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어져 가는 꿈

by 이은호



J기업에서 인사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김 이사가 어느 날 사장님의 부름을 받았다.


"어서 오게, 김 이사! 이리로 좀 앉지. 내 할 말이 있어서 불렀네."


김 이사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최 사장이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나서 입을 열었다. 김 이사는 오늘 사장님이 또 무슨 오더를 내리실 건가 긴장하면서 귀를 기울였다. 그동안 최 사장은 김 이사에게 많은 일을 시켜왔다. 엄밀하게 따지면 인사담당이 해야 할 업무가 아님에도 김 이사에게 일을 맡겼다. 김 이사는 그런 사장님의 명령에 한편으로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사장님의 일에 대한 열정을 알았기에 맡은 일을 성실히 수행하였다. 그러나 그날 최 사장은 김 이사에게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꺼냈다.


"김 이사, 이번 조직개편 때 자네에게 관리부문 전체를 맡기고자 하는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예? 저한테 말입니까? 생각지도 못했던 일인데 제가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김 이사는 뜻밖의 사장님 제안에 어리둥절하였다. 그런 김 이사의 모습을 보면서 최 사장이 미소 지었다.


"자네라면 충분히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라 믿네. 자네는 능력도 있고 믿을만한 사람이란 말이지."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장님께서 저를 믿고 맡겨주신다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만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그게 뭔가?"


"관리부문 전체라고 하시면 구매업무와 회계업무를 포함하여 하시는 말씀입니까? 통상적으로 두 업무는 상호견제를 위해서 한 사람에게 맡기지 않는 것이 보통입니다만."


최 사장이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가 큰 대기업도 아니고 같은 사람이 맡으면 어떤가? 그렇다고 자네가 사고 칠 사람도 아니지 않은가? 자네가 다 맡아주게."


그렇게 하여 김 이사는 상무로 승진하면서 J기업의 관리업무 전체를 담당하는 중책을 맡게 되었다. 다만 감사실은 사장 직속으로 하여 최소한의 견제 기능은 유지토록 하였다. 김 상무는 회사 내 서열로 보아 영업, 생산, 연구소 등 각 라인조직을 맡고 있는 중역들과 동등한 위치였는데, 사실상은 회사의 업무전반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2인자의 자리라고 할 수 있었다.




김 상무가 맡은 관리부문은 기획, 인사, 전산, 총무, 노무, 구매, 회계까지 모두 포함한 조직으로 어느 하나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업무였다. 그러나 김 상무는 그중에서도 지금까지 맡아왔던 인사업무에 중점을 두고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왜냐하면 그동안 생각해 왔던 '직원들이 제대로 일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사장님이 자신을 믿고 관리부문 전체를 맡기며 힘을 실어준 만큼 그 일이 가능하리라고 믿었다. 김 상무는 정말 좋은 회사를 만들고 싶은 마음에 가슴이 설레었다. 그것도 자신의 손으로.


김 상무는 인사팀 직원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의 도움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먼저 그들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회사 내 직원들을 상대로 똑같은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었다. 안 과장이 의견을 내었다.


"상무님, 먼저 회사 평가보상 제도를 바꿔야 합니다. 상무님도 아시다시피 직원들의 불평불만이 가장 많은 부분이죠. 거의 대다수 직원들이 자신들이 일한 만큼 평가를 못 받는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렇죠.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안 과장, 회사에서 평가를 왜 할까요? 평가의 목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죠?"


갑작스러운 김 상무의 질문에 안 과장이 잠시 뜸을 들인 후 입을 열었다.


"인사팀 입장에서 보면 보상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서이죠. 평가 없이는 제대로 된 보상을 할 수 없으니까요. 보상을 그냥 주먹구구식으로 할 수는 없잖습니까?"


안 과장의 대답을 들은 김 상무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맞아요. 인사팀에서는 각 직원들의 평가결과를 취합하고 그 결과를 토대로 회사의 보상정책에 따른 보상안을 마련해야 하니까요. 그런데 왜 직원들은 보상결과에 불만이 많을까요?"


"그야 제대로 된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죠. 평가가 공정해야 하는데 직원들은 공정한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든요. 각 팀의 평가자들이 제대로 평가를 해야 하는데 그게 안되니까 맨날 저희들만 욕을 먹죠. 저희는 단지 결과를 취합해서 전사적으로 조정하는 역할만 할 뿐인데 말입니다."


안 과장이 뭘 뻔한 것을 물어보냐는 식으로 입이 불퉁하여 대답하였다. 그간 평가보상 절차가 끝날 때마다 인사팀으로 직원들의 불평불만이 쏟아졌고, 특히 실무자인 안 과장이 동기들로부터 제도를 잘 만들어 제대로 운영하라는 비난을 많이 받기도 하였다. 현재 회사에서 운영하고 있는 평가보상 제도는 유명 인사컨설팅 회사로부터 거금을 들여 도입한 제도인데 그 값을 통 못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김 상무는 인사팀 외 관리부문 산하의 다른 팀 직원들과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사적으로 평가보상 제도를 손보기 전에 자기 산하에 있는 직원들의 의견을 충분히 들어보기 위해서였다. 회사의 평가보상 제도에는 다들 불만이 많았지만 특히 관리부서 직원들의 불만이 컸다. 영업이나 생산부서의 경우는 업무 결과치가 숫자로 표현되는 것이 많아 그나마 사정이 나았다. 물론 그 경우에도 숫자 달성에 대한 난이도 이슈는 존재하였지만. 그에 비하여 관리부서의 업무는 분명한 숫자로 나타내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슨 만족도니, 업무대응시간이니, 업무처리건수니 하는 말도 안 되는 지표를 가져다가 수치화하려고 용을 썼다. 정량적 데이터라나 뭐라나 하면서. 그리고 그걸 평가기준으로 삼았다.


큰돈을 들여 인사 컨설팅을 한 결과물이 그랬다. 컨설턴트는 'KPI(주요성과지표) 관리를 통한 평가지표의 객관화' '공정한 평가보상 제도 정착' '직원 동기부여의 극대화' 등등 말도 안 되는 미사여구를 써서 사장님을 현혹했고, 사장님은 그게 무슨 요술 지팡이라도 되는 양 굳게 믿었다. 그렇게 회사 평가보상 제도가 도입되어 몇 년째 운영되고 있었다. 물론 김 상무가 인사업무를 맡기 전이었고, 가 도입 시부터 많은 의구심을 품고 있었던 제도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김 상무가 인사업무를 맡아서 매년 평가보상 업무를 진행하였는데, 보면 볼수록 직원들의 사기만 갉아먹는 엉터리 같은 제도였다.



"각 부서에서 직원들이 실제로 집중해서 하는 업무와 저희에게 평가지표로 제출하는 업무가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이번에는 부서별 평가지표 수립과 결과 리뷰를 담당하고 있는 기획팀의 강 팀장이 말했다. 강 팀장 말로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하였는데, 하나는 진짜로 수행해야 할 중요한 업무가 계량화하기가 힘든 경우가 많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평가 점수를 잘 받기 위하여 난이도가 낮거나 이미 어느 정도 완성된 업무를 평가 업무로 제출한다는 것이었다. 기획팀에서는 그 많은 부서의 속사정을 다 알 수가 없는 상황이라서, 몰라서 넘어가기도 하고 또 알아도 모르는 체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고 하였다. 다만 기획팀에서 밀당을 통해서 평가대상 업무의 난이도 조절을 하는 정도였는데, 그나마 목소리 큰 부서장을 만나면 업무 난이도가 높은 것으로 기준이 정해진다고 하였다.


각 부서에서 꼭 해야 할 중요한 업무는 제쳐두고 비교적 계량화하여 점수 따기 쉬운 업무로 평가과제를 선정하고, 그렇게 해서야 무슨 회사의 발전과 성과창출이 이루어지겠는가? 직원들 입장에서는 과제 평가를 근거로 승진이나 연봉인상 등 보상 수준이 결정되므로, 쉬운 과제를 선정하여 점수를 잘 따려고 할 것이고 꼭 필요하지만 어려운 과제는 최대한 피하려고 할 것이다. 이미 목표설정 단계부터 중요한 업무가 제외되고 공정성이나 형평성이 무너지고 마는 것이었다. 그걸 기준으로 평가하고 보상을 하였으니 직원들의 제도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쌓일 수밖에. 그렇게 할 바에야 그냥 사다리 타기를 하거나 동그라미 안에 이름표를 던져서 등급을 정하는 게 더 나은 방법일지도 몰랐다.




"사장님, 지금 시행하고 있는 평가보상 제도를 다 뜯어고쳐야 하겠습니다."


시간이 좀 흐른 뒤, 김 상무는 사장실을 찾아 그렇게 보고를 드렸다. 갑자기 뜬금없는 말을 들은 최 사장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김 상무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니, 김 상무! 그게 무슨 말인가? 유명 인사컨설팅 회사로부터 거금을 들여 도입한 제도를 뜯어고치다니? 내가 전략실장에게 듣기로는 이제 제도가 회사에 정착되어 잘 운영되고 있다고 하던데."


최 사장이 거론한 전략실장은 당초 인사컨설팅 회사에 근무하면서 J기업의 인사제도를 설계해 준 컨설턴트로, 컨설팅을 마치고 나서 최 사장의 권유로 J기업에 남게 된 사람이었다. 국내 일류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하여 경영학 박사까지 받은 그는, 어렵게 공부하며 겨우 대학을 나온 김 상무에 비하면 스펙이 빵빵한 넘사벽 같은 존재였다. 최 사장은 그를 무척 신뢰하여 회사의 미래사업을 준비하는 전략실장이라는 직책을 주어 그를 붙잡았다. 그리고 그는 최 사장의 옆에서 미래사업뿐만 아니라 회사경영에 대한 자문을 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설계한 인사제도를 김 상무가 걸고넘어진 꼴이었다.



"직원들이 평가보상 제도에 대해서 불만이 많습니다. 제도를 통해서 직원들이 열심히 일해 성과를 내도록 해야 하는데 오히려 직원들 사기만 꺾는 격이죠. 사기가 꺾인 직원들이 뭘 하겠습니까?"


최 사장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김 상무를 쳐다보며 말했다.


"왜 사기가 꺾인다고 생각하나? 회사가 평가를 정확하게 해서 잘하는 직원들은 두둑하게 보상하고, 잘 못하는 직원들은 경고를 하겠다는데, 제대로 보상을 받고 싶으면 열심히 일하면 될게 아닌가? 그건 다 일하기 싫어하는 직원들의 변명일세."


이미 빼든 칼, 김 상무도 지지 않고 사장님의 말에 반박하였다.


"직원들 대다수가 제도에 문제가 많다고 불만을 토로하고 있는데 그러면 그 직원들이 다 일하기 싫어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제도 도입 때 컨설턴트가 뭐라고 했는지 모르지만, 직원 평가의 목적이 무엇인지부터 다시 한번 깊게 생각해보셔야 합니다."


"그럼 자네는 직원 평가의 목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잘하는 놈 상주고 못하는 놈 벌주기 위한 게 아니라면..."


최 사장이 김 상무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고, 김 상무도 최 사장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답하였다.

"평가는 바로 직원들을 육성하는 과정입니다. 보상을 위한 데이터를 얻기 위해 하는 게 아니고요. 목적과 결과를 혼동하고 있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학교에서 시험을 쳐서 학생들을 평가하는 목적은 학업성취도를 파악하여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일등부터 꼴등까지 줄을 세우려고 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다만 그 결과를 이용하여 학업성취도가 높은 학생은 심화교육을, 학업성취도가 떨어지는 학생은 보충교육을 하는 데이터로 사용할 수는 있겠죠. 즉, 학교에서 실시하는 평가의 목적은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고, 그 결과가 '점수'로 나타나는 것일 뿐입니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평가의 목적은 바로 직원육성입니다. 업무 수행을 하면서 일을 제대로 하는지, 도와줄 일은 없는지 살펴보고, 혹시라도 직원의 역량이 부족하면 그 역량을 키워나가도록 코치하면서 직원의 성장을 돕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일도 되고 직원도 성장합니다. 그게 바로 평가 과정이죠. 즉, 평가는 결과 중심이 아니라 과정 중심입니다. 그게 중요한 이유는 그런 과정을 거치며 직원들이 성장하고 점점 어렵고 중요한 과제에 도전함으로써 성과를 창출해 내기 때문입니다."


"그 얘기가 그 얘기 아닌가? 난 도통 뭐가 다른지 모르겠네. 난 어쨌든 회사가 성장하려면 채찍과 당근을 들고 몰아붙여야 한다고 생각하네. 그래야 직원들이 열심히 일할게 아닌가? 역량이 부족한 것들은 스스로 알아서 노력해야 할 거고."


최 사장의 말을 들은 김 상무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경영자는 먼저 사람을 보아야 하는데 사장님은 사람 자체보다는 능력만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사장님이 김 상무 자신을 중용한 데에는 김 상무라는 사람의 본연의 모습보다는 가지고 있는 능력만을 중요시한 것 같았다. 그것은 굉장히 중요한 관점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능력이 다했다고 생각되거나, 더 능력이 있는 사람이 나타나면 언제라도 바로 용도폐기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무서웠다. 김 상무가 보기에 사장님은 보스이지 결코 리더가 아니었다.



"회사의 인사제도를 바꾸려면 먼저 전략실장과 의논하게! 그가 자네보다는 전문가이지 않은가?"


최 사장이 못을 박았다. 전략실장과 의논하라는 이야기는 지금의 제도를 고칠 생각이 없다는 걸 의미했다. 전략실장 자신이 설계한 제도를 뜯어고친다는데 들어줄 리가 없는 일이었다.


김 상무는 사장실을 나오며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사장님이 직원들을 보는 눈이 자기와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직원들이 제대로 일할수 있게 인사제도를 바꾸고 조직문화를 이끌어 보겠다는 김 상무의 꿈이 가물가물 흐려지고 있었다.



* 이 글은 특정회사나 특정인물과 관련이 없는 가상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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