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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훈희 Jul 18. 2021

엄마는 왜 김치를 싸 주시는가

김치 - 어른이 되면 보이는 것들 중

흔들리는 가방 속에서 내 김치 향이 느껴진 거다.


남색 레쟈로 된 도시락 주머니의 작크를 열면

동그란 보온도시락 통과 비닐봉지에 묶인 김이 있었다.


도시락 뚜껑을 돌려서 열면 맨 위에는 반찬통이 있고

중간엔 흰 쌀밥, 맨 아래는 따뜻한 국이나 보리차가 있었다.


도시락 주머니를 냄새와 함께 축축하게 적신 주범은

도시락 통 맨 위칸의 김치에 있었다.


등굣길에 흔들리는 도시락 속에서

김치는 돈가스와 같이 춤을 추면서

반투명 플라스틱 반찬통 뚜껑을 쉽게 열었고

김치는 도시락통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날 이후부터 엄마는 도시락의 김치 때문에

친구들한테 쪽 팔리다며 투덜거리는 날 위해

젓갈이 담겨있었던 작은 유리병을 준비하셨고


김치는 이제 도시락통 안이 아니라

유리병으로 자리를 옮겨 비닐을 먼저 덮고

금색의 철제 뚜껑이 닫힌 채로 도시락 주머니로 들어왔다.


김치병은 김치 국물이 새지 않기 위한 좋은 방법이었지만

점심시간마다 그 뚜껑을 어린 소년이 손으로

돌려서 여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더운 여름날

국물이 자박자박했던 김치병은 발효의 힘을 견디지 못해

도시락 주머니 안에서 뚜껑이 폭발해버렸고

빨간 김치 국물은 시큼한 냄새를 풍기며

온 교실에 퍼져나갔다.


푹 익은 김치처럼 얼굴은 부끄럽게 익어 갔고

김치를 싸준 엄마가 참 원망스러워서

집에 가서는 다신 김치를 싸주지 말라고

엄마한테 어지간히도 짜증을 부렸다.


물론 그 투정 이후에도 엄마는

꾸준히 터지지 않을 법한 병으로

주기적으로 바꿔가며 김치를 싸주셨다.


아무리 병이 바뀌어도

도시락의 김치는 계속 뚜껑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꾸준히 국물을 흘려댔고 난 그때마다

김치 좀 어떻게 해보라며 엄마한테 화를 냈다.


.


차를 몰고 어머니를 뵈러 간다.


아이들은 할머니 댁에 가면

별로 할 것도 놀 것도 볼 것도 없는데

우리 집이 아닌 곳에 간다는 것만으로도 마냥 신나 있다.


평소에 집에서 했다가는 잔소리를 듣게 되는

서랍장 위에 올라가기, 장롱의 이불 다 꺼내서 마음껏 펴기

문틀에 다리를 양 옆으로 벌리고 올라가기 등

억제된 욕구를 마음껏 분출할 수 있는 공간이 아마도

할머니 댁이기 때문일지라.


그렇게 두 아들이 할머니 집을,

우리 어머니 집을 적당히 난장판으로 만들고 나면

난 이제 집에 돌아갈 준비를 한다.


그때쯤이면 신발장에는 까만 비닐봉지 여러 개와

조금 구겨진 종이 쇼핑백

그리고 커다란 플라스틱 밀폐용기로 된 김치통이 있다.


신발장 앞에서 나보다 먼저 우리 집에 갈

준비를 하고 있는 그 봉지와 통 들에 대해

어머니는 하나하나 설명을 해주시고

난 그 통 속의 김치를 걱정스레 바라본다.


자동차 트렁크에 짐을 싣고

아이들 안전벨트를 채워 주고

창문 넘어 손 인사를 신나게 하면

자동차는 다시 우리 집으로 출발하고

차 뒷유리에 비치는 어머니의 모습이 점점 작아진다.


지루한 운전 끝에 집에 도착해서

잠들어 있는 아이들을 들쳐 메고 어르고 달래어

겨우겨우 침대에 뉘 운다.


다시 주차장으로 내려와서 짐을 빼기 위해 트렁크를 열면

예나 지금이나 어머니께서 싸주신 김치는

그때 도시락에서든

지금 자가용 트렁크에서든 눈치 없이

또 시뻘건 국물을 줄줄 흘리고 있다.


이제는 당연한 일인 것처럼

바닥에 깔린 비닐과 국물이 흐른 밀폐용기를

미리 준비해 간 키친타월로 쓱쓱 닦고 김치통을 꺼낸다.


이제는 김치 국물이 터졌다고

날 놀리는 같은 반 친구도

투정 부릴 엄마도 더 이상 내 곁에 없다.


그래도 어머니가 꾸준히 싸주시는 김치는

자식을 향한 꾸준한 부모의 사랑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넘치고 또 커져서


밀폐용기 김치통 뚜껑처럼

답답하게 꽉 닫혀버린 현실의 문을 비집고 나와

내 눈앞에 한없이 하염없이 흘러내린다.


그리고 난 이제 아무 투정 없이

시뻘건 김치 국물을 닦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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