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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춘욱 Dec 17. 2022

한국경제사의 재해석2 - 박정희 정부의 수출 진흥 정책

월 1회, 수출을 진흥하기 위해 대통령 주최의 회의가 장시간 열리면?

친애하는 경제사학자, 김두얼 교수의 책  "한국 경제사의 재해석"에 나오는 <그림> 하나 인용합니다. 박정희 정부는 쿠데타도 정권을 잡은 후, 화폐개혁부터 4대의혹사건까지 각종 실책과 비리를 저지르며 그 끝이 좋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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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가 '집권의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즉 지금 중국의 지도자들이 국민에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잘 살면 그만이지 꼭 민주주의가 필요한가"라는 메시지를 전달한 셈입니다. 


아무튼 그의 부패와 독재 문제는 미뤄두고, 박정희 정부가 경제발전에 성공했던 요인을 점검해보면.. 가장 직접적인 것은 원화 약세 정책이었을 것입니다. 이승만 정부 내내 원화강세 정책이 지속되다, 쿠데타 직후 환율을 바로 조정했죠("R의 공포가 온다2 - 이승만 정부의 저환율 정책"). 달러에 대한 원화 환율을 일거에 인상함으로써 수출 경쟁력을 강화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또 다른 성공요인은 '금융억압'을 통해 대기업의 수출을 촉진했던 것입니다("한국의 경제위기와 극복 - '8.3 사채 동결' 조치"). 즉 시장의 균형금리 수준(40% 전후)보다 낮은 저금리(10% 이하)로 대출해줌으로써, 수출 기업들에게 엄청난 인센티브를 제공했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고 한일 국교정상화를 추진한 것도 성공 요인입니다. GDP의 거의 3% 이상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수입을 올린 것이 경제 성장의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특히 한일 국교정상화 과정에서 획득한 외화를 활용해 포항제철을 짓는 듯 중화학공업 육성에 투자한 것도 결정적 영향을 미쳤죠("아시아의 힘7 - 세계 최고의 제철소를 어떻게 만들었나").

출처: "박정희 경제신화 해부 - 정책 없는 고도성장", 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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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네 가지 요인에 이승만 정부가 '한미동맹'을 맺어 막대한 원조 물자를 수령함으로써, 국민들을 기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만들어 준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박정희 정부의 내부적 요인을 하나 더 첨언하자면.. '수출입국'에 대한 의지가 대단히 강력했던 것입니다. 


당시 세계 대부분의 저개발국가는 '수입대체 산업화'에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는 이와 반대로 '수출주도 산업화'에 총력을 기울였죠. 좁은 내수시장의 한계, 그리고 이승만 정부 때부터 미국의 여러 자문 인사들이 "제조업을 키우고 무역수지를 개선시켜야 한다"고 권고했던 것이 복합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이 결과, 아래 <그림 6-1>에 나타난 바와 같이.. 강력한 정부의 개입이 있었습니다. 대통령의 주도하는 수출진흥회의의 개최 회수를 보면, 60~70년대 내내 연 10회 이상 개최된 것을 금방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정부의 핵심 관계자들이 거의 매달 모여서 수출 상황을 점검하고 지시하는 데 기업과 관료가 행동에 나서지 앉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출처: "한국 경제사의 재해석" 2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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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사의 재해석 - 한국경제는 어떻게 성공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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