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명동감자탕
이 모든 것들이 리모델링 후 ‘하얀 감자탕’의 조연을 자처합니다.
그저 감자탕 집이 인테리어를 바꿨구나 정도로 생각할 수 있지만,
비로소 자신들만의 브랜딩을 시작한 걸로 보입니다.
멜로망스의 ‘사랑인가봐’가 흐릅니다. 밝은 회색 벽, 까만 프레임의 나무식탁과 의자, 입구 오른쪽 실내는 메인 공간이고, 왼쪽으로는 창밖을 향한 바 테이블이 보입니다. 혼밥 손님들을 위한 1인 좌석이죠. 카페 인테리어까지는 아니어도 깔끔합니다.
손님들이 기다리는 음식이 뭐냐고요? 감자탕입니다. 돼지 등뼈와 큼지막한 감자가 들어 가 있는 그 해장국입니다. 벽에 걸린 메뉴판에는 감자탕과 매운등뼈찜 두 가지만 적혀 있습니다. 그 흔한 주류도 없네요. 무엇보다 이 집, 특이하게 하얀 감자탕을 냅니다. 돼지 등뼈로 끓인 탕을 하얀 국물로 낸다? 자신 있거나 무모하거나 둘 중 하나겠죠.
영주에 다녀왔습니다. 오랜만에 명동감자탕에 들렀어요. 이 집 감자탕은 다른 곳과 다릅니다. 빨간 국물이 아니라 맑은 국물입니다. 하얀 감자탕이라고들 부릅니다. 2016년 SBS ‘백종원의 3대천왕’ 감자탕 편에 나오며 유명세를 탔어요. 1981년에 문을 열었으니 약 40년 역사입니다. 오랜 시간 영주의 명동(영주사람들은 일대를 그리 부릅니다)을 대표하는 맛집입니다.
그 사이 음식점 리모델링을 했더군요. 검색 하니 2019년 새롭게 단장했다 나옵니다. 이전에도 간판이 제법 재밌었어요. 한 줄로 늘어선 명동감자탕 다섯 글자는 위아래 열을 맞추지 않았죠. 특히 첫 글자 ‘명’의 받침 ‘o’은 간판 기준선 밖으로 반 칸 정도 내려가 있었어요. 제 눈에는 그게 감자밭 같았어요. 이 간판은 ‘감자체’다 마음대로 이름 붙인 기억이 나요.
리모델링한 명동감자탕 간판은 예전의 폰트를 가져왔어요. 대신 반듯하게 열을 맞췄습니다. 하얀 배경 속 글자 크기는 이전보다 작게, 세련되게 적었습니다. 이름 앞에는 고딕체 대신 명조체로 ‘1981년부터 이어온 깔끔하고 구수한 맛’이란 설명을 그대로 달았고요. 가운데 붉은색 띠가 지나던, 반만 투명하던 유리창은 이제 밖에서도 잘 보이는 전면 투명유리입니다.
잘 했다 싶었습니다. 디자인이 빼어난 리모델링이라 말하는 건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제야 비로소 하얀 감자탕이 보입니다. 이전까지는 전형적인 감자탕 집이었습니다. 빨간 감자탕이나 뼈 해장국을 낼 것 같았죠. 이곳만의 개성인 하얀 감자탕이 가려지는 느낌이었어요. 좀 안타까웠습니다. 그런데 새 디자인은 명동감자탕이 전하고 싶은 바가 잘 드러나네요.
입구로 들어서자 정면에 주방이 보입니다. 시선은 곧장 오픈 키친 너머 일명 ‘식깡’이라 불리는 커다란 육수통으로 향합니다. 뼈다귀 육수가 끓고 있어요. 원래부터 주방이 있던 자리입니다만 한층 돋보입니다. 출입구와 주방 사이 공간을 비워 주방으로 시선이 가도록 했습니다.
감자탕은 선입견이 있는 음식입니다. 위생에 대한 염려죠. 특유의 잡내가 사람에 따라서는 거부감을 주기도 하고요. 그래서 된장과 고추장, 고춧가루, 들깨가루까지 듬뿍 넣어서, 쾨쾨한 냄새를 지운 후 맵고 달큰한 맛으로 즐기는 걸 테고요.
명동감자탕은 오픈 키친 하나로 ‘빨간 감자탕’과 차등을 두며, ‘하얀 감자탕’의 존재감을 드러내요. 하얀색이 가지는 맑고 깨끗한 이미지, 이곳만의 위생 관념을 한껏 뽐냅니다. 그리고 하얀 감자탕의 맑은 국물을 한 숟가락 떠서 맛보는 순간, 그 믿음은 시각에서 미각으로 옮겨갑니다.
역시나, 맑고 담백해요. 누린내가 없습니다. 국물은 끈덕지지 않고요. 명동감자탕의 표현을 빌리자면 ‘구수’해요. '3대천왕'에서 백종원 씨는 향은 닭곰탕, 맛은 갈비탕에 가깝다 했죠. 그리고 시래기가 없습니다. 닭곰탕이나 갈비탕에 가까운 감자탕이라, 시래기는 없는 게 더 잘 어울립니다. 그렇다고 심심하다는 건 아닙니다. 등뼈에 붙은 고깃살은 부드럽고 넉넉합니다. 뭉텅 뭉텅 썰어넣은 감자 또한 뼈다귀해장국이 아닌 감자탕을 증명하고요. 감자의 전분 분질이 국물에 적당히 녹아들어 감칠 맛을 더합니다. 매운 걸 원하시는 분을 위해서 얇게 썬 청양고추와 양념장이 작은 접시에 따로 나옵니다. 맑은 국물을 절반 정도 비운 후에 매운 맛으로 옮겨 갈 수도 있지만, 저는 맑은 국물로 마무리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그제야 주변을 돌아봅니다. 옆자리에는 엄마와 딸 그리고 딸의 남자친구인 듯한 세 사람이 식사합니다. 뒤쪽에는 아이를 동반한 4인 가족입니다. 20대 친구 그리고 30~40대 연인 등, 여느 감자탕 집과는 구성이 다릅니다. 한층 젊고 다채롭습니다. 감자탕 또한 전골냄비에 담아 나오는 소, 중, 대 사이즈가 아니라, 오로지 1인분씩 뚝배기에 담아 나옵니다. 영업은 오후 8시에 끝납니다. 보통 감자탕 집은 밤새도록 등뼈를 우려야 하니 24시간 영업이 많지요. 그러니 술을 곁들이는 사람이 없습니다.(팔기는 합니다) 어느새 음악은 멜로망스에서 아이유의 ‘strawberry moon’로 넘어가네요.
이곳의 감자탕, 실은 하얀 감자탕이 아니라 맑은 감자탕이 맞겠죠. 매운탕과 맑은탕(지리)으로 나뉘듯이요. 그런데 하얀 감자탕이라고 부릅니다. 그건 선언처럼 다가옵니다. 늦은 새벽에 '마지막으로 한 잔 더'를 외치며 찾는 해장국집은 아니라는 거죠. 깔끔하게 정돈된 실내외, 입구에 들어서면 곧장 보이는 청결한 주방과 육수통, 20대 초반의 밝고 경쾌한 아르바이트생, 소주와 맥주가 빠진 메뉴판, 요즘 유행하는 감성 음악, 그때 내 테이블에 나온 음식이 빨간 감자탕이라고 상상해 보세요. 어울리지 않겠죠? 적어도 그보다 하얀 감자탕이 딱 맞아떨어지는 건 부인할 수 없습니다.
사소한 요소들의 변화 같지만 이 모두가 리모델링 후 ‘하얀 감자탕’의 조연을 자처합니다. 그저 감자탕 집이 인테리어를 바꿨구나 정도로 생각할 수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비로소 자신들만의 브랜딩을 시작한 걸로 보입니다. 우리가 아는 감자탕 집의 특징들을 차례차례 허물어뜨리는 방식으로 말이죠. 브랜딩은 굉장한 걸 해야 할 것 같지만 어쩌면 내가 잘 하는 것, 나의 장점을 좀 더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기도 할 테니까요. 하얀 감자탕이 갈비탕 메뉴의 또 다른 대안처럼 느껴진 건 그런 까닭일 테죠. 어쩌면 명동감자탕의 경쟁자는 다른 감자탕을 너머, 갈비탕집이나 설렁탕 집까지 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