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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RYU 호류 Apr 14. 2021

제주로 떠난 셀프 명상 리트릿

나를 위한 시간, 나에게 주는 선물

언젠가부터 혼자 있는 걸 무척 좋아하게 되었다. 요즘엔 더욱 혼자만의 시간을 절실하게 갈망한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아무한테도 신경 써주지 않아도 되는 정신적 해방감 말이다. 어떤 특별한 날을 맞이하여, 나에게 '나 홀로 시간'을 선물하기로 했다.




♪오늘의 BGM: 장희원「문득, 행복」

곡 소개 및 감상 후기: https://brunch.co.kr/@horyu/4

노래 듣기: MINTPAPER 공식 채널 https://www.youtube.com/watch?v=6RICRpVIFls

파란 하늘을 봤을 때,
그 위 구름들이 예쁠 때,
바람이 등 뒤로 불어와 날아갈 것 같을 때,
문득 난 행복한걸
- '문득, 행복' 가사 중에서




2년 가까이 정기구독 중인 마음챙김 명상 앱에, 제주도의 특정 장소에 가서 하는 명상 콘텐츠 시리즈가 올라온 적이 있다. 디지털 콘텐츠에 나오는 명상 스폿들을 오프라인으로 직접 찾아가서 그 콘텐츠를 들으며 하는 명상이라니, O2O 액티비티 같기도 하고 생생함과 현장감도 더욱 크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언젠가는 꼭, 단순 관광이나 특산품 먹으러가 아니라, 그저 이 '명상 리트릿'을 목적으로 제주도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리트릿 retreat’ 또는 ‘리트릿 여행’은 양질의 휴식 시간을 통해 삶의 에너지를 재충전하는 데 의미가 있다. 리트릿은 ‘힐링’의 또 다른 이름으로, 사전적으로는 ‘(하려던 일에서) 한발 물러나 안전한 곳으로 빠져나가다’라는 의미다. 몸과 마음을 고요한 곳으로 옮겨놓고 내 안의 중심을 찾는 활동이라고 볼 수 있다. ‘리트릿’을 테마로 한 프로그램은 주로 자연 속에서 충분한 시간 동안 명상 또는 요가를 하거나 느리게 다도를 체험하는 식이다. 일찍이 인기를 끌었던 템플스테이와 비슷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으나 많은 부분을 개인의 취향에 맡기는 등 조금 더 선택이 자유롭다.
(출처: VILLIV 칼럼 '리트릿, 제대로 쉬는 곳')



생일을 맞이하여, 이 날 만큼은 집이 아닌 다른 곳에 가서 혼자 있고 싶었다. 기왕이면 시내 호텔에서 호캉스 하는 것 말고 다른 지역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어디 멀리 가는 기차표보다 저렴한 제주도 항공권을 쉽게 발견했다. '그렇다면, 예전부터 생각해 온 그 명상 여행을 이번에 하면 딱이겠구나!' 하며 차 없이도 제주도를 돌아다닐 수 있을지 알아보기 시작했다.




공항에 내려 다행히 별 어려움 없이 직행버스를 타고, 이번 명상 리트릿 여행의 베이스캠프가 될 숙소에 도착했다. 캠프 안의 특정 위치에 가서 하는 명상 콘텐츠도 있고, 주변 동네를 다니면서 무엇을 관찰하거나 귀 기울이며 명상하는 것도 있다. 게임에서 어떠한 장소로 이동하면서 미션 퀘스트를 하나하나 클리어하듯이 흥미롭게 명상 수행을 하러 다녔다. 오디오로 된 이 콘텐츠 특성상 그동안 소리로만 듣고 상상해야 했던 풍경을, 이렇게 실물 영접한다는 게 신기했다.


오랜만에 집이 아닌 곳에서 아침을 맞이했다. 생일날의 첫 장면에 감동했다. 일출 보겠다는 굳은 다짐은 없었지만 어쩌다 보니 이른 아침에 잠깐 깼다. 전날 밤에 기존 배정받은 방에 문제가 있어 다른 방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같은 일출봉 전망의 방이어도 이 방의 전망 각도와 높이가 훨씬 좋았다. 창문도 한 개 더 있어서 한결 상쾌했다. 이런 게 바로 전화위복인가 보다.




고성리에서 성산리까지 쭉 뻗은 일출로를 따라서 올레길 1코스로 진입했다. 이번 명상 퀘스트 장소 중 하나인 광치기 해변이 펼쳐졌다. 바다의 색채감, 바람의 온도와 감촉, 햇빛이 비치는 각도가 딱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동쪽으로 해변이 있기 때문에, 해가 서쪽으로 눕는 오후 3시부터 일몰까지는 해변 방향으로 햇빛이 비쳐서 색감이 더욱 아름답다.



'광치기 해변을 걸으며 오감을 여는 명상'이라는 콘텐츠를 틀어놓고, 성산일출봉을 바라보며 북쪽으로 걸었다. 넓고 푸르게 탁 트인 시야, 시원한 파도와 갈매기 소리, 싱그러운 바다 향기와 개운한 바닷바람, 썰물 때 드러난 까만 바위들과 까만 모래사장, 오후의 햇빛을 그대로 받아 영롱하게 빛나는 바다와 하늘의 색깔과 그 너머의 우뚝 선 성산일출봉. 주위의 모든 것을 마음껏 받아들이고 감상하며 걸었다. 옆의 잔디밭에는 말 한 마리가 조용히 풀을 뜯고 있었다. 걷다 보니 지나가는 사람도 점점 줄어들어 마음도 편안했다. 모래사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살짝 앉았다. 벌써 한 시간 정도 걸었네. 슬슬 출출해졌다. 아까 점심 먹고 동네 한 바퀴를 돌며 사온 제일성심당 햄버거빵을 드디어 꺼내 먹었다. 시각, 청각, 촉각, 후각, 그리고 미각까지, 명상 가이드 제목 그대로, 오감이 활짝 열리는 느낌이었다.




최종 퀘스트 장소는, [한도로 269-××]라는 주소만으로 찾아가야 하는 곳이었다. 장소 명칭도 모르고, 어떻게 생긴 곳인지도 모르는 채로 길을 찾아가는 거라 진짜 무슨 보물찾기 미션을 하는 것 같았다. 성산일출공원 매표소를 뒤로 하고 일단 계속 걸었다. 이 길도 계속 걸으니 한동안 행인이 없이 한적해서 좋았다. 바다 표면 위로 성산일출봉의 뒷면 해안 절벽이 있었다. 멀리 다른 섬들도 보이고, 광치기 해변 산책로에서보다 더 넓어진 풍경이 상쾌했다. 물질하고 나온 해녀 아주머니들은 바다에서 캐온 양식들을 손질하고 있었다.


'앗, 여기인가? 아직 아닌가?' 하며 멈췄다가 가기를 반복하다 보니, 무슨 글이 새겨진 바위가 쭉 늘어선 곳이 나타났다. GPS 상으로는 아직 더 올라가야 하는데, 진짜 여기인지 긴가민가했다. 일단 GPS가 가리키는 지점까지는 가봤다. 여기는 계단 창문 포토존에서 인증 사진을 찍으려고 사람들이 줄 서있는 전망 테라스 카페였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들으려고 했던 명상 콘텐츠 음성을 일단 들어봤다. 낭독해주는 시를 자세히 들어보니 아까 '여기인지 아닌지 긴가민가했던' 그 길의 바위에 적힌 시였다. 그 길로 돌아갔다.




드디어 찾아냈다. 이 곳은 바로 '이생진 시비(詩碑) 거리'라고 한다. 아까 그 명상 콘텐츠를 다시 재생하며 비로소 최종 퀘스트 명상을 진행하였다. 가이드 음성에서 흘러나오는 '설교하는 바다''바다를 본다''술에 취한 바다'라는 작품들을 감상할 때 나도 그 시가 새겨진 비석들 앞에 서서 차분히 함께 읽어보았다. 이번 제주도 명상 시리즈의 퀘스트 장소 중 이곳이 계속 제일 궁금했다. 원래는 여기에서의 명상을 먼저 하고 나서 돌아가는 길에 광치기 해변 명상을 하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이곳이 최종 장소가 되었다. 목적지에 다다르고 나니, 그렇게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미션 퀘스트를 클리어한 기념으로, 시 비석들 전체가 보이는 풍경을 담았다. 저 앞에, 해안 절벽 배경으로 멋있게 구도 잡아가며 사진 찍는 대학생 같은 친구 둘이 있었다. 그들에게 다가가서 내 사진을 한 컷 부탁하며 원하는 구도를 말해줬다. 진지하게 각도 맞추며 혼신을 다해서 찍어주는 모습에 굉장히 감탄했다. 나도 그들의 사진을 찍어주고, 이 자리의 경치를 잠깐 더 감상하다가 떠났다. (사진첩 보니까 이 친구들이 나를 30장이나 찍어줬더라. 이렇게까지 열심히 찍어주다니 감사하군!)




'제주도에 온 김에 명상을 한다'가 아니라, '명상을 하러 제주도에 왔다'는 것이 스스로 생각해도 새롭고 독특했다. 제주도까지 갔는데 유명 횟집이나 갈치구이집은 안 가보고, 걸어서 다니는 범위에만 머물며 조용히 명상이나 하고 왔다 하면 탐탁지 않게 여길 주변인들의 시선이 떠올랐지만, 이런 눈치와 걱정은 과감히 치워버렸다. 내 방식대로 하루하루를 만들어가니 더욱 자유롭고 감사했다. '여기 오면 이걸 꼭 먹어봐야 한다', 혹은 '이런 거 해봐야 한다더라' 하는 남들의 기준에 얽매이지 않고 나의 가치관과 생각대로, 여기 와서 내가 하려고 한 것을, 내가 정하고 의도한 것을 해서 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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