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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때굴 Feb 13. 2022

[낙서07]길치지만 자랑스럽습니다

길은 잘 찾는 길치(?)

나는 지독한 길치다. 스마트폰에 지도를 띄워두고도 어디가 어딘지 도통 모르겠다. 우선 좌우 분간이 어렵다. 겨우 방향을 찾아 길을 나서도 반대로 가기 일쑤. 평면 지도를 두고서 우뚝 솟은 건물 사이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한참을 갈팡질팡한다. 결국 돌고 돌아 한참 뒤에야 목적지에 도착한다. 그래도 차라리 혼자 있을 때 길을 잃으면 다행이다. 동행자가 있는 경우면 민망한 상황이 꽤나 자주 벌어진다. 함께 가는 친구에게 늘 대신 길을 찾아달라 하기도 미안하거니와, 상대방에게 지도를 봐달라 부탁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아니… 내가 일부러 이러는 건 아니고… 사실 나 지독한 길치거든…”




하지만 지독한 길치의 의외성이 발휘되는 경우가 있다. 바로 ‘낯선 순간’이다. 혹시 길치의 특징을 아는가. 길치 가장 큰 특징이 바로 우선 직진이다. 걷다 보면 길은 나오기 마련, 그리고 모든 길을 이어져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다 막혀있다? 다시 돌아가면 된다. 예전에 친구들과 함께 홍콩으로 여행을 간 적이 있다. 그중 한 친구와 함께 아무 버스나 잡아타고 마음 가는 곳에 내려 발 가는 대로 산책을 하기로 했다. 시내를 거쳐 작은 마을, 그리고 또다시 이름 모를 바닷가로. 닿는 대로 가다 보니 어느새 해가 질 무렵이었다. 그날 봤던 노을은 아직까지도 잊지 못할 가장 아름다운 풍경 중 하나로 남아있다. 이날 우리 둘 중 아무도 지도를 본 사람은 없었다.


“길을 잃었다… 어딜 가야 할까…”

한국인들이 길을 잃으면 자연스레 흥얼거리게 된다는 ‘아이유의 분홍신’. 최근 이 노래를 참 많이 불렀다. 실제로 길을 잃은 적도 많거니와 지금 나는 인생의 길을 잃은 상태기 때문이다. 지난해 취업과 퇴사만 2번을 반복했다. 만 25세 현재 직업은 결국 다시 백수가 됐다. 호기롭게 시작한 백수생활이다. 아직 젊을 때 꿈을 찾아 도전해봐야지라며 뛰어든 취업 시장. 스스로가 참 멋있다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웬걸, 막상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공부를 하려니 좀도 쑤시고 오랜만에 책을 펴니 눈앞으로 글자가 날 아닌 지경이다. 취업에 대한 절박함으로 미친 듯이 공부만 하고 살 줄 알았는데 막상 쉬어보니, 오랜만에 가진 휴식이 얼마나 재밌고 달콤한지 모르겠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으나 막상 겪으니 어이가 없긴 했다. ‘절박하단 놈이 말이야…’ 일단 걷고 보는 길치의 특징처럼, 일단 던졌으니 책임은 져야 할 텐데 큰일이다. 차라리 환승 이직을 했어야 하나 생각했지만 곧 접었다. 사실 공부에만 올인해도 통과할까 말까인데 회사생활과 병행한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나는 그렇게 못한다. 길은 몰라도 스스로에 대한 파악은 잘하고 있다. 내게는 그럴만한 체력이 없다. 그래서 일단 길을 나건 것이다. <(1) 일단 굴리면 굴러간다 (2) 걷다 보면 닿게 돼있다> 그동안 터득한 나름의 지혜(?)와 함께 말이다.


만약 내 삶을 지도로 만들어 나의 위치를 화살표로 표시할 수 있다면 지금 어디쯤 어떤 방향을 향해 있을까. 아마 동서남북 잡지 못하고 빙글빙글 돌고 있을 수도 있다. 올바른 방향으로 간다 해도 중간, 중간 샛길로 빠져서 돌고 있을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내가 미처 예상치 못했던 전혀 새로운 길로 걸어가고 있는 중일 수도 있겠다. 여전히 꿈자리는 사납고, 머리카락은 약해지고 있다. 늘 밥을 먹고 나면 속이 더부룩하다. 하지만 동시에 기대가 된다. 인생에서 무언가를 깨달을 만큼 지혜롭게 시간을 보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동안의 시간들을 돌이켜보면, 걷다 보면 항상 무언가는 돼있었다. 그 무언가가 나쁘지는 않았다. 혹시 알까. 지금 이 길치가 겪고 있는 이 방황의 끝, 또 다른 홍콩의 노을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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