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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리바 Mar 17. 2020

표정조차 자유롭지 못한 타인의 기준

난 언제부턴가 굉장히 메마른 사람이 되었다. 말하면 뚝뚝 끊기는 현상에 나도 당황스러울때가 있다.

성격도 그렇다. 꼭 할 말이 아니면 나서고 싶지 않다.

그러나 어떤 자리에서는 말을 한번 시작하면 분위기를 주도하면서 사람과의 관계를 부드럽게 풀어주기도 하다. 어떤 상황이나 누구와 있느냐에 따라 나의 모습도 변한다. 

그래서 나 조차도 나를 정의할 수 없다.

예전에는 어려운 자리에서도 편한 분위기를 만들고 싶어 이런저런 분위기를 주도했다면, 현재는 그 어색한 기류를 받아들이고 애써 외면한다. 불필요한 관계를 만들고 싶지 않아서.



얼어있던 어느 날, 굳이 내가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듣는 이의 입장에서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나에게 시선이 집중이 되었다. 이유는, 내가 짓고 있는 무표정 때문이었다.

무표정이어도 웃는 얼굴이 있는 사람이 있는 반면, 무표정일 때 말 걸기 무섭고, 어려운 표정을 지닌 사람이 있는데, 내가 무표정을 지을 때 굉장히 보기 싫은 얼굴이라며 날이 바짝 선 목소리와 더불어, 공개된 자리에서 내 무표정이 별로인걸 나를 비롯한 모두에게 당당하고 당연하게 이야기하는 그 태도에 나는 당황했다. 펀치를 여러 번 맞은 거 같은 공격도 공격인데, 그 이후에 질문에 나는 더 당황했다.


'너 네 표정 좋지 않다는 소리 자주 들었지?'

사람들은 그제야 내 표정과 반응을 인지하기 시작했고, 난 그 대답에 떨렸지만 '아뇨?'라며 당황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여러 가지 정황상 왜 그렇게 날 서게 나를 공격했는지 감이 왔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들 덕분에 내 역할을 축소되었다.


생각해보니 나는 그 사람의 주변 사람들처럼 그 사람을 위해서 자료를 준비해준다던가, 상냥하게 그 사람에게 다가가 그 사람의 일을 살핀다던가 그 사람의 비위를 맞춰주지 않았다.

그 사람은 굳이 내가 아니더래도 살펴줄 사람이 있었으니깐. 난 웃으면서 '호호호' 할 사회적 경험치가 너무 없었다. 같이 생활했던 언니는 잘 웃고, 수긍해주고, 맞춰주고, 밤새 자료를 고민해주었으니 당연히 비교가 되지 않았을까. 거기다 이역만리 떨어진 해외에서는 시야가 좁아질 수밖에.


억울한 마음이 컸지만, 나 잘되라고 하는 말이겠거니 라는 생각으로 '난 무표정이 별로 좋지 않네'라고 생각하고 넘겼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입꼬리를 올려보는 연습을 하고 있다. 

그 사람이 아니더래도 그 이후의 내 역할에 대한 일들은 내 뜻도, 그 사람 뜻도 아닌 대로 풀렸다. (내 표정 때문에 일이 풀리지 않은 것도 아니었고.)



그 사람을 기준으로 생각해 보건대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예를 들자면, 겉은 바삭한데 속은 촉촉하고, 겉은 촉촉한데 속은 바삭한. (바삭과 촉촉이 의미는 사람의 내면을 두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난 그 사람에게 전자 같은 사람이었으리라. 물론 그 사람은 내가 속이 촉촉한지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겉만 보고 판단해 보자면, 나는 일단 어른들한테 애교도 없고, 상냥하지도 않고, 무뚝뚝하고, 어색해해서 그 사람이 나를 쉽사리 좌지우지할 수 없는 입장이다. 그렇다고 매몰차거나 매정한 마음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는 것도 아니다. 누군가가 나를 필요로 한다면 '오키~'하고 도움을 주고 마무리까지 묻는 편이니깐. 이 정도면 겉바속촉 아닐까.


최근에 약간 그 사람에게 고소했던 건 그 사람이 후자 같은 사람을 만났고, 되려 당했기 때문이었다.

자기가 보기에는 상냥하고, 사근 하고, 어른한테 잘하는 사람이었겠지만, 웬걸 지내다 보니 포장만 반지르르한 사람이었던 것. 

만개한 해바라기처럼 웃는 얼굴 뒤에는 고집, 아집, 온갖 생떼들이 다 들어 있어서 그 사람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그 사람에 대해 고생하는 걸 보는데 '저 사람의 보는 눈이 100프로 정확하지 않다는 걸 이번 걸 통해서 느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해바라기처럼 웃는 얼굴을 한 사람의 속내를 어떻게 단번에 캐치하겠냐만은.



우리는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의 이미지를 통해서 그 사람의 전부를 유추한다. 내 내면에 무엇이 들어있던 말던 내 표정이 좋지 않으면 상대방은 '별로다'라는 인식으로 나를 바라볼 것이다.

난 상처 받았던 날을 생각했다. 그 당시 해외였고 숙소는 따로였지만 나 홀로 섬에 떨어져 억울함을 삭이는 시간은 길었다. 내 표정을 통해서 그 사람이 뭘 불편해했는지 알 수 없다. 불편하건 말건 난 상처 받았고, 이유도 듣지 못했다. 그저, 내 표정이 별로니깐 고치라는 거지.

한편으로는 억한 심정에 '내 표정의 장벽을 넘지 못하고 도움을 받지 못하니 저러는 거구나'싶었다. 같이 갔던 사람들은 자동 웃음을 장착하고 그 사람의 부탁에 '네~'했으니깐. 

그 사람의 기준에 나를 맞추고 싶진 않지만,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취해야 할 부분은 취하려 한다. 그간 몰랐던 내 표정에 대해서. 아무도 말해주지 않은 내 표정에 대해서. 곰 같은 나도 가끔은 여우가 돼야 한다는 것도.




그렇지만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며 주변을 살피는 면밀함을 보이는 것도 어른의 미덕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이만 든다고 해서 어른이 아니라, 나보다 더 많은 걸 안다고 해서 어른도 아니다.

무언가를 많이 쥔다고 해서 존경이나 존중을 받는 것도 아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내가 겪지 못한 사람들의 종류는 내가 아는 것을 넘어선다. 그러니 부디 자신의 언행으로 사람을 잃지 말고 사람을 얻는 사려 깊은 어른이 되길. 나에게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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