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누군가의 가족이었다

by 수미니마니모

두 살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중학교 1학년 때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난 너무 어렸고 엄마, 아빠가 어떤 감정이었을지 전혀 몰랐다. 중학생 때야 막연하게 슬프긴 했지만 그게 다였고, 두 살 때의 삶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간호사로 일하면서 환자로 만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누군가의 엄마, 아빠라는 것에 공감하게 됐다. 그러면서 엄마, 아빠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어땠는지 궁금해졌고 미안해졌다. 어땠을까?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엄마가 어땠는지 난 기억나지 않는다. 하루하루 나에게 있었던 일을 말하기에만 바빠서 엄마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했고 묻지도 않았다. 무척 슬펐을 텐데, 슬픔을 가늠조차 하지 못했던 무정한 딸이었던 것 같아서 새삼스레 미안하다.






병원에서 본 사람들은 대부분 한 가족의 일원이었다. 때때로 전혀 연고가 없는 사람이 올 때도 있었지만 극히 드문 일이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한 사회의 기본 구성은 가족이라는 걸 병원에서 실감할 수 있었다. 가족이 하늘나라에 가서 눈물 흘리는 사람들을 보면 기분이 묘했다. 슬프고 묘한 감정이 뒤엉켜 설명 못할 감정. 나는 훗날 저런 모습일까, 그렇게 되기 전에 지금 나는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할까. 수많은 죽음들을 보면서 한 가지 다행스러웠던 건 엄마, 아빠가 아프지 않고 잘 살아있다는 것이었다. 엄마, 아빠, 건강하게 잘 살아 있어 줘서 참 고마워.


일할 때는 물론 퇴사 후에도 과거의 기억에 얽매여 살아가는 내가 싫었다. 지금은 그래도 기억을 되짚으면서 좋은 생각을 할 수 있어 괜찮은 것 같다. 가끔 누군가의 아빠이자 엄마, 아들, 딸이었던 사람들을 생각한다. 다들 정말 서럽게 울었다. 가장 마음 아팠던 건 차마 소리도 못 내고 우는 아이들이었다.




담당 환자는 아니었지만 옆 선생님의 환자여서 본의 아니게 알게 된 40대 환자가 있었다. 요즘 세상에 40대면 청년인데, 그 환자는 중환자실에 입실한 지도 얼마 안 되어 급하게 훌쩍 세상을 떠났다. 병원장님의 지인이다, 미국에 사는 엄청난 부자다, 뭐 그런 말들이 떠돌았지만 사실이라도 소용없었다. 여느 환자들처럼 좁은 중환자실 한 편에서 가셨다.

마지막 면회 시간에 아빠가 없는 것만 빼면 단란해 보이는 가족이 들어왔다. 엄마와 아들 둘, 그리고 할머니 한 분. 오전 열한 시쯤이었을까. 해는 더 높이 뜨려고 밖은 훤한데, 커튼 안은 참 어두워 보였다. 초등학생은 됐을까 싶은 조그마한 아이들이었고 두리번거리다 이내 아빠를 보고는 숨을 들이쉴 새도 없이 울었다. 크게 울어도 되는데, 소리 지르면서 울어도 뭐라고 못할 것 같은데,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숨죽여 우는 모습에 말문이 막혔다. 여기저기 누워있는 사람들, 같은 색의 옷과 머리 모양을 한 사람들이 낯설어서 그랬을 거라고 믿고 싶다. 소리 내지 않고 오래도록 우는 아이들이 너무 빨리 죽음을 알아버린 것 같아서, 알게 한 매정한 현실이 미웠다. 이제 중학생쯤 되었을 것 같은데 부디 몸도 마음도 더 이상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살시도를 한 형을 면회 왔던 고등학생 아이도 기억난다. ‘형이 자살한 아이’라니. 나조차도 이렇게 표현하는데 그 아이는 얼마나 많이 들었을까. 어떻게 표현을 해줘야 좋을까. 형이 자살시도를 하고 아파하다가 죽은, 끔찍하고 무서운 기억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떻게 살고 있을까. 애초에 끔찍하고 무서운 기억일지 안타깝고 슬픈 기억일지 나는 알 수 없겠지만.


아이의 형은 스물 여서 일곱쯤 되어 나와 또래였다. 프리셉터와 함께 봤던 첫 환자여서 더 또렷하게 기억난다. 양잿물을 마시고 와 상태가 좋지 않은 환자였다. 스스로 호흡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온 몸의 장기가 제 기능을 못해서 에크모라는 큰 기계를 달고 있었다. 이제 막 들어온 위험한 신규였던 나는 환자를 만지는 것조차 제한됐다. 중환자실 안에서도 엄청난 중환자라는 것이 느껴지는 환자였다.

교수님이 회진 시간 외에도 자주 오셨고 뭔가 조절을 많이 하셨다. 매 면회마다 오시는 부모님의 표정도, 당연한 말이지만 간절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술이 결정됐다. 프리셉터가 담당할 때라 나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엄청난 약들을 수술 침대에 주렁주렁 매달아 환자를 수술실로 보낸 뒤, 시간이 꽤 걸릴 테니 수술간호 절차를 복기하자는 말을 들은 지 10분 정도 되었을까. 갑자기 전화가 왔고 환자가 말 그대로 들이닥쳤다. 다들 이게 어찌 된 영문이냐며 당황할 새도 없이 빠르게 환자를 옮기고 정리해야 했다. 완전히 진정된 수면 상태였던 환자는 눈을 거의 뜨고 있었고, 계속해서 기침을 하며 피를 토하고 있었다. 이후 의사의 말에 따르면 수술을 하려고 했지만 전혀 손댈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했다. 그냥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고.


몇 시간 후 또 다른 이야기가 들려왔다. 수술실에 가던 도중 잠깐 깨어난 환자가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살려주세요...” 직접 듣지 못했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지만, 굳이 듣지 않아도 목소리가 함께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런 환자에게 교수는 “그러게, 그건 왜 먹었어!”라며 호통쳤다고 했다. 당시에는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 싶었지만 교수도 답답해서 그랬겠지 싶다. 어떻게 말해줘야 했을까, 다른 의사라면 어떻게 말했을지 궁금해지는 가슴 아픈 대목이었다. 수술을 해보지도 못한 채 면회시간이 되었고, 다시 깊은 잠에 든 아들을 보며 어머니는 눈물만 펑펑 흘리셨다. 그간 흘리신 눈물의 양도 내가 본 것만 해도 어마어마했는데, 그렇게 우시다간 쓰러지실 것 같아 걱정될 정도였다.

그 후 자살시도를 하고 병원에 온 환자는 모든 물품이 보험이 안 된다는 말을 들었다. 몇 천만 원이 넘는 병원비를 감당하더라도 살리고 싶었는데, 살릴 가능성까지 희박해진 상황을 맞닥뜨린 것이다. 그들의 비극이 여기까지기를 바랐지만 다음날은 더 비극적이었다.


오전 열 시쯤, 정규 면회 시간은 아니었지만 부득이한 상황인지라 추가 면회를 받았다. 흰 와이셔츠에 베이지색 조끼를 단정하게 받쳐 입은 학생 한 명이 들어왔다. 처음 보는 아이였다. 충격을 받을 까봐 부모님께서 그동안 면회를 허락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아이는 의료진만 가득한 낯선 환경에 혼자 들어와야 했는데, 눈빛에는 약간의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면회 안내를 하고 커튼을 살짝 쳐주었는데 몇 분 간 정말 조용했다. 괜찮은지 싶어 슬쩍 들여다보니 아이는 형에게 손도 대지 못하고 울고 있었다. 나보다 어린아이가 숨죽여 우는 것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아이는 정말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울컥해서 멀찍이 떨어졌다. 이런 상황이 몇 년 간 내게 수도 없이 반복될 거라는 건 알지 못했다.

소리 없이 눈물만 뚝뚝 흘리던 아이는 십 분 정도 지나고 자기 손으로 조심스럽게 커튼을 들추고 나왔다. 아무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들 자기 일을 하고 있었지만 관심이 이쪽으로 쏠려 있다는 건 다 알 수 있었다. 분위기는 숙연했다. 혼자서 얼마나 무섭고 부담스러웠을까. 감히 아이의 심정을 나는 상상할 수 없었다.






그때의 기억을 복기하면서 생각나는 문장이 있다. 좋아하는 책의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자, 앞으로도 계속 상태 메시지에 적혀 있을 말


모든 고통은 개별적인 것


모든 사람의 모든 고통은 개별적인 것이라, 이해를 한다고 해도 100% 완전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 나와 그 사람은 다른 존재니까 이해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하는 게 가장 최선일까? 고통이 개별적이라는 것을 인정만 하면 되는 것일까. 무엇이 가장 최선일지 조금이라도 더 빨리 답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나도 모르게 사람들에게 상처 주지 않고 상처 받지 않으며 살 수 있도록. 모두 누군가의 아빠이자 엄마, 아들, 딸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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