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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두달홍천살이 Aug 30. 2020

[나의 단편 소설] 뜨거운 장학금

어느 할머니의 가난했던 삶의 애환과 교육에 대한 열정 이야기 

지루하고 여긴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한시도 떠나질 않는 커피숍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내게 편지 한 통이 왔다. '매일 같이 오는 학자금 대출 지불 독촉서이겠지'하고 던지려다가 이번엔 뭐라고 지껄이는지 읽어 라도 보자는 심상으로 봉투를 찢었다.


‘치직’  이 소리가 내 무거운 가슴에 돌 하나를 묵직하게 던진다.     


안녕하세요. 은정이 학생. 이 할미가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하고 싶어 찾아보다가 신은정이라는 학생을 알게 되어 이렇게 글로 직접 편지를 보낸 다우. 학생이 현재 휴학 중이라고 들었어요. 그리고 다니던 학교에 장학금 신청서를 매년 내고 있었다고 말이여. 나쁘게 듣진 말아요. 그래도 난 학생을 만날 수 있어 아주 다행인 일루 생각하니께.


난 매일 돌아다니며 종이 떼기 모아다가 하루하루 벌어 사는 몸뿐인 일흔 넘은 늙은이여.

내 몸뚱이 무게보다 더 나가는 리어카를 끌고 이 구석 저 구석 돌아다니는 궂은일을 하면서도 이런 날을 위해 참고 또 참고 견뎌내게 된 사연이 있지. 조금만 읽어주구려.


난 어릴 적부터 가난과 맞물려 살아갔지. 옛날이라 그렇듯 울 부모님은 아들 넷, 딸 여섯의 10남매를 키우고 계시는 농부셨어. 난 그분들 딸 중 넷째 짐이라고 할 수 있었지. 우에 큰 오빠 둘은 엄연히 장남, 차남이라 집안의 고만 안 되는 소득 반 이상을 차지하고 대학을 가고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어. 그 아래 오빠와 큰 언냐는 일찍이 학교와 거리를 두시고 만날 땡볕에 나가 김매기하고 풀 뜯고 고랭 질 하며 부모님 일손들을 거두고 계셨자. 


그러는 동안 우리 육 남매는 집에서 지내면서 산으로 들로 나가 놀기두 하고 수영도 하고 천진난만한 짓들을 했지만 우리들 마음속엔 언제나 학교에 대한 동경과 소망이 담겨 있었어. 언니들과 난 남동생이랑 그 밑 여동생들을 돌보면서 점심쯤 되었다 싶으면 부엌에서 쪼물락 거리는 손으로 점심 새참을 차려내어 부모님과 오빠 언니 계시는 논에 가서 나무 밑에 앉아 다 같이 소박한 식사를 하였지. 웃음만을 끊이지 않았다는 게 우리 집안 대식구의 유일한 장점이었단다우. 


그렇게 살면서도 어느 날은 마을 아주머니의 다급한 소리에 따라가 보면 어머니가 나무 밑에 앉아 막걸리에 잔뜩 취하셔서 울고 계셨어.


“아이고 얘들아 미안타. 이 못난 어미라는 사람이 늬들 학교라는 문턱에도 가보지도 못하게 하니 말이다. 그 어린것들이 얼마나 집구석에서 배우고 싶어 가슴 아팠을꼬. 그러니 어서 커서 이 무식한 어미 같은 사람 될 생각은 일랑 말고 돈 벌어서 하고 싶은 공부 다해보고 꼭 성공하려무나. 아이고, 아이고 내 죄야......


이날은 어김없이 오빠들이 그 어린 몸으로 리어카를 끌고 와서 끙끙 어머니를 싣고 집으로 끌고 와 눕혀 드리곤 했지. 그래도 아무도 불만을 내비치는 사람은 없었단다.

많은 형제들 중에서 유달리 영특했던 나는 소학교에 들어가 한글을 배우고 중학교에 들어갔지. 

하지만 배우면서도 난 우리 집안 사정이 가슴 한 편에는 계속 남아서 난 불편하게 했어.

그래도 배울 수 있다는 행복감에 글자를 쓰고 또 쓰고 했어. 


그러던 어느 날 언니가 날 앞에 앉히더니


 “옥화야. 네게 미안하다.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우리 형편이 힘들잖니. 늙어서 일 못하시는 부모님과 아직 어린 동생들을 위해서 공부를 포기하고 일찍이 손 걷어붙이고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할 것  같구나......” 


그날 난 하루 종일 눈이 붓도록 울고 산에 올라서서 원망의 말을 쏟아내었어. 

그러고 나서는 두말없이 학교를 그만두고 취직을 했지. 

그렇게 세월이 더딘 빗물과 같이 흘러가면서 난 결혼을 했고, 아들 둘을 가지게 되었지. 

그래도 가난이라는 건 우리 곁을 떠나질 않더라. 내 자식들만은 나같이 되게 하지 않으리라 새기면서 밤낮으로 공장일, 우유배달, 인형 눈 꿰매기 ……. 안 해본 일이 없었지. 


이렇게 키워놓은 아이들, 그동안 얼마나 싫증이 났었는지 이 어미 못났다고 서울로 다들 상경하고 현재까지 연락한 통 없어……. 가난이란 얼마나 나에게 모질게 대하는 끈질긴 죄란 말이냐! 


혼자가 된 그날 이후로 난 늙고 초라해진 이 세월을 다신 나 같은, 내 형제들 같은, 내 자식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위해 지금까지 20년 넘게 종이들을 줍고 있지.

행인들의 못된 대접을 받고, 밥에 물 말아 매일 김치를 반찬 삼았어도 그 신념 하나로 버텨냈단다. 

그렇게 이천만 원을 모았어. 


작은 돈이지만은 은정 학생이 이루지 못했던 학업의 꿈을 이루는데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언젠가 한 번 만날 날을 기다리면서 안녕히.

이옥화 할머니로부터…….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가슴이 울렁거릴 정도로 아리고 슬펐다.

끝없는 서러움과 감사함이 물밀듯이 몰려왔다. 지난날의 고난과 아픔이 머릿속을 헤엄쳤다.

사실 난 이 세상의 어른들에 대한 혐오감과 반감을 가지고 살아왔다. 

아니, 그 생각들이 자연스레 내 머릿속에 자리 잡아 왔다고 해야 맞는 말이다. 

어렸을 때부터 난 공부를 하기 위해 이곳저곳 안 다녀본 곳이 없었다. 

하지만 언제나 미안하다, 돌아가라는 말 뿐이었다.


난 단지 공부를 하고 싶었는데, 내가 되고 싶은 꿈을 이루고 싶었는데, 가난이라는 이름이 모든 것을 제한했다. 이런 나를 위해 어른들은 아무것도 준비해주지도 않았고, 있는 자들만을  사회에 맞는다는 불신을 가지고서 이를 악물고 공부하다가 결국에는 휴학서 까지 내밀고 말았다. 그날을 한참 울고 울다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게 내 처지, 내 운명이라는 것이었다. 


매번 퇴짜 맞는  장학금 신청서를 낸 것에 대한 기대도 잊혀 갈 무렵, 이옥화 할머니의 편지를 받게 된 거다. 

이건 어둠 속을 헤매고 있던 내게 하나의 불빛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다. 

어른들과 세상에 대한 불신들을 모두 용서하고 녹여버렸다. 

내가 사는 이 세상에 이 할머니와 같은 마음을 품고 도우려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았기에. 


내 전공은 정치외교학이다. 어두운 삶을 사는 학생, 국민으로서 훗날  나와 같은 학생들이 마음껏 공부하고 사회에 훌륭한 존재가 되게 하고 싶다는 각오와 열정을 가지던 나였다. 이제 내 본모습이 드러났다. 

이 할머니의 땀과 눈물과 한 끼 좋은 식사의 포기가 담긴 뜨거운 돈으로 인해서……. 

그리고 또 하나 생겨난 목표가 있다. 이렇게 홀로 하루하루를 사시는 이옥화 할머니 같은 노인 분들께 어릴 적 가슴에 묻어두었던 교육에 대한 간절한 소원을 풀어드리고 싶다는 거! 


그러기 위해 난 튀어나올 것만 같은 가슴으로 00 대학교에 복학신청을 하러 달린다. 

그리고 바로 할머니에게로 달려가 뜨거운 포옹을 해 드리고 그분의 손녀가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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