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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Jan 21. 2024

소울메이트

<한뼘소설> 3화

 자정을 한참 넘긴 시간, 미연은 물 먹은 스펀지 같은 몸을 간신히 지탱해 집으로 돌아왔다. 곁에서 누가 훅 하고 바람만 불어도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을 듯한 행색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신발 벗을 기운도 없어 현관 앞에 그대로 쪼그려 앉던 참이었다. 가슴 저 밑바닥에서 '오늘도 잘 버텼어!'라고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두 눈에는 거짓말처럼 그렁그렁 눈물방울이 맺혔다. 살다(live)라는 말을 거꾸로 하면 악(evil)이 되는 이유를 절실하게 깨닫는 하루였다. 짙은 어둠을 뚫고 쿰쿰한 냄새가 그녀의 코끝을 때렸다. 결코 익숙해지지 않을 스위트홈 체취였다. 낡은 빌라에 곰팡이 투성이 반지하 원룸이지만 세상이 허락한 유일한 안식처,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누군가의 시선도 신경 쓸 필요 없었다. 미연은 이곳이라면 고독과도 친구가 될 수 있으리라 농담하곤 했다. 


 이력서와 자소서를 그득 채울 만큼 화려한 스펙을 자랑해도 따박따박 월급이 나오는 직장을 구하는 건 수세에 몰린 이세돌이 마지막 5국에서 알파고에게 역전승을 따내는 것만큼 어려웠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이들에게 유리한 취업 시장은 전쟁터가 아니라 지옥으로 변한 지 오래였다. 게다가 백만 취준생을 먹여 살리던 각종 식당이나 편의점 아르바이트, 택배기사 일이 하루가 다르게 로봇으로 대체되었다. 굴지의 로봇 회사들은 하나 같이 '더 나은 세상, 인간을 위한 로봇'이라고 떠들어댔지만, 차가운 잿빛 세상에 인간이 설 자리는 늘 부족했다. 아직 인간에게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 때 욕망에 가득 찬 그들이 동료 시민에게 한 일은 빈 잔에 샴페인을 가득 따라주는 것이었다. 핑크빛 미래에 거나하게 취해 아무도 거품뿐인 술잔을 눈치채지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의 적의는 0.01% 슈퍼리치가 아니라 로봇이나 인공지능을 향했다. 인간의 능력을 압도하는 기계장치의 도움 없이는 제대로 살 수 없으면서도. 로봇과 인간의 공존은 엄청난 양의 마그마를 품은 활화산처럼 위태로웠고 언제 폭발해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을 터였다. 


 미연은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아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깼다. 요 며칠 계속되는 야근에 밤잠을 설친 탓인지 현관 앞에 웅크린 채 잠들었더랬다. 한 사람이 겨우 누울 만한 간이침대를 제외하면 제대로 된 가구나 전자 장비 하나 없는 집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소음이라니 도무지 이치에 맞지 않았다. 그 순간 잠에서 덜 깬 미연의 시선이 어둠 속 붉은빛을 내뿜는 한 점에 닿았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순식간에 그녀를 삼켰다. 살을 에일 듯한 한기가 세포 하나하나까지 얼리는 듯했다. 미연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27년 인생이 마치 숏폼처럼 그녀의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길지 않은 삶이지만 희로애락이 빈틈없이 담겨 있었다. 비록 슬픔이 대세였지만. 그리고 장면의 맨 끝에 'PANDORA'가 있었다. AI와 딥러닝에  기반한 사물형 인터넷 3D 프린터 초기 모델로 전자 장비 대여 서비스 회사 'Future of Rental'에서 그녀가 관리를 맡고 있는 수백 대 장비 중 하나였다. 워낙 오래된 장비인 데다 빈번한 업데이트로 고장이 잦아 'New PANDORA' 출시에 즈음해 폐기 처분 대상이 된 모델이다. 실시간 개방형 AI 그래픽 디자인 플랫폼에 일자리를 뺏긴 미연은 왠지 판도라에게 마음이 쓰였다. 폐기 처분할 바에 틈틈이 손을 봐 시제품 만들 때 사용하려고 자신의 원룸에 가져다 둔 게 떠올랐다. 그녀는 짧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분명 전원을 꺼두었는데 어쩌다 자동으로 부팅되었나 싶었다. 미연은 신발도 벗지 않은 채 어둠 속을 엉금엉금 기어 판도라 앞에 닿았다. 차가운 금속 표면을 어루만지는 그녀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두 눈에서 뜨거운 액체가 흘렀다. 미연은 알았다. 지금 흘리는 눈물은 짜지 않으리란 걸. 그 순간 창틈 사이를 비집고 여명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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