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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Mar 04. 2024

벚꽃 엔딩

<한뼘소설> 9화

 봄기운이 거리에 활기를 더했다. 파스텔톤 외출복을 차려입고 윤중로를 활보하는 사람들 얼굴에는 싱그러운 미소가 가득했다. 평소라면 자동차로 빈틈없을 2차선 도로가 조금 일찍 찾아온 봄을 만끽하려는 상춘객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사람숲을 헤집는 번거로움은 조금도 문제 되지 않았다. 이 순간만큼은 이동이 목적이 아니었다. 인생 사진을 건진다는 핫스폿에 길게 늘어선 사람들은 거북이가 얼마나 빠른 동물인지 실감했다. 그래도 누구 하나 미간을 찌푸리지 않았다. 일 년에 딱 한 번 흐드러지게 핀 벚꽃과 만나는 날 사람들 마음도 덩달아 활짝 열렸다. 3월 말, 만개한 벚꽃이 남도를 덮으면 4월 초순에는 서울에서도 어김없이 화려한 벚꽃축제가 펼쳐졌다. 예년보다 닷새나 앞당겨졌지만 팝콘처럼 터진 꽃망울 앞에서 사람들은 마냥 행복했다. 이름난 벚꽃길 중에서 으뜸은 단연 여의도 윤중로였다. 국회의사당을 끼고 한강변을 따라 이어진 1.7km 거리에 1600그루 왕벚나무가 마치 동시에 전원 스위치를 올린 것처럼 일제히 꽃을 피웠다. 수도권 곳곳에, 심지어 각 동네마다 아름다운 벚꽃길이 서너 군데씩 있었지만, 사람들은 윤중로의 벚꽃이 더 특별하기라도 한 듯 이곳으로 질주했다. 살랑대는 한강 바람에 흩날리는 벚꽃비를 맞은 사람들은 천국에 계절이 있다면 봄이리라 확신했다. 


 완벽하게 평범한 봄날이었다. 자로 잰 듯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선 왕벚나무 주위로 노란 꽃망울이 예쁜 개나리들도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병충해와 추위에 잘 견뎌 관상용이나 울타리용으로 많이 심는 개나리는 벚꽃처럼 화려하진 않아도 안 보면 섭섭한 초등학교 동창 같은 존재였다. 단체로 외박이라도 나왔는지 한 무리의 장병들이 최신형 아이폰으로 개나리 울타리 사이사이에서 봄날의 추억을 박제했다. 노란 개나리가 궁금한지 아빠 어깨 위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아이가 땅에 내리자마자 부리나케 꽃밭으로 내달렸다. 알에서 막 깨어난 병아리 두 마리가 앙증맞게 그려진 니트를 입은 아이가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짹짹 소리가 들려왔다. 뒤뚱뒤뚱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이 위태로워 보였지만 용케 넘어지지 않았다. 뽀얀 고사리손으로 꽃 한 송이를 움켜쥔 아이는 태어나 처음 개나리를 보는 양 한참을 바라보았다. 세상 다정한 눈빛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이의 부모는 행여 꿀벌이라도 나타날까 경계 태세를 늦추지 않았다. 벚꽃과 개나리꽃이 지천으로 핀 윤중로에서 노랗고 까만 곤충은 특급 경계 대상이었다. 소싯적 윤중로 벚꽃 데이트를 즐기다 호되게 당한 경험이 있던 아이 엄마로서는 신경이 더욱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윙윙대는 소리만 들려도 아이를 낚아채 내달릴 참이었다. 


 봄날 오후의 온기 치고는 뜨거운 바람이 윤중로를 훑으며 퍼져 나갔다. 근처 베이커리에서 문이라도 열어 놓은 것처럼, 더운 공기가 잘 익은 식빵처럼 부풀어 올랐다. 더위를 견디지 못한 아이 엄마는 입고 있던 얇은 하늘색 카디건을 벗어 한쪽 팔에 걸치려다 그만 손에서 놓치고 말았다. 하늘하늘한 카디건이 벚꽃 잎 위로 우아하게 내려앉았다.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으려던 순간 아찔해진 그녀는 마치 누가 '얼음'이라고 외치기라도 한 듯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세상이 멈춘 듯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누구도 '땡'이라고 말해주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연스레 옷을 집어 팔에 걸쳤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벚꽃은 여전히 탐스러웠고, 노란 개나리 사이를 아장아장 걷는 아이와 그 모습을 사랑스럽게 지켜보던 남편도 그대로였다. 하늘도 태양도 구름도 심지어 장병들까지 조금 전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지금과는 전혀 다른 공간처럼 느껴졌다. 영화에서 보던 멀티버스가 아닐지 착각할 정도였다. 그녀는 토끼굴로 떨어진 앨리스라도 된 것 같았다. 물선 이질감 속에 서성대던 그녀는 마침내 아주 중요한 차이점 하나를 발견했다. 이 세계에는 꿀벌이 없었다. 벚꽃이나 개나리꽃 주위를 윙윙거리며 부지런히 꿀을 모아야 할 꿀벌들이 단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몇 번이나 확인했지만 정말 한 마리도 없었다. 꽃이 있는 곳에 벌이 없다는 건 바닷물 속에 물고기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자연의 섭리에 닿지 않았다. 애써 진달래와 철쭉이 활짝 핀 군락까지 달려가 살펴봤지만 어디에서도 꿀벌을 찾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 윤중로 일대에는 분명 꿀벌이 없었다. 


 봄날 온기가 뜨거웠다. 유독 무더운 4월이었다. 배낭에서 파란 스타벅스 텀블러를 꺼낸 그녀는 시원한 보리차를 숨도 쉬지 않고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차가운 물이 식도를 타고 순식간에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차가운 보리차 덕분에 그녀는 본래의 차분한 성격을 되찾았다.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고 벌이 사라질 리 없었다. 오히려 꽃구경을 즐기기에 꿀벌은 방해만 될 뿐이었다. 그녀는 문득 궁금했다. 왜 뜬금없이 꿀벌에 꽂혔을까. 지난밤 아이가 보채 밤잠을 설쳤다. 게다가 아침 일찍부터 봄나들이 준비를 하느라 쌓였던 피로가 곱절로 늘어났다. 아이 이유식이며 간식에 부부가 함께 먹을 점심 도시락까지 직접 챙겨야 직성이 풀리는 그녀였다. 문득 잠을 쫓으려 틀어 놓은 라디오에서 꿀벌 200억 마리가 실종되었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던 게 기억났다. 1kg의 벌꿀을 모으기 위해 꿀벌은 400만 송이의 꽃을 이동하고, 그 거리가 무려 지구 4바퀴에 달한다고 했다. 더욱 놀라운 건 꿀벌의 수분을 통해 세계 식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작물 100종 가운데 75종이 생산된다는 사실이었다. 꿀벌이 사라진 까닭은 명확하지 않으나 기후변화가 주된 원인이라는 데에는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뉴스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 중 하나인 아인슈타인의 말을 전하며 마무리되었다. “꿀벌이 멸종하면 4년 안에 인류도 사라진다.”라는. 비몽사몽간에 들었던 뉴스가 머릿속에 남아 있었나 싶었다. 그녀는 텀블러를 배낭에 챙겨 넣고 아이와 남편이 기다리는 개나리 꽃밭으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모처럼 서울 나들이하는 김에 저녁은 근사한 비건 식당을 예약해 두었다. 마침 강바람이 불어와 벚꽃비가 내렸다. 며칠만 지나면 탐스러운 벚꽃들도 흔적 없이 사라질 터였다. 하룻밤 풋사랑처럼 벚꽃의 시간은 짧지만 강렬했다.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던 그녀는 어릴 적 즐겨 듣던 <벚꽃 엔딩>을 흥얼거렸다. 흥겨운 노랫소리와 함께 유난히 더운 봄날이 저물어 갔다. 서쪽 하늘에서 두 개의 태양이 시뻘건 노을을 토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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