 한국 경제 부흥계획서는계획경제 도입의 필요성을 제시하고 있다. 1952년에 미국 정부는 헨리타스카 Henry Tasca를 한국 경제문제 담당 특사로 임명했는데, 그는 약 1년 후에 <한국의 경제 부흥책 Strengthening the Korean Economy〉이라는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보고서에서 타스카는 한국의 경제 발전을 위한특단의 조치 중 하나로 농업, 광업, 산업 수송, 전력 등에 대한 병행 투자를 위한 통합 계획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https://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52-54v15p2/d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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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부 때 시작되었던 '경제개발 계획'의 원조가 1952년이었군요. 조금 더 인용해보겠습니다(69쪽).
타스카 보고서의 핵심 내용은 한국의 농업 생산성과 광업 산출량을 늘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미국 관료들은 한국 정부에 농업 및 광업 생산품에 대한 국내 소비를 제한하고 대신 일본에 수출할 것을 권장했다. 수출을 통해서 축적된 이익은 기계와 장비를 수입하는 데 사용되며, 이것은다시 농업과 광업에서 더 높은 생산성을 이끌 것이라고 설명했다. 타스카 보고서도 "한국은 그동안 일본과 무역을 재개하는 데 방해가 되었던감정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며, “품질이 좋은 농산품을 수출하고 거친곡물을 수입하여 소비하는 과거의 패턴으로 복귀할 것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는 불가능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승만 대통령이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 및 수출입 확대를 목숨 걸고 반대했기 때문이었습니다(70~71쪽).
그런데 이러한 정책은 이론적으로 그럴듯했지만 실행으로 옮기기에 매우 힘들었다. 우선 이승만은 균형 발전 구상을 반대했는데, 미국이 제시하는 정책은 한국의 희생을 통해서 일본 경제를 부흥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미국의 원조 프로그램이 적절치 않다고 지적하며, 이를 실행하는 것에 반대했다. 또한 이 과정에서 미국의 원조를 자신의 정치적 목적에 전용하곤 했다.
경제 원조 프로그램의 집행에 대한 이승만의 반대와 임의적 자금 전용으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것은 농업 구제 프로그램이었다. 이승만은 미국이 추진하던 비료 분배 계획을 임의로 수정했으며, 그 결과 1950년대 중반 한국의 농업 생산성은 일제 강점기보다도 낮았다. 1950년대에 미국은 한국의 척박한 토지를 개량하여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 해마다 약 4500만 달러어치의 비료를 무상으로 제공했다.
그런데 주한 미국 대사관은 이승만 정부가 비밀리에 비료업자와 결탁하여 농민에게 비료를 비싼 가격에 판매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승만은 미국이 무상으로 제공하는 비료의 상당 부분을 정부 보관 창고에서 몰래 개인 비료업자에게 빼돌리고, 이를 다시 농민에게 높은 가격에 판매하면서 수입을 챙겼다. 또한 국가가 보유하고 있는 비료 판매를 제한하면서 농민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높은 가격의 비료를 구입할 수밖에 없었다. 정부가 판매하는 값싼 비료를 구입하기 위해서 기다렸다가 비료를 사용할 시기를 놓치는 농민들이 허다했다.
이러한 사태를 파악한 미국 관료들은 한국의 관료들이 비정상적인 비료 분배를 통해서 민간업자로부터 뇌물을 받았을 것이라고 의심했다.1956년부터 1960년 사이에 주한 미국 대사관의 경제 고문으로 재직한에드윈 크롱크Edwin Cronk는 한국에 대한 국제 원조를 담당하는 미국국제개발처가 한국에 제공하는 비료와 다른 제품이 원래의 의도대로 사용되는지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왜냐하면 “모든 시스템이 부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미국이 한국을 원조하더라도 정치가와 관료들은 자기들의 이익부터 먼저 챙기기 때문에 정치적 영향력이 약한 농민이나 가난한 국민들은 이를 참고 견딜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이승만이 주도하는 농업 정책은 잉여 생산을통한 수출은커녕 오히려 심각한 식량 부족을 야기하고 말았다. 따라서 일본에 식량을 수출할 수 없었으며, 대신 해마다 미국으로부터 최대 100만 톤가량의 식량을 지원받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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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하게 해먹었군요. 이승만이 통치했음에도 50년대 경제 발전이 가능했다는 게 한국의 위대함이 아닐까 생각되니다("R의 공포가 온다3 - 이승만 정부, 막장 정부였나?"). 특히 원화 강세 정책을 사용한 것도 큰 문제를 일으켰습니다(71~72쪽).
그런데 설령 농업 생산이 증가하여 잉여 농산물이 생겨났다고 하더라도, 한국 정부가 채택한 통화 정책에서는 사실상 수출이 불가능했고, 무역수지에서도 흑자를 기대하기 힘들었다. 이승만은 1953년부터 1960년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원화의 가치절하를 요구하는 미국의 압력을 무시했다. 그는 원화와 달러의 고정 환율을 1:500으로 책정하고 이를 유지했는데, 미국인 경제 고문들이 바람직한 환율은 1:1000이라고 수차례 조언했음에도 이를 수정하지 않았다(1962년 화폐개혁으로 10환이 1원이 되었기에, '1달러=100'원으로 볼 수 있음). 크롱크는 한국 정부가 이처럼 낮은환율을 유지했기 때문에 “수출은 오히려 손해였다"고 하면서 당시의 환율로는 수출업자들이 "인건비나 원재료비조차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분석했다.
반면에 "한국 정부로부터 수입 허가를 받은 사람은 당장이라도 큰돈을 벌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승만은 이러한 환율 정책을유지해서 자신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하는 사람들에게 수입허가권을 나눠주었던 것이다. 이처럼 이승만이 무리한 수출입 정책을 고집함에 따라한국의 수출 증가책을 고심하던 미국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 3년 내내 한국의 수출은 고작 2500만 달러로, 1956년의 경우 타스카 보고서가 목표로 설정했던 수준의 3분의 1에 불과했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수입은 1억 9970만 달러에서 3억 8900만달러로 증가하여 심각한 무역수지 적자가 발생했다.
한편 이승만 정권은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공개적으로 거부함으로써 수출 정책 추진에도 찬물을 끼얹었다. 미국 정부는 한국의 교역 상대로 일본이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이들이 일본과 한국의 교역을 열성적으로 추진한 이유는 이를 통해서 한국의 수출이 증진될 뿐만 아니라, 한국이 일본에서 생산한 산업 제품의 좋은 소비 시장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의 외교 관계 정상화 및 교역 재개 여부는 민감한 정치적 사안이라 쉽게 해결할 수 없었다. 한국 사회에 여전히일본의 식민 통치에 대한 기억과 증오감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안의 경우 이승만이 당시 한국 사회의 분위기를 제대로 파악하여 현명하게 대처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미국 관료들은 이승만에게 일본과의 화해를 통한 외교 관계 개선과 교역 재개를 여러 차례 건의했지만, 그때마다 이승만은 일본의 재무장에 대한 우려, 자유세계에 대한 일본의 반성부족과 같은 이유를 들면서 불가하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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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적으로 보면, 박정희 정부가 대단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국민들의 그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를 달성했으니까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승만 정부가 해먹은 것으로 유명한 요소비료 공장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74~75쪽).
이승만을 만난 미국의 한 변호사는 그가 전국토에 4차선 고속도로를 건설하고자 하며, 세계에서 가장 큰 라디오 방송국을 서울에 설립하려고 한다고 비웃었다. 서울을 방문한 미국 상원의원들도 한국이 "자주국가이며, 동맹국"이라는 이유만으로 이승만이 요구하는 것을 모두 수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한국에 대한 재정 지원을 집행하는 미국 관료들은 결국 이승만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중 최악의 사례는 1954년에 이승만의 요청에 따라 충주에 요소 비료 공장을 건설한 것이다. 국제협조처 ICA (International Cooperation Administration)의 부국장 데니스 피츠제럴드Dennis Fitzgerald는 요소 비료가 당시 한국에 생소한 것이라서 새로운 기술과 복잡한 공정이 필요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한국 농민들은 지금까지 줄곧 황산 암모니아 비료를 사용해왔기 때문에 요소 비료보다는 황산 암모니아 비료를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을 건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
하지만 이승만은 이러한 조언을 무시했다. “미국은 이승만의 요청에 따라 요소 비료 공장을 건설하려 했으나, 이는 매우 어려웠다. 예상보다 많은 건설비가 필요했으며, 제한된 기술 여건과 장비로는 공장을 짓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중략) 그런데 더 심각했던 문제는 한국인 중에서 이 공장을 운영할 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점이다. (중략) 결국 미국은 약 2년간 이와 유사한 공장을 운영한 경험을 가진 기업을 찾아내서 한국으로 파견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또다시 2년이 소요되었고, 그사이에 엄청난 비용이 낭비되었다.”
엄청난 사람이었음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1960년 4.19 혁명 때 미국이 하와이에 망명처 제공할 테니 빨리 하야하라고 윽박지른 게 다 이유가 있었음을 느끼게 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