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은 소리를, 대나무는 몸속을, 새는 뼛속을 깔끔하게 비웠다. 텐진빠모는 열두 해를 히말라야 동굴에 들어 마음을 비웠다. 말이 열두 해이지 날 수로 치면 사천삼백팔십 날이다.
비운다는 건, 시간을 채우는 작업인가 보다. 그리 대단 커나 깔끔 친 않더라도, 내가 비워낼 목록을 적어본다. 잠. 밥. 화. 나열해놓고 보니 비운다는 거, 특별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 단순한 품목도 비우려 드니 만만찮더라. 분마다 굳은 결단, 초마다 단단한 의지가 필요하더라. 이 중 하나라도 온전히 비운다면, 수행자라 불러주겠다.
대나무는 몸을 비워 순도로 증류된 피리소리를 내었고, 거울은 소리를 비워 미추를 속속 비추게 됐다. 새들은 뼛속을 비워 공기 속을 맘껏 날게 되었다.
오늘 또 작심해 본다. 위에 적은 목록 중, 한 날에 한 가지씩 조금조금 비워내기로. 이 자기 갱신의 비장함 속에서, 끝까지 비우지 못하는 잔혹한 말 한마디. "사유를 행동이 따라갈 수 없을 때 인간불량자가 된다"는.
이 글은 제 책 《잎이 꽃을 낳다》 2014. 에서 발췌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