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평범하게 미장원이나 미용실이란 이름을 가진 간판을 보기가 힘들다. 이름에 ‘헤어’가 들어가 있지 않으면 어떤 종류의 가게인지 모를 정도로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예전에 다방이나 다실로 불리던 커피숍도 이와 마찬가지인 듯하다.
스타벅스, 탐앤탐스, 할리스, 엔제리너스, 폴바셋, 파스쿠찌, 이디야 등등. 거대 기업의 직영점이나 프랜차이즈의 이름으로 불린 지 오래다. 게다가 근래에 들어 만랩, 전광수커피하우스, 드립하우스, 커피볶는집, 백다방 등과 같이 무수한 중소 규모의 프랜차이즈 커피숍도 등장하고, 아울러 소자본으로 개인이 창업한 커피 전문점도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상태다. 그러고 보면, 거의 한 집 건너 한 집이 커피숍인 듯하다. 이른바 커피의 전성시대! 소비가 있으니 당연히 공급이 뒤따르는 것일 터. 언제부턴가 커피는 음료의 영역을 넘어선 듯하다. “커피 한 잔 할까”는 “밥, 한 번 먹자”와 비슷한 의미로 쓰인다. 오랜만인데, 우리 한 번 봐야지,라는 의례적인 인사말로 읽힌 지 오래다.
이토록 커피숍도 흔해졌을 뿐 아니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사실이, 문득 낯설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부터 출근할 때 커피전문점에 들르고, 테이크-아웃 커피를 사가지고 와서 일을 시작했고, 식사 후면 으레 커피를 찾게 되었는지. 언제부터 인스턴트커피를 멀리하게 되었고, 싱글 오리진만을 선호하기 시작했는지. 언제부터 직접 로스팅을 하고 다양한 기구로 추출을 해서 커피를 즐기는 문화가 보편화되었는지. 언제부터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는 게 운전면허와 동격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커피와 함께 하루를 시작할 만큼, 카페인의 각성효과가 절실해진 이유일까. 이 현상에서 고달픈 현대인의 서글픈 모습을 본다면 지나친 해석 일까도 싶지만.
북유럽 국가들은 한국의 일인당 연간 쌀 소비량보다 커피의 소비량이 더 많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무게로 따진다면 말이다. 한국도 매년 커피 수입량이 늘어가는 추세인데, 정말 쌀보다 더 많은 커피를 소비할 날도 머지않은 듯싶다. 식습관이 변해서 아침에는 간편식으로 대용하는 추세이고, 황제 다이어트라고 육류만 섭취하기도 하고, ‘저탄고지’란 말이 유행하면서 곧, 탄수화물은 낮고, 지방은 높은 음식이 좋다며 일부러 쌀을 피하기도 하는 세태이니까. 아마도 미래는 이보다 더 쌀을 기피하지 않을까. 만약 농부가 이 미래상을 알게 되면 놀랄 듯하다.
커피의 사회학은 잠시 유보해 두자. 아무튼 시골 읍내에나 가야 발견할 수 있는 다방. ‘다방에서 만나자’는 말은 이미 죽은 문장이 돼버렸다. 그렇다면 사전도 다방의 정의를 바꿔야 할 듯. 이를테면, ‘20세기까지 한국에서 커피, 차, 주스와 같은 음료수를 팔던 장소인데, 주로 여기서 친구와 약속을 잡거나 사업상의 파트너와 만나서 대화를 나눈다. 가끔씩 시골에 가면 지금도 발견할 수 있다’라고. 다방이 실재하건 안 하건, 다방에서 내놓는 인스턴트커피, 이른바 ‘다방 커피’는 이미 내 청춘과 함께 사라진 지 오래다.
여전히 다방이 흔하던 시절, 혼자 경주에 여행을 갔을 때다. 여기저기 돌며 하루 종일 경주의 곳곳을 훑다가 이윽고 해거름 무렵. 돌아갈 버스를 기다리면서 터미널 가운데께 나있는 계단을 오르자 다방이 보였다. 기다리는 시간 동안 책을 읽을까 하고 들러서 자리에 앉았다. 곧이어 주문을 받으러 온 아가씨가 오랜 친구인양 대뜸 내 옆에 앉는다. 어어, 나를 아세요? 곧이어 우리는 이런 대화를 주고받았을 것이다.
오빠, 혼자 왔어? 네. 커피 마실 거야? 네. 오-빠, 나, 쌍화차 마셔도 돼?
나보다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데, ‘오’ 자를 길게 내뽑기도 하며 연신 오빠란다. 자기가 마시고 싶으면 사서 마시지,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냐고 하려다가, 금세 분위기가 파악이 되었다. 엉겁결에, 네, 그러세요,라고 해버렸다.
“오빠, 둘둘둘?”
뭐라고 대꾸를 못하고 얼굴만 쳐다보자, 웃으며 친절히 설명해 준다. 커피 두 스푼, (크림도 아닌) 프림 두 스푼, 설탕 두 스푼이냐고?
잠시 대화를 나눈 바람에 두 배가 훨씬 넘는 커피값을 지불해야 했다. 오빠라는 호칭과는 사뭇 다르게 시종일관 내게 말을 놓던 그 아가씨는 쌍화차에 계란 노른자까지 띄웠던 게다. 한낮에 노상강도를 만난 기분이었다. 한창 청춘이었던 시절, 멋모르고 불쑥 다방을 찾은 게 잘못이었다. 당시는 커피전문점도 드물었을 뿐 아니라, 시골에는 아예 커피를 전면에 내세운 곳도 없었으니 달리 방법도 없었지만. 다방커피에 대한 경주 에피소드는 사실 첫 경험처럼 싱그러웠다. 사실 다방커피가 싫은 이유는 따로 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첫 해였을 것이다. 군사정권은 두발 자유화를 시행하였다. 곧, 그전까지는 강제로 머리 모양이나 길이를 제한했다는 얘기다. 기르지 말라고 할 때는 한 번쯤 길게 기르고 싶다가도 막상 기르라고 하니 도대체 이 놈의 머리가 감당이 안 되었다. 지독한 곱슬머리라서 길이가 5 센티만 넘으면 덥수룩해지고 말아서 어떻게 다듬어야 할지도 난감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모든 욕망을 짓눌렀다. 그때는 그게 최선인 줄만 알았다.
마침내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들어갔지만 세련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다. ‘스노진’이 일반적인 패션 아이템으로 자리 잡기도 훨씬 전에 같은 과의 한 친구는 유행을 선도하며 그 알록달록한 청바지를 입고 다녔다.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던 시절이었는데도, 방학 때면 뉴욕이나 파리로 여행을 가는 듯했다. 처음엔 불량품이 아닌가 했다. 재미교포인 한 친구는 꽉 죄는 데다 군데군데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다녔다. 쟤는 집안이 좀 어려운가 싶었다. 파격적인 패션 리더를 대하는 패션 테러리스트의 변. 30년 전 얘기다. 한편으로 부럽기도 했지만 당시에 나는 마음마저 풍성하게 하는(?) 나팔바지로 만족해야 했다. 하숙비를 내고, 전공서적을 사고, 구내식당에서 점심만 사 먹어도 거들이 나는 빠듯한 주머니 사정에 술자리도 가려야 했다. 동대문시장을 찾는 게 유일한 사치품(?) 구매였으니, 하물며 당시에 유행하던 게스 청바지와 폴로 티는 언감생심이었다. 결국 유행을 애써 외면하며 버틸 도리밖에 없었다.
아직 시골티를 벗지 못한 1학년 시절. 과대표에 당선된 친구의 공약으로 (생애) 첫 미팅에 나가게 되었다. 얼마나 기대했던 미팅이었던가. 내게도 여자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내심 얼마나 바랐던가. 소위 과팅이었다. 서른 명 이상이 신청을 했으니 한 다방에 거의 6,70명이 모였다는 얘기다. 설마 요즘에도 이런 단체미팅을 할까 싶다.
설레는 마음으로 자리에 앉자 건너편 의자에 여학생들이 시차를 두고 한두 명씩 도착해서 앉았다. 한꺼번에, 그것도 면전에, 이렇게 많은 여학생과 마주 앉기도 처음이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을까? 심장은 얼마나 두근거렸을까? 미처 거기까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슬쩍 곁눈질 하자 모두들 예뻐 보였다. 이윽고 운명처럼 파트너가 정해지고 내처 둘이서 오붓하게 길을 나섰다. 그런데 무슨 말을 하지? 남자니까 리드를 해야 하나?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 머릿속이 하얬다.
“우리 좀 걸을까요?”
막상 말문을 열었으나,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였다. 딱히 무슨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걸어만 갔으니 참으로 답답했을 것이다. 한동안 대화가 끊기자 대뜸 내 파트너가 하는 말, 저, 이번 정류장에서 내려요, 가 아니라,
“저, 실은 3수 했어요.”
라고 하는 게 아닌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도 굳이 커밍아웃을(?) 할 게 뭐람. 다시 보잔 말도 하지 말라는 일종의 선전포고였다는 것을 그때 눈치챘어야 했다. 대놓고 마음에 안 든다고는 말하지 못했을 테니까.
돌이켜보면, 필시 내가 영 아니었던 모양이다. 예의 곱슬머리에 가무잡잡한 얼굴. 심한 사투리에 꾀죄죄한 형색. 도무지 세련미도, 하다 못해 매력포인트라곤 찾아볼 데가 없었을 것이다. 이도 저도 아니면 말이라도 청산유수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학교 앞의 D다방은 커피 한 잔에 600원이었는데, 당시로서는 비싼 축에 속했다. 시내버스 요금이 100원이었으니까 상대 가치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건너편 T다방은 거기보다 200원이나 더 쌌던 것을 익히 알았기에 내 발길은 자연히 T다방으로 향했다. 시골에서 상경한 고학생의 주머니 사정이야 뻔하니까. 미팅을 위해 따로 용돈까지 마련했으니까. T다방에서 나와 헤어질 때 기어코 연락처를 묻는 데까지는 진전했다.
"혹시 연락처 가르쳐주실래요?”
그러나 그뿐 그는 툭 던지듯 말한다.
“학보 보내주세요. 제 이름과 무슨 과인지 알잖아요?”
그래, 그 방법이 있었구나. 학보 안에 사연을 써넣어서 함께 보내곤 했다. 일종의 편지 대용인 셈이다. 당시는 휴대폰도 없던 시절인지라, 소통의 방법은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학과 사무실을 거쳐 강의실로 갈 때마다 친구들은 학보를 몇 개씩 찾아서 들고 나온다. 하나도 아니라 몇 개씩이나. 강의 전에 보란 듯이 여자대학교의 학보를 펼쳐서 읽는 친구들도 더러 있었다. 얼마나 부러웠던가. 마침내 학보가 나오는 날, 잽싸게 우체국으로 달려가서 기어코 학보를 보냈다. 만나서 반가웠고 어쩌고 하며 정성스레 쪽지도 써서 고이고이 학보 속에 끼워 넣었다.
그로부터 기나긴 기다림의 시간 아니, 기다림의 미학이 필요하다. 은근히 화답이라도 해올까 해서 몇 주째 과사무실을 지날 때마다 우편함을 뒤적거렸다. 역시 예상은 한 치의 예외도 없이 비껴가지 않았다. 감감무소식이었다. 더 이상의 인연은 없었다. 학보를 한 번만 더 보낼까 하다가 마음을 다잡았다. 먼저 3수라는 말을 꺼낸 것만으로 그의 마음을 읽었어야 했다. 인연이 아니어도 회신이나마 보내줬더라면 단념하기도 훨씬 쉬웠을 텐데……
그 후로도 몇 번 더 미팅을 했지만, 여전히 상처는 내 몫이었고, 결국 미팅에 대한 환상을 더 이상 가지지 않게 돼버렸다. 괜히 자의식만 도드라졌고, 소심한 성격에 어쩌면 더 이상 상처받기 싫었던 이유도 작용했을 터였다. 축제 때는 외로웠고 나를 제외하고 모두가 행복해 보였다. 지금은 혼자서도 잘 놀지만, 그때는 혼자 공연이나 행사를 보러 갈 자신이 생기지 않았다. 자학의 그늘을 짙게 드리울 수밖에 없었다. 내 반쪽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여자에게 이토록 매력이 없는 걸까. 세상에 나를 사랑할 사람은 있기나 한 걸까.
인스턴트커피가 내키지 않는 이유. 비단 다방에 얽힌 두 가지 기억 때문만은 아니다. 비엔나도 한몫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