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과의 전쟁

by 방자까

휴지에 묻어나는 새빨간 피를 보며 한숨 쉬는 날들이 이어졌지만, 제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처방받은 약을 잘 챙기는 것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마저도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똥과의 전쟁만으로도 버거운데, 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약과의 전쟁을 먼저 치러야 했거든요.


궤양성 대장염의 치료법은 크게 약물치료와 수술로 나뉩니다. 증상 완화와 재발 방지를 위해 내과적 약물치료를 진행하고, 약물치료에도 불구하고 증상이 심해지거나 악성 종양 등의 합병증이 발생하면 수술을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 환자는 약물치료로 증상을 개선합니다. 저 역시 '먹는 약'과 '넣는 약' 두 종류를 사용해 치료를 진행 중이죠.


먹는 약은 물과 함께 꿀꺽 삼키는 일반적인 약입니다. 매일 네 개씩 먹고 있죠. 귀찮긴 하지만, 어렵진 않습니다. 그렇다면 넣는 약은 어떨까요? 이것 역시 말 그대로 넣으면 되는 약입니다. 그럼 어디에 넣어야 할까요? 우리 몸에 약을 넣을 만한 곳이 눈, 귀, 그리고 항문 정도가 있겠네요. 저는 매일 똥꼬에 좌약을 넣습니다. 항문과 인접한 직장에 염증이 많은 제겐 좌약을 넣는 것이 중요한 치료법입니다. 의사 선생님은 좌약 넣는 방법을 실로 쉽고 간결하게 설명하셨습니다.


“항문에 약을 밀어 넣으시면 돼요.”


그래, 별거 아니겠지. 저렇게 가볍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콩알만 한 작은 크기인가보다. 이때까지만 해도 크게 겁먹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집에 돌아와 약국에서 받은 좌약을 뜯어본 저는 그 자리에 선 채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좌약이라는 게, 무려 제 엄지만 한 크기였거든요.


손가락만 한 이것을 굳게 입을 다문 항문에 밀어 넣어야 한다니. 도대체 어떤 자세로 약을 넣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습니다. 다행히도 우리에겐 언제든지 찾아갈 수 있는 만능 의사 선생님이 있지요. 인터넷에 ‘좌약 넣는 법'을 검색했습니다. 역시 많은 사람이 좌약을 넣는 최선의 자세를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인터넷에는 무릎을 구부린 채로 옆으로 돌아누워 한쪽 손으로 엉덩이를 벌리고, 다른 쪽 손으로 약을 밀어 넣으면 수월하게 들어간다는 증언이 많았습니다.


일을 치르고 화장실에서 바로 손을 씻을 요량으로 화장실 앞 바닥에 누웠습니다. 누운 채로 바지를 반쯤 내렸습니다. 알 수 없는 수치심이 몰려왔습니다. 남은 일생 약물치료를 해야 한다는 선생님의 말씀이 저주 같았습니다. 낫지도 않는 병을 위해 평생, 그것도 매일, 똥꼬에, 이러한 자세로 좌약을 넣어야 한다니요. 바지를 내리고 엉덩이에 약을 밀어 넣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고귀함을 내려놓는 행위처럼 느껴지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사실 인간은 그렇게 고귀한 동물이 아닙니다. 우리는 방에 드러누워 코도 파고, 엉덩이도 긁고… 자세한 설명은 접어두겠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고귀함과는 거리가 먼 행동들을 일상적으로 하며 삽니다. 그런 행동들을 두고 ‘인간적’이라고 표현하고요. 이렇게 보면 인간은 고귀하기보다는 우스꽝스러운 동물에 더 가까운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은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이제는 약을 넣어야 했죠.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좌약을 잡고, 오로지 손의 감각에 의지해 항문을 찾아 나섰습니다. 대충 이쯤이겠거니, 싶은 곳에 예상대로 항문이 있었습니다. 조준하고, 그대로 발사. 총알 모양의 좌약은 그대로 항문 안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지금은 특별한 자세를 잡지 않아도 좌약을 넣는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항문의 위치를 짐작하기 위해 손의 감각에 의지할 필요도 없습니다. 엉덩이 한가운데 있는 문(門)의 정확한 위치를 알고 있거든요. 화장실 앞에 몸을 뉘지 않고도 바로 선 채로 1초 만에 좌약을 넣을 수 있습니다.


여전히 매일 엉덩이를 까고 약을 넣는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지만, 조금은 고귀하게 좌약을 넣는 법을 터득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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