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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Mar 10. 2024

경고

<한뼘소설> 10화

 몇 개월째 비가 내리지 않았다. 살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대지의 여신 저 깊은 품까지 뿌리는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뿌리란 기관은 우리네 조상들이 선택한 안전하고 확실한 생존 방식이었다. 우리는 한가로이 거니는 이동의 자유를 포기하고 정지(停止)라는 굴레 속에 스스로 정착했다. 외롭지 않냐고? 매일 불어오는 바람이 세상 소식을 전해주었다. 가끔 먼 곳에서 손님들이 찾아와 튼튼한 가지에 나란히 앉으면 얼마나 반가운지. 때론 흔들리고 흩날리며 질주를 꿈꿨다. 이룰 수 없는 이상은 언제나 달콤쌉싸름했다. 


 우리는 고요한 존재다. 시간이란 자연법칙을 거스를 순 없지만, 굴복하지도 않았다. 싸우지 않음을 선택함으로써 우리는 패배도 승리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우리를 나약하고 수동적인 존재로 치부하면 곤란하다. 당신은 우리가 숙명과 맞서기 위해 얼마나 처절하게 투쟁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으리라. 멈춰 있다는 이유로 우리도 당신과 같은 생명체라는 사실을 망각하는 우(愚)를 범하지 말라. 우리도 먹고 자고 짝짓기를 통해 자손을 퍼뜨리는 어머니 지구의 어엿한 자식들이다. 


 태양의 신 아폴론과 대지의 여신 가이아는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내어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욕심이 많은 게 아니다.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손을 퍼뜨리기 위해 더 많은 영양분, 더 많은 물이 필요했다. 우리는 살아내기 위해 몸부림쳤고 제 살을 갈기갈기 찢었다.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의 나날들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처럼 운명처럼 우리 몸에 이상한 주머니 하나가 생겨났다. 처절한 고통을 딛고 마침내 우리는 숙명을 뒤바꿨다. 주머니 안으로 모기나 작은 곤충들이 날아들었다. 그들은 몸의 일부가 되어 주었고, 우리는 언제나 그들에게 감사했다. 현실에 머무르지 않고 늘 깨어 있던 어떤 이웃은 자기 주머니를 박쥐에게 내어주었다. 동굴에서 생활하는 박쥐는 멀리까지 사냥 나왔다가 그 주머니에서 하룻밤 신세를 졌다. 언제든지 박쥐가 찾아올 수 있도록 향기를 내뿜기도 해다. 숙박비로는 시원한 배설 한 번이면 충분했다. 다른 이웃은 자신의 주머니를 나무 두더지 화장실로 제공했다. 나무 두더지는 배설하면서 사촌이 만들어 놓은 달달한 즙도 빨아먹었다. 사실 그 즙은 배설을 촉진시켰는데 헛똑똑이 녀석은 끝내 눈치채지 못했다. 역설적이게도 정지된 생명체인 우리가 가장 역동적인 존재가 되었다. 


 아직도 우리가 한없이 나약한, 당신이 언제라도 꺾어버릴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는가? 당신과 당신 무리의 확장을 중단하라. 우리의 대지를 침범하지 말라. 어머니의 흐느낌이 들리지 않는가? 이번에는 당신이 정지할 차례다. 멈추지 않으면 다음에는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지 모른다. 이 메시지를 결코 가벼이 여기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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