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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춘욱 Dec 21. 2022

대한민국 만들기5 - 이승만 독재가 무너진 이유는?

고등교육을 마친 인재의 급격한 증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최근 흥미롭게 읽은 책, "대한민국 만들기 1945-1987"에 대한 5번째 서평입니다. 4편에 걸쳐, 한국경제가 이승만이라는 독재자가 저지른 수많은 경제정책 실수에도 불구하고 성장했다는 이야기를 나눈 바 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이승만이 무너지게 된 이유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혹시 지난 번 서평을 못 본분들은 아래 링크를 클릭하시기 바랍니다. 


대한민국 만들기 1945-1987:이승만 외의 대안은?

대한민국 만들기2 - 이승만 정부와 농지개혁

대한민국 만들기3 - 전쟁 이후 이승만 독재 강화

대한민국 만들기4 - 전쟁 이후 경제정책 실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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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3월 15일 저질러진 역사상 최악의 부정선거 이후 이승만은 퇴진하게 됩니다.그런데, 이승만은 그 이전에도 수 차례나 이 비슷한 짓을 저지른 바있습니다. 그 유명한 사사오입 개선이나 3선 개헌 때에는 말도못했죠. 그런데, 왜 1960년에는 혁명이 났을까요? 그 답은 바로 '교육' 받은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에 있습니다. 물론 첫 단추는 미 군정이 세웠습니다(책 86쪽). 


한국의 교육 발전에서 미 군정이 이룬 가장 큰 업적은 학교 교육체계의 확장이었다. 미 군정이 활동하던 약 3년 동안 국민학교 진학률은 40퍼센트에서 70퍼센트 이상으로 증가했다. 중학교는 52개에서 250개로 늘어났으며, 고등교육 기관도 개에서 29개로 증가했다.


농지개혁 이후 먹고 살만해진 가정들이 자녀를 학교에 보낸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지만, 1945~1948년 동안 이뤄진 대대적인 교육 개혁 및 투자가 세상을 바꾸었음을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교육의 내용은 미국에게 유리한 것이었습니다(책 86쪽).


미 군정은 1946년 1월에 최초의 교사 훈련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훈련 센터를 설치하여한국 교사들에게 미국식 교육 방법을 전수했다. 미 군정이 도입한 초기프로그램은 1953년 이후에 도입된 본격적인 훈련 프로그램에 비하면 보잘 것 없었지만, 이를 통해서 미국식 교육의 효과를 인정하는 열정적인 지지층을 양성할 수 있었다. 미 군정의 보고서에 따르면, 이 훈련 센터의 제1기 교육 이수자는 340 명이나 되었다.


http://khei.re.kr/post/510


***


한국 전쟁 이후 (국제사회의 도움 덕분에) 더욱 본격적인 교육 투자가 진행되었습니다(책 86쪽).


한국전쟁으로 파괴된 학교 교육체계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대규모 교육지원이 절실하였는데, 전쟁으로 파괴된 한국을 재건하기 위해서 1951년에 건립된 국제연합 한국재건단이 교육체계에 대한 지원과 재건을 담당했다. 전쟁 직후에 대부분의 학교에서 교실, 교과서와 같은 기본적인 교육 여건이 부족하다는 것을 파악한 한국재건단은 교실 증축에 가장 많은예산을 사용했다. 1952년부터 1956년 사이에 한국재건단은 전쟁으로 파괴된 교실들을 수리하거나 개량하기 위해서 시멘트, 목재 및 건축 자재를 제공했다. 이처럼 한국재건단과 유엔군 사령부의 노력이 합쳐져서 1952년에만 9000여 개의 교실이 수리 혹은 신설되었으며, 1953년부터 1955년까지 해마다 3000여 개 이상의 교실이 수리 및 증축되었다.


<그림> 한국 전쟁 당시 부산 천막 학교 수업 모습

http://busan.grandculture.net/Contents?local=busan&dataType=01&contents_id=GC04207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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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큰 혜택을 받은 곳은 명문 대학들이었다고 합니다(88쪽). 


한국의 대학 재건 사업에 참여한 미국의 단체들도 있는데, 서울대학교, 연세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와 같은 유명 대학이 이 시기에 이들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대학인 서울대는 국제협력국ICA(International Coorperation Administration) 및 미네소타 대학교와 삼자 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을 통해서 서울대는 농과대학, 공과대학, 의과대학 등을 재건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지원받았으며, 미네소타 대학교는 서울대에 전문가를 파견하여 새로운 교육 시설의 도입과 설치를 지원했다. 19세기 말 미국인 선교사들이 설립한 연세대나 이화여대와 같은 사립대학은 미국의 기독교 재단과 유지해오던 관계를 이용하여 재정을 지원 받았다. 일부 학교는 전후 재건에 소요되는 자금을 모금하기 위해서 대표자를 미국에 파견하기도 했다. 이화여대는 이러한 노력을 통해서 아시아 재단과 한미재단으로부터 추가적인 재정 지원을 받기도 했다. 


천만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고등교육을 마친 졸업생들이 다수 배출된다는 것만큼 나라의 미래를 밝게 만드는 일은 없죠. 그러나 그 숫자가 일자리에 비해 너무 많았다는 게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한국의 교육체계는 미국을 포함한 국제사회의 지원에 힘입어 짧은 시간 안에 교육 기회를 전면적으로 확대할 수 있었다. 1960년에 접어들면서 초등 교육부터 대학 교육에 이르기까지 학생 수는 전쟁 이전에 비해서 훨씬 많아졌다. 국민학교 학생 수는 1948년 240만 명에서 1961년 370만 명으로 증가했다. 중학교 학생 수는 1948년에서 1958년까지 약 10년 동안 28만 명에서 44만 명으로 증가했고, 이 기간 중에 인문계고등학교 학생 수도 5만 9421명에서 27만 5612명으로 늘어났다. 같은 기간에 대학생 수도 3만 5000명에서 14만 명으로 증가했다. 


단 10년 만에 대학생 수가 3만 5천에서 14만 명으로 늘어났지만, 이승만 정부가 추진한 '수입대체 산업화' 정책 만으로 모든 일자리를 만들어 낼 수는 없었습니다. 특히 이 수많은 인재들은 1945년 이후 민주주의에 대한 지식과 열정을 갖춘 이들이었죠. 결국, 이승만은 스스로 제 무덤을 판 셈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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