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출신의 똑똑한 친구를 알고 있다. 미스터 클레버 Mr. Clever라는, 겉 멋이 잔뜩 들어간 친구다. 대체 얼마나 똑똑하길래 스스로 그렇게 부르는 걸까. 기실 작년에 알게 된 커피 추출기구의 이름이다. 이른바 필터커피의 신기원을 이룬 제품이 아닐까 싶다.
우선 프렌치프레스가 추출해 낸 깊은 맛을 알아야 한다. 그다음엔 마시고 난 뒤 프렌치프레스의 후처리가 여간 성가시지 않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아마도 결코 세상에 나올 수 없었을 녀석이다.
하루에 한두 번씩, 미즈도 아닌, 미스터 클레버를 만난다. 매일 만나지만 신기하게도 그를 볼 때마다 설렌다. 이 친구는 대체 어떤 매력이 감춰져 있는 걸까. 조우 이후 부쩍 살가워진 미스터 클레버와 나는 서로 역할을 분담하는 썩 괜찮은 파트너가 되었다. 포트의 전원을 켜고 원두를 가는 소리만 들어도 그는 이미 눈치를 챈다. 이윽고 녀석을 꺼내면, 대뜸 말한다.
“빨리 내 작업복(필터) 좀 입혀줘?”
“조금만 기다려. 먼저 씻으면서 웜업을 해야지.”
우선 데워진 물로 몸부터 씻긴다. 물론 예열의 효과도 겸한다. 그런 후 종이필터를 고이 접어 입혀주고 정성스레 갈아 놓은 원두를 넣는다. 그다음 뜨거운 물을 조심스레 붓고 젓는 것까지는 내 몫. 클레버는 화답이라도 하듯, 넉넉한 웃음처럼 부풀어 오른 크레마 crema는 탐스러울 정도다. 마치 으스대는 모양새다. 커피와 어울리는 동안 진득이 기다려준 후, 데워놓은 서버 위에 올려놓으면, 마술을 부리듯 엄청난 속도로 품었던 모두를 쏟아낸다. 서버에 올려놓을 때까지 얼마나 참았을까.
“오늘은 온도가 괜찮았어? 원두 분쇄도는 마음에 들었어? 서버에 올렸던 타이밍은 어땠어?”
묻고 싶은 건 무수히 많은데, 그는 일일이 대답도 하지 않고, 기막힌 향으로 슬쩍 언질을 줄 뿐이다. 과묵해서 그런지 더 맛이 깊다. 너무 깊고도 그윽하고 향긋하기까지 하다. 클레버가 품고서 내놓은 선물을 이렇게 덥석 받으려니 한편으로 미안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내가 준 것에 비해 너무 과분할 뿐이다.
클레버와 대화를 나누는 게 일상이냐고 물으면, 단호히 아니다. 아마도 알게 모르게 정이 들어서일 것이다. 늘 고맙기도 하고. 어디 있다가 이제야 나타났니, 하며 묻곤 한다.
결혼한 이후 아내로부터 제대로 아침상을 받은 적이 없다. 모두 합쳐서 열 손가락 안에 들까? 어언 20여 년이 지났건만. 매일 새벽에 잠드는 아내의 오랜 습관 때문에 아침에는 도무지 일어날 수가 없는 모양이다. 결코 ‘아침형 인간’이 될 수 없는 이 치명적인 습관!
애들이 커가니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등교를 시켜야 해서 어쩔 수 없이 알람을 몇 개씩이나 설정해 놓는 아내다. 애처롭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런데 마음과는 달리, 단박에 일어나는 법이 없다. 늘 새벽같이 출근하는 나는 회사에 와서도 한동안 걱정이었다. 제대로 아이들이 학교는 갔을까? 아침은 챙겨 먹었을까?
어쩌다 휴가를 내서 한껏 밤시간을 즐기고 다음 날 늦잠이라도 자려면, 그놈의 알람 때문에 도무지 잘 수가 없다. 허리가 아프도록 잘 생각이었는데. 아무리 알람이 울려도 끌 생각을 하지 않아서 결국 목마른 놈이 우물을 찾는다고, 매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건 나. 잠은 이미 달아나버린 후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끄고 나면 울리고 또 끄면 울려대니 미칠 노릇이다. 유난히 알람 소리에 민감한 이유만은 아닌 것이다.
아내는 주말이 되면 아예 세상모르고 잔다. 아마도 의무가 사라졌기 때문일 테다. 그래서 주말의 아침식사 당번은 당연히 내 몫이 된 지 오래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 우선 나부터 배가 고프니까. 어언 20년이 넘어선 지 불만이라곤 전혀 없다. 외려 즐겁기만 하다. 이상한 일이다. 습관은 이토록 무서워서일까,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서 그런 걸까.
어느 주말 점심 무렵이다. 여느 때처럼 아침 내내 숙면을 취하고서 마침내 일어난 아내. 햇살이 창에 비쳐도, 주위가 제아무리 소란스러워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모양이다.
"오늘은 웬일로 12시 전에 다 일어나시고?”
인사를 겸해서 말을 걸었지만 대꾸도 없다. 아직 비몽사몽인 모양이다. 평소의 습관인양 주방으로 직행하더니 포트에 정수를 넣고 끓인 후 곧이어 믹스커피를 타 가지고 온다. 여전히 졸린 듯 눈을 비비며 소파에 앉는다. 핸드 드립도 성가시고, 에스프레소 기계도 번거롭고, 미스터 클레버마저도 귀찮다며, 늘 인스턴트커피만 들이켜는 아내.
“냉장고 안에 그저께 내려서 숙성해 놓은 더치커피도 있고, 아침에 클레버로 내린 커피도 있는데, 왜 믹스커피를 마셔?"
그냥 몰랐다고 하며 믹스커피를 마신다. 그래도 미스터 클레버가 고이 품었다가 살포시 내미는 선물을 건네면, 아내도 무척 깊은 맛이 느껴진다고 입바른 소리를 한다. 아마도 진심이라 믿는다.
프렌치프레스 기구로 스타벅스에서 사 온 아라비카 원두를 추출해서 즐기는 요르단 친구가 있다. 한 번은 미스터 클레버를 자랑하고 싶어서 아라비카가 아닌, 아라빅 원두를 추출해서 줬다. 고맙다고 하면서 덧붙이는 말.
“정말 맛있긴 한데 아로마 성분이 빠진 듯하네요.”
미스터 클레버는 완벽하고 깔끔하지만 종이 필터에 가로막힌 아로마 성분까지는 어쩔 수 없어 보인다. 프렌치프레스가 추출해 내는 특유의 아로마 성분까지 가둬버리는 종이필터의 위력 때문이다. 뭐든지 완벽할 수는 없는 법. 어쩔 수 없이 하나는 양보하지만 그럼에도 너무 큰 매력을 지닌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아로마까지는 아니더라도 핸드드립이 따라올 수 없는 깊은 맛을 지녔으니까.
커피 추출의 세계는 나날이 진보를 거듭하고 있지만, 당분간 이 ‘똑똑한 친구’를 앞서는 제품은 나오지 않을 듯싶다. 만약 후처리의 간편함에 아로마 성분까지 추출할 수 있는 기구를 발명하면, ‘닥터 지니어스 Dr. Genius’라고 부르고 싶다. 이 천재가 나오기 전까지는 아마도 이 똑똑한 친구의 세상일 것이다.
미스터 클레버 안에서 한참을 머물러있던 커피. 얘를 서버 server에 내리길 한두 차례 되풀이하면 추출이 끝난다. 물을 끓이기 시작하고 원두를 갈고 컵을 데우고 추출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도 채 10분이 안 걸린다. 10분만 투자하면 즐길 수 있는데, 그것조차 감수하지 못할 텐가.
“난 서재에 가 있을게. 오후에 뭐, 특별한 일 없지?”
아마도 아침상을 준비했고, 원하는 커피도 마련돼 있고, 딱히 이벤트도 없는 모양이다.
“알았어.”
순순히 승낙을 받자마자 서버와 컵을 들고 서재로 가서 책상에 앉는다. 이제부터는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온전한 나만의 자유시간. 담배를 피울까 하고 바깥에 나가려다 애써 참는다. 뭐니 뭐니 해도 지금 내 앞에 놓인 커피가 우선이니까.
오후의 커피와 가장 잘 어울릴법한 음악이 뭘까. 아이작 스턴이 연주한 차이코프스키의 현악 4중주 1번의 2악장, 「안단테 칸타빌레」를 꼽고 싶다. 키신이 연주한 슈만이나 베토벤의 피아노협주곡도 괜찮을 듯싶다. 커피와 클래식은 서로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커피와 만난 이야기를 떠올려본다. 커피를 만나면서 함께 어울렸던 것들……
지금은 클레버와 깊은 관계까지 갔지만, 지난 30년 동안 만났던 커피를 떠올려 보자,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지어진다. 그러고 보면 참으로 많은 커피를 만났다. 가족이나 친구처럼 이렇게 오래 만났고 앞으로도 변함없이 만날 존재는 오직 커피뿐일 듯싶다.
이 글은 커피에 대한 외사랑이자, 내 편력이다. 커피를 만난 갖가지 사연들 속에 내 청춘이 고스란히 녹아있기도 하다. 한편으로 지극히 개인의 영역이라서 다소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다. 그래도 커피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어느 지점에선 고개를 끄덕일 부분은 있을 듯하다. 커피와 함께 떠오르는 사람들, 음악과 책과 영화들.
무엇보다 가만히 지난 30년 동안을 회상할 수 있어서 좋았다. 또 한 번의 30년이 지나서도 지금처럼 커피를 향한 마음이 한결같았으면 좋으련만. 아마도 가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