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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춘욱 Dec 11. 2022

아시아의 힘7 - 세계 최고의 제철소를 어떻게 만들었나

대일청구권 자금을 활용해, 생산하며 효율을 개선시켜 나가

지난 시간 "제조업 육성의 방법"에 대해 설명드렸으니, 이번 시간에는 한국의 포스코 사례를 통해 구체적인 진행 과정 살펴보겠습니다. 혹시 지난번 글을 못 본 분은 아래 링크를 클릭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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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힘5 - 제조업, 성장의 Key Factor

아시아의 힘6 - 당근과 채찍을 활용한 제조업 육성


***


일단 보충 설명을 하자면, 한국은 60년대 중반에 두 가지의 중요한 외부 여건 변화를 겪었습니다. 첫 번째는 베트남 전쟁이었습니다. 아래의 <표>에 나타난 바와 같이, 한국은 1965~1970년 연 평균 약 3.0%에 달하는 베트남 특수를 경험했습니다. 누적 금액으로 환산하면 무려 9.1억 달러에 달했습니다. 특히 베트남 전쟁 과정에서 진행된 물류혁명은 한국이 제조 공업국가로 발돋움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친 요인이었습니다. 

출처: "박정희 경제신화 해부", 95쪽.


베트남 전쟁에 이어 두 번째의 '전환점'은 바로 일본과의 국교정상화였습니다(: "박정희 경제신화 해부", 136~137쪽).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되면서 일본으로부터 청구권 자금 및 차관(공공차관과 상업차관 포함)으로 매년 5000만 달러가 도입될 것으로 예상되었는데, 이는 차관도입목표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금액이었고 일본에 거는 기대가 커졌다. 외화재원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차관은 계획기간 중 8억 3500만 달러를 조달한다고 계획되었지만 일본에서 매년 도입될 것으로 예상되는 5000만 달러를 제외하면, 실제 목표액은 매년 약 1억 1500만 달러였다.


***


상황이 이러했기에, 한국 정부의 포스코 건설은 필사적인 면이 있었습니다(188쪽).


자금을 마련하여 포항 공장을 짓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60년대에 여러 자세한 계획을 발표하면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려고 3번이나 노력했다. 그러나 설비 공급업체들은 외상으로 판매하지 않으려 했고, 세계은행 같은 금융기관들은 한국이 원하는 대규모 일관제철소를 위해 돈을 빌려주지 않으려 했다. 1968년 11월에 발간된 세계은행 보고서는 브라질, 멕시코, 터키, 베네수엘라에서 대규모 일관제철소 프로젝트가 실패한 사례를 언급했다. 

결국 박정희는 일본의 전후 배상금으로 포항제철을 건설할 비용을 댔다. 그는 육군사관학교 교관 시절에 가장 아끼던 제자인 43세의 박태준에게 건설 책임을 맡겼다. 박태준은 이미 국영 광산기업을 되살린 적이 있었다. 노동자들은 매일 현장사무소 앞에 도열하여 일본의 배상금이 프로젝트에 쓰이고 있으며, 돈을 낭비하는 수치스러운 일을 하느니 죽는 것이 낫다는 말을 들었다.


***


살벌하네요. 그러나 열정만으로 일관 제철소를 만들 수 없는 일이죠(책 189쪽).


(제철소 건설의 성공 뒤에는) 대규모와 단계별 접근법의 결합이 있었다. 포항제철은 (일본의 기술 자문이 권한 260만 톤보다 많은) 900만 톤의 생산용량을 지닌 한국 최대의 투자 프로젝트로 기획됐다. 그러나 첫 단계는 100만톤 규모로 시작됐다. 뒤이어 네 번의 단계에 걸쳐 생산용량이 확대됐다. 어려운 기술은 학습 절차에서 나중으로 미뤄졌다. 가령 단순한 상류 작업에 집중한 1단계에서는 연속주조법을 쓰지 않았다. 그들은 우선 하나의 용광로를 지었다. 포스코는 일단 각 건설 단계에 돌입하면 엄청난 속도로 나아가 종일 작업을 했다. 그래야 가능한 한 빨리 귀중한 투자 자본에 대한 성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었다. 건설 속도는최소한 훨씬 낮은 건강 및 안전 기준 때문에 개발도상국의 비교 우위였다. 포스코의 경우 종일 작업 덕분에 생산용량 1톤당 건설 비용이 브라질의 25%에 불과했다.

성공의 두 번째 동인은 기술 자문 내용을 계속 점검했다는 것이었다. 일본제철이 주요 기술 제공업체였다. 일본의 배상금으로 상당 부분 건설비용을 마련하기는 했지만 포스코는 오스트레일리아의 광산기업인 BHP에게 일본의 모든 엔지니어링 보고서를 검토하고 설비조달에 대한 독립적인 조언을 제공해달라고 요청했다. 뒤이어 일본에거주하는 한국계 제철 전문가에게 일본 자문과 BHP의 보고서를 검토하는 일을 맡겼다. 포스코는 모두의 말을 듣되 아무도 믿지 않았다.

세 번째 포스코는 제철소에 대해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배우는 일에 줄기차게 매진했다. 그래서 경영진은 1단계와 2단계를 진행하는동안 구매하는 설비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까 봐 일본 컨설턴트가 추천한 자동화된 제어 시스템을 활용하지 않았다.


소규모로, 그리고 자신들이 확실하게 배운 것 위주로 확장해 나가는 것. 이 과정을 통해, 결국 포스코는 일본제철을 넘어선 세계 최고의 생산성을 자랑하는 철강회사가 되었습니다. 


물론 여기에 강력한 '규율'이 작동했죠. 70년대 초반부터 생산량의 30% 이상을 무조건 수출할 정도로 외화획득을 위해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외화로 빚을 졌기에, 수출만이 살길이라는 생각으로 품질을 개선하고 또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 나갔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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