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타너스 나무를 처음 만난 건 초등학교 1학년 때였어. 내가 6학년 때 분교가 되고, 몇 년 후에는 폐교가 되어버린 그 학교의 운동장에는 플라타너스 나무가 여러 그루 있었지. 그즈음에는 어느 학교에 가더라도 커다란 플라타너스 나무를 쉽게 볼 수 있었어. 운동장 가에 커다란 플라타너스가 여러 그루 커다랗게 자라고, 여름이면 풍성히 돋아난 나뭇잎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었단다. 지금도 그 커다랗고 시원한 그늘이 생생히 기억나. 햇볕이 아무리 쨍쨍해도 그 나무 그늘 아래는 정말 시원했거든. 커다란 나무들이 더 커다랗게 그늘을 만들어주어서 운동장 가장자리는 고무줄놀, 말타기, 구슬치기를 하기에 딱 좋은 명당자리였지. 늦가을이 되면 백 명도 안 되는 전교생이 아침마다 운동장에 모두 모여 낙엽을 주웠단다. 높은 곳에 매달려있을 때는 나뭇잎이 그렇게 큰 줄 몰랐지. 운동장에 떨어진 플라타너스 나뭇잎은 어린아이의 얼굴보다 더 컸어. 커다란 잎이 누렇게, 갈색으로 변해 운동장에 떨어졌는데 짙은 그늘만큼이나 낙엽의 수도 많았어. 나뭇잎을 주워 내 얼굴, 친구 얼굴에 갖다 대어 보기도 했지. 커다란 마대자루가 몇 개나 꽉 차도록 나뭇잎을 주워 담았던 기억이 나는구나.
네가 다닌 학교에는 플라타너스나무가 없었다고? 그럼 그 학교는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학교일 거야. 요 근래에 지어진 학교는 운동장에 더 이상 플라타너스를 심지 않거든. 왜냐고? 다른 나무들처럼 플라타너스도 미움을 받기 때문이지. 원래는 그렇지 않았어. 플라타너스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심긴 가로수이기도 하고 말이야. 플라타너스는 가로수로, 공원수로 굉장히 인기가 많은 나무야. 오늘은 그 이야기부터 해야겠구나.
플라타너스 나무 종류 중에서 가로수로 즐겨 심긴 나무의 정확한 이름은 양버즘나무란다. 지금도 서울시 가로수 중에 두 번째로 많은 나무가 양버즘나무야.(제일 많은 가로수는 은행나무래.) 양버즘나무가 가로수가 인기가 있었던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첫째, 빨리 쑥쑥 잘 자라는데 이 만한 나무는 없을 거야. 길가나 공원에 있는 나무라면 마땅히 너른 그늘을 드리우는 미덕이 필요하잖아? 빨리 자라는 데다 잎도 커다래서 큰 그늘을 금세 만들어줄 수 있지. 둘째, 공기 중에 수분을 잘 내뿜어서(증산작용) 여름에 플라타너스 나무 옆에 있으면 상당히 시원한 느낌을 받을 수 있어. 그늘이라 원래 시원한데 수분기가 더해져서 더 선선하게 느껴지는 거야. 도시는 아스팔트, 에어컨 실외기로 인해 도시 바깥보다 더 더워. 그걸 도시의 열섬 현상이라고 한단다. 도시 안에 열이 갇혀서 다른 곳보다 더 더워지는 거야. 양버즘나무 같은 나무 덕분에 그 온도가 조금은 내려갈 수 있겠지? 세 번째로는 공해에도 끄떡없는 튼튼한 나무라는 점이야. 심각한 공기 오염을 견디지 못하는 나무들도 많은데 양버즘나무는 도심 한가운데에서도 어김없이 생명력을 과시하는 강인함을 지녔어. 프랑스 파리에서 가장 복잡하고 공기가 탁한 시내 중심지에 플라타너스 나무가 가로수로 심겨 있다고 하더라. 마지막 이유는 공기 중의 오염물질을 흡착하는 능력이 무척 뛰어나기 때문이야. 플라타너스 잎 뒷면에는 보송보송한 털이 나있어. 이 털에 공기 중의 오염물질이 잘 달라붙는대. 어때? 도시의 거리에서 자라기에 이만큼 멋진 나무를 찾기 쉽지 않겠지?
이렇게 좋은 나무인데, 왜 요즘에는 점점 플라타너스를 심지 않게 되었을까. 버드나무나 소나무와 마찬가지로 꽃가루 알레르기를 일으키기 때문이래. 정확히 말하면 양버즘 나무의 꽃이 아니라 둥근 열매가 공기 중에 흩어져 날리는 현상 때문이지. 양버즘 나무의 열매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 보자. 양버즘나무의 열매는 탁구공처럼 생겼어. 체리처럼 긴 줄기 끝에 동그란 열매가 귀엽게 매달려있지. 이 나무를 북한에서는 방울 나무라고 부르는데 열매가 생긴 모습이 꼭 작은 방울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지. 이 열매가 나무에서 뚝 떨어졌을 때는 굉장히 단단해. 바닥에 떨어진 열매가 비를 맞았다가 햇볕에 말랐다가를 반복하면서 단단하던 방울이 흐물흐물해져. 바닥에 떨어진 지 제법 시간이 지난 열매는 손이나 발로 살살 누르면 겹겹이 뭉쳐있던 씨앗들이 후드드하고 흩어지며 솜털처럼 날리게 되는 거야. 또 다른 이유도 있어. 커다란 덩치에 비해 뿌리가 땅 속 깊이까지 들어가지 않아서 태풍이 오면 쓰러질 위험이 있다나.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양버즘나무들은 많이 잘려나가고 새로운 가로수로 대체되는 중이야.
크고 오래된 공원에 가면 가지를 자르지 않아서 위로, 옆으로 가지를 쭉쭉 뻗은 우람한 양버즘 나무를 만날 수 있어. '이렇게 크게 자라는 나무를 좁은 길가에서 살게 한다니! 말도 안 돼!' 이런 말이 절로 나오게 될걸. 요즘 시내 길에는 양버즘 나무를 네모난 기둥처럼 다듬기도 했더구나. 예쁘고 귀여워 보이기도 하지만 양버즘 나무가 본래 지니고 있는 위풍당당하고 듬직한 모습이 난 더 멋진 것 같아. 양버즘 나무가 크게 자라나 가게 간판을 가린다는 민원이 있는 곳에서는 나무의 몸통 줄기만 남긴 채 나머지가 싹둑 잘려나가기도 해. 양버즘 나무가 너무 크게 자라는 게 진짜 문제인 걸까. 요즘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는 도시는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도시야. 도시를 계획할 때 가장 먼저 공사하는 것이 도로지. 차가 다니는 도로 옆에 붙여 사람길인 인도를 만드는데 차도는 4차선, 6차선, 8차선 넓게 만들어도 인도는 거기서 거기야. 인도도 좀 널찍하게 만들고 그 가운에 양버즘나무를 심었더라면 어땠을까. 풍성하고 짙은 그날 밑에서 다른 사람과 부딪힐 걱정이 없다면 걸어 다니는 일이 더 즐겁게 느껴졌겠지? 양버즘 나무가 가로수로 너무 크다기보다는 인도를 너무나 좁게 만든 것이 더 큰 문제가 아닐까.
아참, 혹시 양버즘나무 이름 속에 들어있는 버즘이 무엇인지 알고 있니? 요즘 어린이들은 아마 버즘을 잘 알지 못할 거야. 버짐이 옳은 표현인데 특히 겨울철에 얼굴 같은 곳이 하얗게 일어나는 피부병의 일종이란다. 먹을 것이 늘 부족하던 옛날에는 누구나 얼굴에 버짐이 핀 채로 살았다지. 양버즘나무는 나무 겉껍질 조각이 한 겹 씩 벗겨지면 드문드문 허연 속살이 드러나는데 그 모습이 얼굴에 얼룩덜룩하게 핀 버짐 같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어. 요즘에는 인스턴트 음식을 너무 많이 먹어 피부 면역력이 떨어질 때 생기기도 한다지만 얼굴에 버짐이 핀 사람은 많지 않지. 양버즘나무의 버즘이라는 이름 속에도 먹고살기 힘들었던 옛사람들의 고단한 삶이 들어있는 셈이야.
여기서 퀴즈를 하나 내볼게. 앞에 나온 글을 잘 읽었다면 맞출 수 있을 거야. 양버즘 나무 씨앗을 멀리 보내 번식을 도와주는 건 누구일까? 1번. 곤충, 2번. 새, 3번. 바람. 씨앗에 털이 달려있으니 3번 바람이라고? 맞아, 바람을 타고 깃털 달린 씨앗이 멀리멀리 날아갈 수 있지. 하지만 양버즘나무 씨앗은 웬만해선 싹이 트지 않는다고 해. 그래서 줄기를 잘라 땅에 직접 꽂는 방식인 꺾꽂이(삽목)로 번식을 시켜. 그러니 바람이 아닌 사람이 양버즘나무의 번식 짝꿍인 거야. 그리스에서는 기원전 5세기부터 플라타너스를 가로수로 심었다고 하니 정말 오랜 역사를 간직한 나무야. 오랜 세월 가로수로 지내오다가 점차 플라타너스들은 씨앗 대신 사람의 손을 빌어 줄기로 번식하는 방법을 택한 거겠지. 그런데 이를 어쩌나. 이제 사람들이 플라타너스를 번식시켜 주기를 원하지 않고 있어. 우리는 가로수의 시조새 격인 플라타너스와도 헤어질 준비를 해야 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