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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연 Aug 09. 2022

단단하면서도 유연한 마음으로

안정성과 가동성


지난 글에서 동시 수축에 대해서 이야기했어요. 움직이려는 힘과 반대로 저항하는 힘이 팽팽하게 유지된 상태에서 내가 가려는 방향으로 가야 안전하게 움직일 수 있다고 했죠. 그래서 단단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유연해야 합니다.


제가 쓴 두 번째 에세이의 제목이 ‘단단하지만 뾰족하지 않은 마음’이었는데요. 저는 남을 다치지 않게 하는 게 너무 중요한 사람이었습니다. 저의 친아빠가 때리는 분이었거든요. 아빠는 엄마를 때리고, 엄마는 언어적인 폭력으로 저희를 다치게 했습니다. 저는 거짓말을 하는 동생한테 소리를 지르다가 문득 ‘이게 대물림 되는 거구나.’를 깨닫고 저는 결코 그런 걸 다른 사람한테 주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1년 정도 동생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동생이 제 물건을 훔치든, 괴롭히든, 시비를 걸든, 없는 사람 취급했죠. 저도 동생도 어릴 때여서 동생에게는 언니가 아무 이유도 없이 갑자기 자기를 없는 사람 취급한 것이 상처가 되었을 거예요. 모두에게 어렵고 힘든 시기였어요.


어릴 때는 그게 아프고 힘들기만 했지만(사실 지금도 가끔 아프지만), 지금은 어린 나이에 저를 임신하고, 아빠한테 맞으면서도 저를 낳아서 키우려고 노력했던 엄마의 선택이 조금은 보입니다. 저에게 있는 상처도 엄마가 아빠에게 맞은 것만큼이나 많지만요. 언제까지 예전의 일을 탓하고 있을 수만은 없으니까요.


언젠가 엄마가 저한테 두부 같다고 한 적이 있어요. 으깨면 그냥 뭉개져 버릴 것 같은 저의 약한 마음이, 엄마 눈에는 너무 잘 보여서 그게 또 걱정되고 아프고 화가 나다가 미워졌을지도 모르겠어요. 자기처럼 다치지 않기를 바라서 그랬는지 엄마는 그럴수록 저한테 모질게 굴기도 했습니다. 저는 단단해지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그 ‘단단함’이라는 게 남을 미워하는 마음을 품어야만 되는 것 같았거든요. 누군가 나를 상처 줬을 때 바로 말하지 못하고 참는 게 습관이 되었고, 그렇게 참다가 미워하는 마음이 정말 많이 쌓여야 겨우 거절하고, 겨우 저를 지킬 수 있는 선택을 할 수 있었어요. 저는 남을 미워하는 마음을 품는 것 자체가 싫고,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를 지키기 위해서 어찌 되었든 단단해야 했고, 그러면서도 남을 다치게 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단단하지만 뾰족하지 않은 마음’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이렇게 긴장되고 단단하기만 한, 경직되고 굳어버린 마음으로 지금의 상태를 지키려고만 한다면요, 몸에 빗대어 생각해봐도 건강하지 못한 상태가 될 겁니다. 단단하면서도 유연하게, 그러니까 안정성을 가지면서도 가동성이 있어야 몸이 건강하게 잘 움직일 수 있거든요. 너무 단단하면 그 상태를 지키느라고 무진 애를 써야 합니다. 그만큼 에너지도 많이 필요하고, 근육들은 쉽게 피로해지겠죠. 갑자기 어떤 흔들림이나, 충격이 왔을 때에도 단단하게 버티려고만 한다면 더 힘들고 부담이 될 것입니다. 그러다가 다칠 수도 있죠. 너무 단단하면 부러져버리는 것처럼요. 그리고 지금의 상태만 지키려고 하다 보면 나는 삶에 더 큰 경험이나 도전을 할 수 없게 되어버릴 것입니다. 그러니까 흔들림과 충격이 왔을 때 부러지지 않고 적절히 스트레스와 충격을 배출하면서도, 내가 가고 싶은 방향으로 움직일 수도 있어야 건강한 움직임이겠죠.



그렇다면 마음으로 보면 안정성과 가동성은 무엇일까요? 지금의 상태를 안정적으로 잘 지키려는 단단함과, 내가 가고 싶은 방향으로 또 유연하게 움직일 수도 있는 가동성은 어떤 마음일까요? 마음의 안정성이 지금의 나를 지키려는 것이라면, 유연함은 위험하고 낯설고 익숙하지 않음을 알면서도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움직이고 도전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단단함은 나를 공격하는 것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마음, 즉 건강한 정도의 미움이고, 가동성은 상처받고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가가는 마음, 즉 사랑이 아닐까요.


그게 꼭 사람을 향해서가 아니라도요, 내 삶에 찾아오는 과제나, 위험, 고통에 대해서 나를 보호하고 지키고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려는 마음이 단단함, 즉 일종의 미움이고, 내 삶을 흔들리게 하고 새로운 것으로 가게 하는 과제들을 받아들이고, 기꺼이 경험하고 해내 보려고 하는 시도가 사랑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정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저는 ‘미움’이라는 감정 자체를 나쁜 것, 싫은 것, 품고 있으면 불편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어떻게든 없애보려고 했습니다. 모든 것을 사랑할 수는 없을까? 모든 사람을, 한 사람의 모든 면을 사랑만 할 수는 없을까? 꼭 싫어해야 나를 지킬 수 있는 걸까? 나도 모르게 싫고, 불편하고, 미운 세상의 부분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미워하고 싶지 않은데, 그 마음을 품는 것 자체가 제가 제일 힘들었거든요.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받아서 한참을 쌓아두고, 폭발 직전이 되어서 조금이라도 미움을 표현할 수 있을 때가 되면 겨우 거절을 하거나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 자체가 저한테는 너무 힘든 일이었어요.


마음의 결벽증처럼, 흰 운동화에 작은 얼룩도 가만 두지 못하고 꼭 지워버리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미워하는 마음은 하나도 없이 사랑만 하고 싶었습니다. 저에게도, 남에게도. 그런데 제가 신이 아닌 이상 모든 것을 빠짐없이 사랑할 수는 없잖아요. 어떤 순간에는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죠. 하지만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도 당연하고, 좋아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도 당연한데, 감정은 옳고 그른 게 아닌데 미워하는 마음을 없애려고 하니까 그게 더 힘들었던 것 같아요.


“미워하는 마음이 생길 수도 있어.”


그렇게 스스로에게 얘기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타인을 정말 미워하는데 쓰는 게 아니라 ‘나는 그게 왜 밉고 싫을까.’를 생각해보면 나에 대해서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그걸 고치려고 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수용이 아닐까요?


아 내가 이런 이런 이유로 이런 사람을 보면 불편한 기분이 드는구나. 그 불편한 기분을 고쳐야지!! 내 마음에서 없애야지!!! 가 아니라 이런 이런 이유를 제가 자세히 들여다 봐주었습니다. 그럼 나도 이렇게 해볼까? 안 하던 것이지만 어떤 경험인지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움직여보기 시작했어요.


미워하는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이 균형 있게 있어야 나를 지키면서도 또 삶을 사랑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미워하는 마음도 미워하지 않고 들여다봐주고 수용해주면서요.



다음 글에서는 단단하면서도 유연하게, ‘내가 움직이려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얘기해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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