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동적이면서도 나를 보호하는 움직임이란 뭘까요? 익숙하고 편해서 거기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해서 가는 것. 내가 의도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 내가 어떤 자세에 있을 때 그 자세를 내가 선택해서 간 건지, 아니면 그냥 그 자세가 편해서 그렇게 있는지가 중요해요. 굽은 등인 사람이 라운드 백을 잘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요. 그냥 그 자세가 편할 뿐이죠, 익숙해졌기 때문에. 보기에는 비슷해 보일 수 있지만, 내가 선택해서 능동적으로 굴곡을 일으키는 것과 그냥 편해서 굴곡되어 있는 상태는 전혀 다른 움직임입니다.
라운드백 (그냥 등을 구부리는게 아니죠! 두 힘이 모두 팽팽하게 쓰이면서 동글하게!)
마음이 참는 것도 마찬가지이죠. 참는 게 습관이 된 사람이라고 해서 참는 걸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충분히 거절할 수도 있고, 참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능동적으로 참고 양보하는 걸 선택한 것과 어쩔 수 없이 싸우기 싫어서, 차라리 내가 불편한 게 낫고 익숙해서 참고 양보하는 것은 전혀 다른 움직임입니다. 내가 선택해서 능동적으로 한다는 것은, 나는 굴곡을 할 수도 있고, 신전을 할 수도 있고, 중립을 지킬 수도 있는데, 그 상태에서 굴곡을 선택해서 움직이는 것이에요. 내가 양보도 할 수 있고, 불편함을 감수하고 거절할 수도 있고, 어색함을 참고 침묵을 지킬 수도 있는 상태에서 양보를 선택하는 거죠. 거절과 불쾌함을 표현하기가 어려워서 참게 된 것이 아니라요.
이렇게 건강한 몸의 움직임은 '중립'이라는 올바른 자세를 지킨다고만 해결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양한 움직임을 다 할 수 있는 상태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능동적으로 선택하는 것이죠. 또한 그 선택을 그때그때 타이밍과 상황에 맞게 적절하게 해내야 하는 것이었어요. 참 어려운 일이죠?
나를 보호하는 거절을 적절히, 잘하려면
저는 저를 보호하기 위한 거절이나, 불쾌감의 표시를 하려면 미워하는 마음이 아주 많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참고 참고 또 참아서 그 미워하는 마음이 풀 충전(?)될 때까지 참다가 아예 안 볼 정도의 미워하는 마음이 쌓여야 마음을 단단히 먹고 거절을 하거나 손절을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어요. 근데 그때그때 적절한 타이밍에 거절과 반대 의사든, 불쾌감의 의사든, 부정적인 것들을 표현하는 게 저한테는 너무 어렵고 힘든 일어 었거든요. 그리고 미움이 정말 많이 많이 쌓이기 전에는 애지 간해서는 표현할 용기가 도저히 나지 않았어요. 그냥 내가 한 번만 더 참자, 이번만 참자, 불편해지기 싫다. 그렇게 참아왔던 일들이 혼자 울분이 되는 날이면 내가 조금 더 참고 조금 더 그릇이 넓고 조금 더 현명하다면 할 수 있었던 일 아닐까, 내 이해심은 왜 여기까지 밖에 안될까 하면서 저 자신을 탓하게 되었죠.
그러다 어떨 때는 '너는 계속 나한테 어리석고 무례하게 굴지만 내가 더 이해심이 많으니 참아주는 것이다.'라는 오만함으로 그 시간을 견딜 때도 있었어요. 어떻게든 버티려고 별 생각을 다 했었죠. 결과적으로 겉으로 보기에는 제가 참으면 평화가 지켜지니까요. 그런데 제가 힘든 상황과 사람에 적절히 대처하거나 거절하지 못하고 계속 당하는 건, 제가 저를 그런 상황에 계속 내버려 둔 건, 그리고 그걸 계속 감당해내라고 채근 해댄 건,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자기 학대에 가까운 일이 아니었나 싶어요.
마음의 단단함이 미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더 건강한 형태가 있다면 알려주세요. 저는 저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어느 정도의 경계심과 나를 공격했을 때 그러지 말아 달라고 얘기하는 마음이, 미움이 하나도 없으면 잘 안되거든요.
거절의 의사를 받아들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에게 하기도 하는 연습이 저에게는 많이 필요했습니다. 그걸 하다 보니 이제는 정도의 문제가 있더라고요. 적절히 맞춰주고, 적절히 거절하는 것 말이에요. 꼭 다이어트하는 것처럼. 아예 많이 먹어버리거나, 아예 안 먹어버리는 건 차라리 하겠는데, 적당량을 건강하게 잘 챙겨 먹는 것이 가장 어렵잖아요.
타인에게 맞춰주다 보면 그게 습관이 되어서 내가 조금 불편하더라도 그냥 내가 한번 더 참고 말지 하는 마음으로 계속 맞춰주다 보면 어느 순간 한계에 다 다르고, 그걸 익숙하게 생각하고 도리어 요구를 하는 사람들을 손절을 하거나 또 그 관계에서 도망쳐버리곤 했습니다. 적절한 때에 적당한 방식으로 거절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게 참 어렵더라고요.
내가 거절을 어려워하는 이유
저는 남의 말에 영향도 너무 잘 받고, 상처도 너무 잘 받는 성격입니다. 그냥 지나갈 말에 대해서도요. 얼마 전에 또 오은영 선생님이 나오는 프로그램을 봤는데 ‘습자지 같은 사람’이라는 말을 하시더라고요. 제가 다른 사람의 사사로운 말 한마디 한마디에 너무 영향을 많이 받고 다 흡수되니까, 제가 누구한테 말을 내뱉을 때도 지나치게 생각하고, 눈치 보고, 상처받을까, 혹시 부정적인 영향을 줄까 오만가지 걱정을 하면서 말과 행동을 해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살면서 누구에게도 상처 줄 말과 행동을 안 했다는 것은 아니에요. 제가 지나치게 긴장하고 눈치를 보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했다는 의미입니다. ‘나도 너를 찌르지 않을 거니까 너도 절대 나 찌르지 마.’라는 마음으로요.
사람 간에는 적정한 거리가 있는 게 좋다는 이야기는 너무 많죠. 저도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지만 어렸을 때의 저는 좋아하고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그냥 한없이 다가가버리고야 마는 성격이었어요. 그래서 책에서 그런 문장을 읽을 때마다, 동의하면서도 야속한 마음이 들었는데요. 제가 자주 듣는 이연님의 유튜브에서 굉장히 좋은 이야기를 들었어요. 사람에게는 다 독이 있다는 이야기인데요, 당연히 그 독은 나에게도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있는 것이라서 그 독이 오르지 않도록 나도 조심해야 하고 남도 조심해야 한다는 이야기였어요.
저는 그 이야기가 참 도움이 되더라고요. 저에게는 좋은 부분도 있지만 분명 안 좋은 부분도 있고, '그걸 들키면 절대 안 돼! 사람들이 싫어할 거야!'라고 너무 방어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사람에게는 조금씩 독이 있고, 그게 서로 너무 안 좋은 영향을 주지 않도록 적정한 거리와 적정한 시간을 조절한다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편해졌어요. 도망치고 숨는다는 느낌보다는, 적정한 거리에서 좋은 에너지를 주고받으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그래서 거절을 적정하게 잘하려면
아무튼 그러려면 나에게 적정한 거리와, 타인에게 적정한 거리도 잘 알아야 하겠죠. 그리고 그 거리를 너무 넘어오거나 서로에게 독이 오르려는 순간에 아 이 정도에서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게 좋겠구나 하는 판단과 완곡한 거절, 실행력이 필요할 텐데요. 그 타이밍에 맞게 적절한 대응을 하는 게 참 어렵죠.
사전에 따르면 중용은 상황에 따라서 말과 행동(감정표현)을 해야 되는지, 해선 안되는지를 아는 판단력, 즉 어느 상황에서 그 말과 행동이 지나친 것인지 모자란 것인지, 그 적절함을 판단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적절함이라는 게 얼마나 애매하고 모호하고 사람마다 다른가요. 우리가 마주하는 상황도 그때그때 너무 다른데 말이에요.
점핑 보드에서 기본 뛰기
필라테스의 리포머라는 기구에는 점핑 보드를 설치해서 운동을 할 수 있어요. 점프해서 뛰었다가 쾅! 떨어지지 않게 부드럽게 착지를 해야 하죠. 착지하려는 순간을 내가 캐치해서 발목, 무릎, 고관절을 잘 구부려줘야 내가 그 충격을 그대로 받지 않고 잘 분산하면서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어요. 그러려면 내가 눈으로 보지 않더라도 내가 어느 정도의 힘으로, 어느 정도의 거리를 뛰었는지 알아야 하겠고요. 내 발과 다리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있어야겠죠.(고유 수용 감각) 그리고 붕 하고 뛰어있는 체공시간 동안 내 다리를 들고 잘 버틸 수 있어야 하고, 착지하려는 순간을 캐치하는 순발력과 그에 맞는 대응을 해내는 민첩성을 트레이닝하기에 좋은 운동입니다. 단순해 보이는 점핑 보드의 한 동작에도 정말 많은 것들이 들어있죠? (이게 필라테스의 매력:)
또 이걸 마음에 응용해서 훈련을 해봅시다. 마음도 그렇게 잘 움직이려면 일단 나 자신의 마음이나 감정 상태를 잘 관찰하고, 또 그 관찰로 알게 된 것을 수용해주어야 해요. 네가 예민해서 그런 거 아냐? 하고 탓하는 게 아니라요. 평균적인 기준에서 볼 때는 어떨지는 몰라도, 내 입장에서 불쾌했거나 침해당했다는 생각이 들면 그게 맞는 거죠. 그건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세계니까요. 다른 사람들은 이해해주지 못하더라도 나는 나를 이해해줘야 합니다. 내가 살아오면서 겪은 사소하고도 아찔한 상처와 고통과 기쁨과 슬픔은 온전히 나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일 테고, 그로 인해 만들어진 나의 세계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만큼은 끝까지 이해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예전에는 그게 좀 힘들었는데 지금은 꽤 해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순발력도 훈련하면 늘듯이, 적정한 때에 적정한 거절과 의사표현을 할 수 있는 민첩성과 순발력을 마음에서도 키워야겠어요. 저의 몸으로도, 회원님의 몸으로도 수없이 확인한 것처럼. 단언컨대 연습하면 늡니다. 처음에는 못하더라도 괜찮아요. 하는 척이라도 해보고요, 안 하던 일도 일부러 해보기도 해요. 내가 매몰차게 거절당하고 심하게 상처받은 기억 때문에, 나는 그 거절을 다른 사람에게 하고 싶지 않은 거일 수도 있죠. 내가 싫어하는 사람의 모습을 너무너무 닮기가 싫어서 끝없이 도망쳐왔던 거라면, 일부러라도 그렇게 해봅니다. 근데 그런 경험들을 쌓아 가다 보면 나의 여러 가지 모습들을 수용할 수 있게 되어요. 그리고 그 연습을 계속 또 하다 보면 나와 내 주변의 타인에게 적정한 정도를 조절할 수 있게 되죠.
그렇게 참는 게 익숙해서 참을 수밖에 없어서 참는 게 아니라, 진짜 되기 싫었던 모습이지만 폭발하기도 해 보고, 그렇게 참지 못하는 내 모습도 겪어보고, 조금만 참아보기도 해 보고, 조금 더 참기도 해보고 그렇게 많은 경험과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결국은 저에게 적정한 정도로 참는 것을 하기 위해서요.
저는 계속 수업을 하면서 제 몸으로도 회원님들의 몸으로도 확인을 많이 했으니까, 마음도 그럴 수 있을 거라는 조금 자신감과 믿음이 생기네요. 여러분에게도 그 경험을 나눠드리고 싶어요. 제가 몸을 통해서 배운 것들을 함께 마음에 적용해나갑시다. 저도 아직 많은 연습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