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 진통
'나 배가 계속 아파서 휴가 쓰고 병원 왔어'
전날 밤늦게 배가 아프다고 했을 때 병원을 갔어야 했다.
주차가 늘어가면서 배뭉침이라는 게 찾아온다는데, 그럼 조금 기다리면 가라앉는다던데 하면서. 또 예민하지 못했다. 최소한 병원에 전화라도 해봤어야 했다.
'나 입원하는 게 좋을 것 같대'
문자를 보자 아차 싶었다. 그제야 바로 휴가를 쓰고 병원으로 향했다. 아내는 2분 간격으로 주기적으로 자궁 수축이 오고 있었다. 다행히 자궁 경부가 길어서 조산 위험성은 낮다고는 했지만 아직 21주 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나 빨리 진통이 올 수도 있다니. 입덧이 끝나고 배가 많이 불러오기 전까지는 별 일이 없을 줄 알았다. 방심했다. 더 조심했어야 했는데.
한 달음에 도착한 병원, 아내는 분만실에서 자궁수축억제제를 맞고 있었다. '라보파'라고 하는 약인데 아드레날린과 비슷한 작용을 하여 자궁 수축을 억제한다고 한다. 자궁수축은 부교감신경이 활성화되면 일어난다. 밤에 더 자궁 수축이 많이 일어나는데 그 이유가 바로 이 부교감 신경 활성화로 자궁수축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라보파는 부작용이 있는 약물이라서 심박수가 높아지고, 몸이 덜덜 떨리기도 하고 호흡이 가빠질 수도 있다. 아내는 심박수가 올라가는 것 외에 다른 부작용은 보이지 않았다. 자궁 수축 수치는 0에서 100까지 수축의 정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높을수록 더 강한 수축이 오며, 더 통증이 강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아내의 자궁 수축 수치는 높을 때는 40까지도 올라갔지만 라보파 단계를 높여가며 점차 떨어져 가기 시작했다. 분만실은 난리였다. '하나. 둘. 셋. 큐!' 하고 산모에게 힘을 주라는 간호사님의 목소리와 함께 일제히 분주히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분만을 옆에서 미리 체험해 보는 것도 괜찮은 경험이다 싶었다. 그러는 사이 수축 수치도 10 이하로 떨어지고 주기도 30분 넘게 늘어났다. 우리는 일반 병실로 옮겼다. 생각보다 별 일이 아니었다. 이때까지만해도 이날 밤이 길어질 줄은 몰랐다.
조기 진통은 생각보다 흔하다. 사람들이 말을 안 해서 몰랐던 거지. 알고 보니 형수님도 조기진통으로 2번이나 입원하셨단다. 대부분 라보파 맞고 수치가 떨어지면 상태를 지켜보다가 퇴원한다고 하는데, 길게는 몇 주씩 입원하기도 하고, 만삭에 가깝다면 그대로 입원한 채로 진통을 늦추다가 출산하기도 한다.
진정되는 줄 알았던 진통이 저녁 9시부터 주기가 다시 5분 간격으로 줄어들고, 강도도 심해졌다. 일반 병실에서 라보파를 제일 높은 단계까지 맞았지만, 주기와 진통은 줄어들지 않았고 우리는 다시 분만실로 가야 했다. 분만실에서 가서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다. 약을 맞고. 자궁수축 수치를 측정하는 것이 전부다. 우리는 이미 라보파를 최고 단계까지 맞고 있었고, 이때는 아내의 호흡이 너무 가빠져있었다.
분만실에 당직 의사 선생님이 들어오시더니, 라보파 투약을 중지시켰다. 척 봐도 머리가 희끗하고 경험 많으실 것 같은 선생님이셨는데 간호사님들을 나무라며 말하셨다. 이렇게 몸이 작은 산모인데 라보파를 과다 투약하면, 부작용이 심하다고. 가장 위험한 건 호흡이 너무 가빨라져서 폐에 물이 찰 수 있는데, 이렇게 되면 산모에게 치명적이라고. 바로 라보파 대신 트랙토실이라는 약으로 바꾸었다. 이 약은 자궁 수축을 일으키는 호르몬인 옥시토신 분비를 방해한다. 라보파에 비해 부작용이 없는 좋은 약이지만, 가격이 비싸다. 보험 비급여항목이라 한 사이클에 60만 원이다. 하지만 지금 가격이 문제겠는가. 당연히 비싸고 좋은 약 써야지.
트랙토실을 맞고 2시간 뒤에 상태를 지켜보기로 했다. 새벽까지 수액을 맞고 있는 아내와 그 옆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 자궁이 이완되어야 하니 몸이 좀 풀어지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마사지라도 조금씩 해줬지만, 사실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자궁은 의도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불수의근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신경계가 이완되면서 부교감신경이 활성화되면 자궁 수축이 일어난다고 하니 긴장하지 않게 하려고 내가 한 노력들은 오히려 자궁 수축을 도운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트랙토실을 맞고 2시간 후. 수축 지수 측정기를 벨트로 고정시켜 배에 둘렀다. 진통 간격을 내가 직접 측정했을 때는 주기는 그다지 줄어들지 않았고 5분 간격으로 계속해서 진통이 있었는데. 그래도 뭔가 좋아지고 있지 않을까 기대를 품었다. 아내는 몰랐겠지만. 옆에서 수치를 보고 있는 입장에서는 피가 말랐다. 3분에 한 번씩 수치가 조금씩 오른다. 수치가 20이 넘으면 아내는 고통스러워하기 시작하고. 나는 더 이상 올라가지 않기를 바란다. 트랙토실을 맞고 있는데도 수축 지수는 계속해서 최고 수치를 갱신하고 있었다. 왜 약이 받지 않는 걸까. 트랙토실을 맞은 지 시간이 꽤 지났으니 이제, 약이 작용을 할 시간은 충분히 지났을 텐데. 수치가 60이 넘어가면서 난 참지 못했다.
내가 의료진을 믿지 못하는 진상 보호자가 될 줄은 몰랐다. 간호사님들은 모니터링하고 있으니 기다려보라고 했지만. 나는 벌써 약이 효과가 나타날 시간이 지난 게 아니냐 물었다. 왜 계속 수치가 높아지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당직 의사 선생님은 담백하게 말하셨다. 이런 경우는 방법이 없다고 아직 아기가 너무 어려서 버티기에도 기간이 너무 길고, 대체할 수 있는 다른 약도 없다고. 이 약이 안 들어서 자궁 수축 수치가 계속 높아지면 결국 양수가 터진다고 하셨다. 그 뒤에 어떻게 되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떨어지지 않는 수축 수치를 지켜보면서 평생 해보지 않은 기도라는 걸 해본다. 평소 과학적 사고를 강조하던 나인데.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알게 되니 기도라도 해야 했다. 20이 넘으면 마음을 단단히 먹는다. 40이 넘으면 속으로 '내려라. 내려라.' 읊조리지만 내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진다. 60이 넘어가면 나도 아팠다. 아내는 더 아플 거다. 미안했다. 내가 못 견디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3분에 한 번씩 이 과정을 반복하니 고문이 따로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아내가 진통 속에서 얕게 잠이 들었지만, 수치는 내려가지 않았다. 나는 분만실을 나와 분만실 문 앞에서 기다렸다. 최악의 경우를 마음 한 구석에 미뤄두고 어떤 결과가 돌아오더라도 나와 아내가 잘할 수 있기를 다짐했다.
조기진통이 온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어제는 아내가 평소보다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더 받은 날이었다. 회사 동료가 할 일을 안 해서. 아내가 늦게까지 대신 수습을 해야 했다. 아기 방을 미리 준비한다며 중고거래해 왔던 아기 매트를 함께 세탁했는데, 이때 힘을 좀 썼다. 내가 운전연수를 가는 바람에 아내가 저녁을 준비했는데, 아내는 저녁을 준비하다가 유리병 떨어뜨려 큰 소리가 났다. 나도 놀랐으니, 아마 아내는 더 놀랐을 거다. 나는 일이 많아 야근을 하느라 아내를 잘 챙기지 못했고. 늦게까지 일을 마치고 피곤한 몸을 침대에 누이니, 그때부터 아내가 배가 좀 이상하다고 했다. 놀라서 그랬을까. 스트레스 때문이었을까 몸이 피곤해서였을까.
진통이 온 원인을 모르는 것처럼. 약이 듣게 된 것도 원인을 모르겠다. 3시간이 넘게 효과가 없던 트랙토실은 서서히 아내의 진통을 누그러뜨렸다. 규칙적이던 진통이 불규칙적으로 변했고. 수축 수치도 40 아래로 떨어지고. 조금씩 조금씩 수치는 낮아져 갔다. 당직 선생님은 이러다가 정말 약이 듣지 않는 경우도 많은데, 다행이라고 하셨다. 마침내 내게 잘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덕담을 한 마디 해주셨다. 잘 모르겠지만 그냥 감사했다. 의사 선생님한테도, 간호사분들한테도 몇 번이나 감사하다 말씀드렸다. 다행이었다. 정말로.
새벽 3시쯤 되어서야 일반 병실에서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아직 조금씩 진통이 있었으니 진통 주기를 체크하면서 보호자용 간이침대에 몸을 누였다. 긴 밤이 끝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