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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림 Oct 21. 2021

아모르 파티(Amor Fati)

단풍은 가을의 화려한 꽃이다. 


  단풍 든 나무, 단풍 든 숲, 단풍 든 산을 바라보면 ‘만추(晩秋(1981)’ 영화에서 긴 바바리코트 깃을 세우고 걸어가는 김혜자 씨의 등 뒤로 흩날리던 낙엽의 엔딩 장면이 떠오른다. 차중락의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 이용의 ’잊혀진 계절‘ 역시 가을이면 어김없이 가슴을 아릿하게 맴도는 가을 노래다.


  만약에 나뭇잎들도 감정이 있다면 나뭇가지에서 떨어지기 순간에 어떤 표정을 지을까? 까르르 웃으며 떨어질까, 아니면 흐느끼며 아쉬운 표정으로 허공에 발을 내딛던가, 동시에 하나 둘 셋 외치면서 손을 잡고 떨어질까? 그중에서 동백꽃처럼 단숨에 철퍼덕! 하고 하강하는 낙엽은 한 장도 없다. 대부분 허공을 빙글빙글 돌면서 발레리나처럼 사뿐히 바닥으로 착지한다.


  단풍 든다는 것은 어쩌면 잎새로서 가장 화려한 절정의 순간이기도 하다. 겨우내 메마른 가지에 싹을 틔우고, 긴 여름 푸르름을 뽐내던 무성한 이파리들은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지면 서둘러 오색으로 치장한다. 늦가을 떠날 채비를 하는 나뭇잎에게 나무는 진지하게 당부의 말을 하는 건 아닐까? 하지만 나무와 단풍 든 나뭇잎의 인연은 거기까지다. 마치 부모 품을 떠나 결혼하여 새 가정을 꾸리는 자녀들처럼, 새 가지로 길을 내고 새잎에게 허공을 내주고 잘 썩어서 밑거름 되려고 떠나는 거다.


  잎의 빛깔이 변화하는 것은 엽록소의 생산을 중지하고 앞 안에 안토시아닌이 색소를 만들지 못하여 노란색이나 주홍색이 되는 것처럼, 우리 인생의 가을은 노년기로 접어들면서 각자 어떤 색깔을 띠고 싶어 할까?


  얼마 전에 올해 처음으로 문학동인 모임을 하였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하여 일 년 동안 한 번도 만날 수 없었는데 마침 결혼식이 있어 식장에서 만나 간단히 얼굴이라도 보자고 하였다. 점심 식사 후 바로 헤어지기가 아쉬워 근처 커피숍으로 이동하여 차 한 잔씩 하려니 비가 종일 내리고 주차 공간이 여의치 않았다. 고민하다가 아예 좀 나가서 한적한 카페로 가려고 이동하였다. 한 테이블에 4명씩은 허용하되, 2명은 백신 접종을 2차까지 맞았으니 6명이 한 테이블에 앉을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좀 연로하신 한 분이 먼저 도착하여 우리가 들어서자마자 카페 여주인에게 화를 내면서 자리에서 일어서 나갔다. 영문을 모르는 우리는 화장실에 다녀오나 보다 하고 기다리다 전화해 보니 이미 집으로 가버렸다. 전후 사정을 모르니 황당하기도 하고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분의 승용차를 타고 온 사람은 벌어진 상황을 충분히 이해한다면서 별일 아니니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운전하는 도중에 앞 차량의 빗물이 승용차 앞 유리창으로 튀는 바람에 많이 놀랐다는 것이다. 겨우 카페에 들어서 테이블에 앉으려는데 주인이 백신 접종 확인을 하겠다고 하니, 거리두기에 관한 내용도 자주 바뀌어 상황 파악을 못한 그분으로선 뭐 이런 곳이 있냐면서 화를 내고 나간 것이다. 더군다나 깜빡 잊고 심장약을 안 먹고 와서 여러 가지 악조건이 겹친 것을 나중에서야 알았다.


  이 문제를 놓고 잠시 토론 아닌 토론을 하였는데, 결론은 우리가 이해하기로 하였다. 커피 한 잔 마시러 25분을 달려서 이 구석진 카페까지 안내하였다면서 안내한 사람을 마치 자기 아들처럼 나무라고 갔는데도 말이다. 집으로 가면서도 한마디 말도 없이 후다닥 나가는 모습까지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일반 사람들은 선뜻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연장자라 하여도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과 십여 년 차이 정도밖에 나지 않는데 어떻게 우리 앞에서 일방적인 화를 내고 나가는 건지?


  1년 만에 만난 문우들이니 좀 한적한 곳에서 이야기도 나누고 하려다 보니 외곽으로 나갔던 건데, 굳이 차 한잔 마시려고 비 오는 날에 그리 멀리 왔냐는 생각하는 현실적인 견해 차이다.


  중년기에서 노년기로 접어드는 무렵이 인생에서도 단풍이 드는 시기다. 단풍 든 나무의 모습이 다르듯, 누구나 각자 살아온 모습이 얼굴에 담겨 있다. 노화로 인해 주름지고 늘어진 피부와 타고난 얼굴색은 조금씩 달라도, 그 사람 얼굴에서 풍기는 인상은 제각각 다르다.


  우연히 온화하고 인자한 노인들 표정을 만나게 되면, 그냥 스치지 못하고 시선이 가까이 다가간다. ‘저 어르신은 그동안 어떻게 살아오셨길래 저리도 온화하고 편안하고 표정을 짓고 계실까?’ 하고 바라보게 된다. 나도 나이 들면 저렇게 온화하고 편안한 표정을 갖겠다고 다짐한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단풍 들고 있는 내가 거울 속에 서 있다. 만약에 내가 한 그루의 단풍나무라면, 나를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이 과연 어떤 단풍나무라고 바라봐 줄까?


 가을비는 종일 차분하고 내리고, 카페 창문 너머로 오래된 소나무들이 비에 젖어 진한 솔향기를 풍기는 ‘작은 숲’ 카페에서 오랜만에 문우들과 긴 시간 앉아서 담소를 나누었다. 문학을 이야기하면서 먹던 따끈한 아메리카노 커피와 고르곤졸라 피자 맛은 정말 잘 어우러진 가을이었다. 모처럼 갇혀 지내던 집안에서 벗어난 한적한 만남이라서 더 즐거웠다. 물론 처음에는 화를 내신 그분 때문에 분위기가 좀 썰렁했지만, 어르신이 어쩌면 우리를 그만큼 편하게 생각하고 화를 낸 거고 지병이 있으니 우리가 이해하자는 명쾌한 결론에 금세 잊어버리고 즐거운 담소를 나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분의 현재 모습에서 얼마 남지 않은 미래의 내 모습도 되짚어 보게 된다.


  ‘만약에 내가 저런 상황이었다면 어떻게 처신했을까?’ 불편한 상황에서 누군가가 먼저 우리가 이해하자고 하였기 때문에 서로 동의하게 된 것이다. 화를 자주 내고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사람의 단풍은 별로 곱지 못할 것이다. 이왕이면 한 번뿐인 인생인데 아주 고운 빛으로 물들어서 떨어지는 곱게 물든 잎새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아모르파티(Amor Fati)’는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이다. 

가수 김연자가 부른 ‘아모르파티’ 노랫말을 보면,      


  “산다는 게 다 그런 거지/ 누구나 빈손으로 와/ 소설 같은 한 편의 얘기들을/ 세상에 뿌리며 살지/ 자신에게 실망하지 마/ 모든 걸 잘할 수 없어/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면 돼// 인생은 지금이야 아모르파티…”   

  

  살아 있는 오늘은 현재(present)이고, 선물이다. 백 년도 살기 힘든 것이 인생인데, 마치 천년은 살 것처럼 부질없는 것에 욕심을 부리고, 나이 들면서 자기 자신밖에 모르고 사는 건 아닌지? 비우고 또 비워내도 욕망은 끝없이 되살아나고 부질없는 욕망 때문에 주변 사람을 괴롭히고 힘들게 하다 보면 결국 자기 자신이 가장 피해자로 남게 되어 스스로 외로워지게 될 것이다.

  단풍을 보면서 비움의 미학을 배우게 되고, 낙엽을 보면서 희생을 떠올려본다. 나무는 해마다 새 가지에 새잎을 채우고, 가득 채우고 나면 다시 비워내고, 비우면 다시 채우면서 한살이를 거듭한다. 그러나, 인생은 직진이라 되돌아갈 수도 없고, 채울 수도 비울 수도 없이 오로지 한 길뿐이다. 지금 살아 있는 하루하루가 우리에겐 새로운 삶이고, ‘아모르파티’이다.


  ‘지금, 바로, 이 순간’을 ‘운명처럼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것만이 곱게 물들 수 있는 멋진 삶이기에, “아모르 파티!”.


이미지 출처-다음 아미지

http://iwomansense.com/sub_read.html?uid=26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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