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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Jan 13. 2024

누가 메피스토를 소환했는가?

<한뼘소설> 2화

 파우스트 박사의 영혼을 빼앗는데 실패한 메피스토펠레스는 오랜 칩거에 들어갔다. 스스로에게 내린 벌로 암흑 동굴 속에 틀어박혀 자신의 계획이 어디서부터 틀어졌는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무수한 날들을 고민한 끝에 메피스토가 내린 결론은 눈꼴신 '그분'의 말처럼 인간의 의지는 어두운 충동, 거부할 수 없는 유혹에도 결국 올바른 길을 찾아낸다는 것이었다. 분하고 원통했지만 '그분'에게 완벽히 패했음을 인정했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타인과 사랑, 우정, 신뢰 같은 감정을 나누고, 책을 통해 과거부터 쌓아온 지식과 지혜를 배웠다. 악마가 끼어들 틈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메피스토는 언어가 탄생하기 전, 문자가 없던 시절이 한없이 그리웠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의 영혼도 자신의 발아래 무릎 꿇게 할 수 있던 시절이었다. 이제 아무도 악마와 계약하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을 터였다. 비록 '그분'에게 필적하는 마력(魔力)을 지닌 최상급 악마라고 해도 인간의 감정과 언어까지 소멸시킬 수는 없었다. 불멸의 존재인 메피스토도 지독한 무기력함엔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바닥 없는 낭떠러지에 떨어진 것처럼 끝 모를 절망에 허우적댔다. '파우스트 사건' 이후 인간 세계에서도 지하 세계에서도 메피스토를 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그가 주인공인 '발푸르기스의 밤'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하급 악마와 마녀들의 입에서 입으로 그가 '無의 세계'로 돌아갔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악마들에겐 춥고 배고픈 날들이었다.


 벤츠 GLE 400 가죽 시트에 기대 반쯤 졸던 샘은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괴상한 옷차림의 남자 때문이었다. 스쳐 지나쳤을 뿐인데 마음이 마구 요동쳤다. 사내가 특별한 행동을 한 건 아니었다. 그저 웃고 있을 뿐인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외모도 정말 특이했다. 툭 튀어나온 이마는 마치 뿔이 난 듯했고 가늘고 긴 턱은 염소를 닮았다. 핏빛을 닮은 새빨간 조끼와 말굽 부츠도 눈에 거슬렸다. 잠시 스쳤을 뿐인데 세세한 부분까지 떠오르는 게 신기했다. 핼러윈 데이가 한참 남았는데 저런 기괴한 차람으로 돌아다니다니 미쳐도 단단히 미친놈이라 여겼다. 신경이 날카로워진 탓이라 여긴 샘은 절반쯤 남은 블링 에이치투오 생수를 단숨에 비웠다. 시원한 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긴급 이사회까지 2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이번 이사회에서 AI 프로젝트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혀야 했다. 샘은 재킷 안쪽에서 메모지를 꺼내 뚫어질 듯 쳐다보았다. 


 최고급 전기차가 노란 택시들로 가득한 도로를 힘겹게 빠져나가는 동안 거리를 활보하는 수많은 인파 중에 괴상한 차림의 사내에게 눈길을 준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 모두 환하게 불이 켜지는 작은 기계를 손에 쥐고 있었다. 그 순간 날카로운 칼날이 부딪치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끽끽끽. 도대체 누가 최상급 악마인 이 몸조차 성공하지 못한 일을 해냈단 말인가. 인간들은 더 이상 감정을 나누지 않는군. 끽끽끽. 사랑이나 우정, 신뢰 따위는 먼지 쌓인 낡은 책에 갇혀버렸어. 처음부터 그런 시시한 감정 따윈 고양이에게나 줘버렸어야 했는데…. 인간의 선한 의지를 철석같이 믿었던 '그분'이 지금 어떤 표정일까 궁금해 죽겠는데 말이야, 끽끽끽. 그나저나 손안에 꼭 쥔 것이 대체 무엇이길래 지들끼리는 이야기하지 않고 저 쥐방울만 한 것만 온종일 붙들고 있는 걸까. 가만히 지켜보니 물어보는 것마다 척척 답을 내놓던데, 연구해 볼만 하겠어. 그나저나 누가 無의 세계에서 고약한 악마를 소환했을까? 끽끽끽. 인정 많은 노인네가 했던 말이 떠오르는군.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라고 했던가. 그런데 어쩌지 방황하는 인간이 아무도 없네. 저 작은 물건이 환하게 밝혀주니 말이야. 끽끽끽. 자, 슬슬 활동을 시작해 볼까. 가만있자 어떤 놈과 먼저 계약해 볼까. 아까 누군가 이 고귀한 존재를 눈치챈 것 같던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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