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와 다름없던 하루였다. 그것은 예고도 없이 나를 찾아왔다.
이브닝 근무 중이었고 환자가 새로 올 거라는 말에 밥도 미리 먹고 만반의 준비를 다 했다. 병동에서 환자를 보냈다는 전화가 왔고 곧 중환자실의 문이 열렸다. 1년 넘게 일하면서 처음 보는 환자의 상태였다. 휠체어를 타고 있었다. 중환자실에 휠체어를 타고 손을 흔들며 들어오는 환자라니,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싶어 헛웃음이 먼저 나왔다.
맥이 탁 풀렸다. 선생님들을 부를 생각도 못했고, 주임님 두 분과 나까지 셋이서 환자를 침대로 옮기기로 했다. 루틴하게 침대에서 침대로 환자를 옮기거나 자세를 바꾸는 건 많이 해봤기에, 이번에는 그냥 좀 힘들겠다 싶은 정도였다. 그러나 휠체어에서 침대로 환자를 옮기는 것은 경우가 달랐는데, 해본 적이 없어서 다를 거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앉아있는 사람을 일으키고 올려서 눕히는 것은 더 큰 힘이 필요했다. 침상 위에 올라가 반대편 아래쪽 휠체어에 앉은 환자를 들어 올리는 순간, 뭔가 툭-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자세도 힘을 주는 방법도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들었으니까 빨리 옮겨야 했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민데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었다. 허리가 지끈거렸지만 항상 아팠으니 그러려니 하고 일했다.
하지만 평소와 달랐다. 점점 통증의 정도가 심해지더니 서 있어도 앉아 있어도 아팠고, 설상가상으로 신환 정리 때문에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해야 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끙끙대며 돌아다녀도 한창 바쁜 시간, 모두의 신경은 환자들에게 쏠려 있었다.
와중에 새로 온 환자는 갑자기 섬망 증세가 생기면서, 이제 막 삽입한 콧줄을 뽑고 모든 시술을 거부하며 난리 치기 시작했다. 간호사를 때리고 침대를 치며 내려가려고 힘겨루기를 하는 등 엉망진창이었다. 보호자는 연락을 받지도 않고 겨우 닿은 통화에서는 이미 집에 갔다고 했고, 인계 시간은 다가오는데 아무것도 정리된 게 없었다. 허리를 부여잡고 환자를 겨우 달래고 있는데 마침 한 교수가 나타났다. 당직이 아닐 때도 담당 환자들을 보러 오기로 유명해서, 당직 레지던트와 담당 간호사들을 두렵게 하는 교수였다. 그가 환자를 잠깐 보더니 한 마디 하셨다.
“병동 다시 보내세요.”
굳이 여러 검사하지 않아도 숨을 잘 쉴 기력이 충분하다며 병동에 보내라고 했다. 혈액검사 수치도 이미 확인한 것 같았다. 당황스러웠지만 반가운 소식이었다.
오늘도 의미 없는 고생만 했다는 생각을 하며 퇴근을 했다. 통증은 점점 더 심해져 허리에서 다리까지 번졌고 앉아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피곤해서 그냥 자버리려다가, 내일은 더 아플지도 모르겠다는 불길한 예감에 이를 악물고 씻고 잔 것은 신의 한 수였다.
다음날 역시 이브닝이어서 아홉 시 반쯤 눈을 떴다. 여느 때와 같이 침대 아래로 다리를 옮겼고, 의식하지 않은 채 두 다리에 체중을 실어 일어났다. 너무도 일상적인 일이라 방심했던 것이라고 하기엔 몰려온 통증이 엄청났다. 한 발짝 내딛지도 못하고 넘어져 버렸다. 순간 ‘이런 게 낙상이군’ 하고 생각하는 자신이 너무 싫었다. 다리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고 허리는 끊어질 것만 같았다.
출근을 못 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씻어 보겠다고 기어서 화장실에 가는데 그것마저 힘겨웠다. 일어날 수가 없었고 세수조차 하지 못했다. 약을 쓰면 괜찮을 거라고 나를 안심시키면서도 아파서 나오는 눈물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손에 잡히는 옷을 양 팔다리에 욱여넣고 모자를 눌러썼다. 택시를 불렀지만 골목 중의 골목인지라 잡히지도 않았다. 큰길로 나가서 차를 잡아야 한다는 사실이 암담했지만, 혼자 나가야 했다. 도와줄 사람은 없었고 지체했다가는 출근을 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때까지도 진통제를 맞고 괜찮아지면 씻고 출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겨우 택시를 잡아타고 병원에 도착했지만, 아파 죽겠으면서도 일하는 병원 응급실에 휠체어를 타고 들어간다는 자체가 너무 부끄러웠다. 그러나 부끄러움도 잠시, 휠체어에 앉아있는 것조차 너무 아파서 계속 울고 있는 와중에도 환자들이 물밀 듯이 들어왔다. 나는 우선순위가 아니었고, 기다리던 시간은 지옥같았다. 혼자 울고 있는 게 서럽고 아프고 짜증나고 화가 나는데, 나를 아프게 한 병원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우는 내가 너무 무기력했다. 온갖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이 휘몰아쳤다.
간호사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느낌. 의사였다면 진료를 더 빨리 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얼토당토않아야 하지만 정말 그랬을 것 같다는 생각. 내가 인턴이라도 되었다면, 좀 다르지 않았을까.
계속되는 생각들과 싸우면서 30분 정도 지나자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MRI를 찍어야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지만 그마저도 오늘은 안 된다고 했다. 일단 X-ray를 찍고 간단한 움직임 검사를 한 후, 진통제를 맞고 퇴원하라고 했다. 결국 진통제뿐이었다. 당장 못 걷겠고 아파 죽겠는데, 병원이라고 찾아온 곳은 그저 바쁘게 돌아가는 일터 중 하나였다. 이해가 되는 게 더 속상했다.
별 수 없지 생각하며 X-ray를 찍으러 휠체어를 돌렸다. 처음 돌려보는 휠체어 바퀴는 생각보다 두껍고 무거웠다. 남는 힘을 모조리 손에 쏟아 붓고 낑낑대며 열심히 갔지만 시간이 좀 걸렸었나 보다. X-ray 선생님이 방에서 나와서 데리러 오셨는데, 세상에, 아는 사람이었다. 원래도 좋은 모습을 보여드린 적이 없었지만, 꾀죄죄한 몰골의 환자가 되어 만나니 더욱 초라해지는 것 같았다.
내 마음을 모르는 선생님은 반갑게 인사해주시더니 무슨 일이냐며 놀란 눈치로 물었다. 아침부터 혼자 모든 걸 다 해내고 있었고, 그럴 수밖에 없고 그래야만 하니까, 미처 토해내지 못하고 꾹꾹 눌러왔던 설움이 삐져나왔다. 울어버릴 수는 없어서 또 참았지만 말 한 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다 따뜻해서 참느라 힘들었다. 다른 환자들에게도 그렇겠지만, 휠체어를 밀어주고 앉혀주고 옮겨주는 게 너무나도 고마웠다. 어쩌면 의료진에게는 특별할 것 없는 사소한 친절이, 아픈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크게 다가오는지 느낄 수 있던 순간이었다. 아직도 생각날 때마다 참 많이 고맙다.
오르락내리락하는 기분과는 상관없이 하루는 계속 흘러갔다. 경환자 구역에서 진통제를 맞았다. 약한 진통제는 전혀 효과가 없어서 마약성 진통제를 잔뜩 때려 붓고 나서야 조금 나아졌다. 내가 환자에게 붙여주면서도 효과가 있을지 의심했던 패치형 진통제도 꽤 효과가 있어서 신기했다. 그래도 여전히 아프긴 했다.
통증이 좀 가라앉자 정신이 확 돌아왔다. 출근을 못 할 것 같았다. 바로 전화를 했지만 어느새 열두 시가 다 되어 있었다. 병동에 전화를 걸면서도 내가 아픈데 죄송해야 하는 현실이 끔찍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전화를 받으신 선생님이 내가 좋아하는 분이셨다는 것. 아파도 혼나지 않고 전화를 끊을 수 있었고 고작 그것에 안도하며 통화를 마쳤다.
엄청난 양의 진통제를 계속 맞으면서 출근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긴장이 거의 다 풀렸다. 얼마 되지 않아 또 전화가 왔는데, 병원에서 온 것이라 꺼림칙해하며 받았다. 파트장이었다. 정말 좋아할 수 없던 사람이었는데, 단 두 명 겪어봤지만 두 번째 사람은 유독 나와 맞지 않았다. 내가 배우고 경험한 상식선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위로는 못해줄망정, 물론 바라지도 않았지만, 병동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뻔히 알면서 늦게 전화했다고 나무라기 시작했다. 걷지도 못하고 기대어 있음에도 아파 죽겠는데, 눈물을 그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내가 변명을 못할 거라는 것을 잘 아는 갑의 입장에서 다그쳤다. 본인의 화를 다 쏟아내고 나서야 상태를 물었는데, 걱정이 아니라 상태 판별을 위함이었다. 출근을 할 순 있는지, 얼마나 출근할 수 없는지 등에 관한 것. 물론 한 파트의 장으로서 직원의 상태를 파악해서 인력 관리를 해야 할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머리로 이해한다고 감정까지 소화하는 것은 아니었다.
말하는 내내 나는 을이고, 사소한 걱정 하나 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느낌이 들어서 속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어차피 회사라서 돈이 우선시 되어야 하는 게 마땅한데도 괜히 다 억울했다. 아픈 것도, 집이 서울이 아닌 것도, 간호사가 된 것도 전부 다. 전화를 끊기 전 마지막 말에 더 기가 찼다. 간호사는 디스크나 허리 관련 질환에 대해 산재 처리가 안 된다며 알아 두라고 했다. 이제 막 다쳐서 병원에 와서 산재처리는 물론 보험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그런 말들은 너무 야속했다. 결국 괜찮냐는 말 한 마디 듣지 못하고 통화는 끊겼다.
이후부터는 디스크 환자들 정말 힘들겠구나 싶었던 시간이었다. 진단명이 같아도 부위나 증상에 따라 다르겠지만 아마 어느 정도는 비슷하지 않을까. 나는 약간은 특이 케이스이기는 했다. 젊은이 자체가 흔치 않은데 못 걸을 정도로 아픈 사람은 더 흔치 않았다. 일단 척추, 허리 전문인 양방 병원에 입원해서 물리치료와 도수치료를 매일 받았다. 수술을 하지 않으면 계속 입원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쫓겨났고, 비싸고 유명한 한방 병원에 들어갔다. 2주 동안 치료받으면서 병원비만 800만 원이 넘게 나왔으니, 내 생에 다시는 없기를 바라는 생활이었다.
단순히 돈 때문만은 아니었다. 걷고 씻고 먹는 일상생활을 하는 게 어려웠다. 손에 작은 생채기 하나만 나도 씻을 때마다 쓰라린데, 몸의 중심이 아파버리니 어느 것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사소하게는 머리 감고 샤워하는 것부터, 밥을 먹을 때 앉아있는 것마저도 어려웠다. 초반에는 밥 먹기 전까지 누워 있다가 밥만 먹고 다시 자리에 누워야 했다. 의사도 그러라고 했는데, 꼼짝없이 몇 주를 누워만 있으려니 그렇게 괴로울 수가 없었다.
5월의 하늘은 파랗고 날씨도 선선했는데, 나의 젊은 시간들은 왜 이렇게 누워만 있어야 하는가. 차에 치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들 따위가 문제였나. 아프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동생에게 부탁해 가져온 책들을 다 읽고 난 후에도 시간이 너무 남아서, 떠오르는 모든 생각들을 펼쳐 놓고 하나하나 짚었다. 건강이 중요하다는 참인 명제는 물론이고, 지나쳤던 다양한 환자들까지 생각했다. 다들 처음에는 이렇게 갑자기 아팠겠지, 얼마나 놀라고 당황스러웠을까. 다음 외래 예약이며 약, 보험 서류 등 챙겨야 할 것도 상당했다. 입원해서 시간이 여유로웠고 보험 상담사가 따로 있는 큰 병원이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보험료를 받는 데 꽤 오래 걸렸을 것이다. 사실 퇴원 후 외래 다녔던 보험료는 청구도 하지 않았다. 그것만 지금 처리해도 10만 원 정도는 수중에 들어올 텐데, 내가 아직은 생활이 궁하지 않나 보다.
3주간의 병원 생활을 마치고 나는 다시 병원으로 돌아갔다. 간호사였다가 환자였다가 다시 간호사로. 분명 일을 쉬었음에도 모든 것들이 전보다 나아졌다. 내가 드디어 진짜 간호사가 된 것 같았다. 물론 돌아와서도 온전히 간호사라는 느낌을 받기는 어려웠지만, 적어도 환자를 대하는 마음만큼은 더 진심이 담겼던 것 같다.
환자 입장에서 생각하고 위하다 보니 일이 좀 나아진 것 같았고 때로 재미있기도 했다. 조금씩 괜찮아지는 사람들을 보고 좋아하기도 했다. 마냥 좋은 일만 있지는 않았지만, 보람 하나씩은 마음에 챙겨 넣어야 내가 살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것도 있었다. 그러나 가장 마음을 편하게 만든 건 그만둘 수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 같다.
아파서 병가까지 냈던 터라 퇴사 허가는 어렵지 않았다. 결국 작년 2018년 10월 29일, 9주의 교육기간과 1개월의 계약직 그리고 2년 1개월의 정규직 간호사 생활을 마무리지었다. 마침표를 찍었다는 표현이 식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이만한 표현이 없는 것 같다. 한 동안 속이 시원하고 개운했다.
요즘은 친구들과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걱정된다. 다들 허리가 아프다는 말을 달고 산다. 부디 괜찮았으면 좋겠다. 나도 아직 허리가 움찔거리며 아플 때도 있지만 이제는 병원에서 일하고 있지 않다. 한 번 겪었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고통이 찾아오기 전에 예방할 줄도 안다. 꼭 경험해보고 나서야 조심하게 되는 불행한 사람은 나 하나로 족하다. 내 사람들이 나와 같은 일을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 괜찮았으면 좋겠다. 이럴 때면 생각나는 노랫말이 있다.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