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종: 말하지 못한 안부

자라난 마음, 떠난 아빠의 마음을 품다

by Hsun

망종은 24 절기 중 아홉 번째 절기로

수염이 있는 곡식의 씨앗을 뿌리기에 가장 좋은 시기다.

무언가를 심기엔 좋지만

조금만 늦어도 때를 놓치기 쉬운 계절이다.


씨를 뿌리는 시기라는 말을 듣고

문득,

마음에도 그런 때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오늘 그리움을 심는다.

말로 꺼내지 못한 안부,

마음속 깊이 뿌리내린 감정을

조심스럽게 꺼내 심는다.


오늘은 현충일이기도 하다.

모든 이름이 불릴 수 없는 사람들,

남겨진 자리에서 그리워지는 마음들,

그리고 아직도 가슴속에서 자라고 있는

누군가의 온기.


그들의 숭고한 희생 위에

우리는 오늘이라는 이름을

완성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이름은 사라졌지만,

그들이 지켜낸 오늘이 지금 우리 안에 살아 있다.


묵념을 하다가

오래전 기억 하나를 꺼냈다.


아빠다.

이제는 더 이상 말을 건넬 수 없는 사람.

하지만 내 안에서 여전히 자라고 있는 마음은

어찌할 수가 없다.


아빠는 문학소년이었다.

<폭싹 속았수다>에 애순이가 문학소녀였던 것처럼.

시를 썼고,

글을 사랑했고,

누구보다 감수성이 깊은 사람이었다.


혼자 지방에서 근무하시던 시절에는

가족에게 종종 편지를 보내셨다.

산책 중에 만난 계절,

오늘 있던 일 이야기,

가끔은 짧은 시 한 줄도 함께 실려 있었다.


그땐 몰랐다.

그 짧은 문장이

내 마음속에 어떤 씨앗이 되고 있었는지.



나는 칭찬을 받을 때가 참 좋았다.

투박하지만 가끔씩 툭툭 던져주는 칭찬을

조금이라도 더 듣고 싶어서 더 잘하고 싶어지곤 했다.

하지만 그때는 말썽꾸러기였기에

걱정을 끼치는 일들이 많았다.


아마도 아빠와 엄마 가슴에

날카로운 대못 몇 개는 내가 박았을 거다.


철들기 전에 이별해서

술 한잔 기울일 시간도,

대못을 뭉툭하게 다듬을 시간도 부족했다.


빠른 이별을 핑계 삼아

죄송함 뒤에 숨어 본다.



나는 어릴 때부터 쓰는 걸 좋아했다.

이만큼 커서 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을 때,

아빠는 “그걸로 먹고살 수 있겠냐”라고

묻지 않으셨을 거다.

대신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진심으로 쓰면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


아빠는 말보다 행동이 많았던 분이다.

늦은 시간에 퇴근해도

묵묵히 새벽마다 일어나 출근했고,

업무 능력과 인간성으로 늘 인정받으셨다.

주말마다 요리를 하고,

여행을 가며 가족을 살뜰히 챙기셨다.


그런 우리를 두고 퇴근하듯신 발걸음이

무척이나 무거웠을 것이다.


나는 아빠의 삶에서

‘성실함’이라는 단어의 정의를 배웠다.

큰 목표나 완벽한 루틴이 아니라,

작고 같은 행동을 오래도록 이어가는 태도였다.

그 정직하고 단단한 삶의 방식은

이제 나의 태도가 되었다.



감정은 섬세하게 다뤄야 한다는 것도

기분파였던 아빠에게서 배웠다.

아빠를 닮아서인지 글에서는 다정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기분대로 말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감정에 휩쓸리지 않으려

마음을 다듬는 연습을 한다.


하루하루

무언가를 성급하게 이루려 하기보다는

작은 문장도 붙잡고

오래 바라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

마음이 다 익지 않은 날은 쓰지 않고,

말이 앞서려 할 땐 잠시 멈추고,

감정이 흔들릴 땐 속도를 늦춰본다.


그건 아빠가 내 안에 심어준 태도이기도 하고,

살면서 조금씩 배워온 나만의 방식이기도 하다.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나는 지금 천천히 익어가는 중이다.

감정도, 사람도, 문장도.

서두르지 않고도 도달할 수 있다는 걸

조금은 믿게 되었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문장들은

아빠가 나에게 남긴 씨앗의 열매인지도 모른다.



또,

아빠는 성실하고 활발한 분이셨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투병 끝에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떠나셨다.


어떤 인사도 없이.


그때 아빠에게 펜이라도 드렸다면 어땠을까?

그 후회는

아마 아빠를 다시 만나기 전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마음속에서

아빠에게 말하지 못한 안부를 매년 꺼낸다.


잘 지내시냐고,

그땐 정말 감사했다고,

그리고 아빠를 닮아

이따금 글을 쓰고 있다고.



나는 마음속에 안부 하나를 심는다.

아빠가 나에게 심어준 감정의 씨앗처럼,

이제는 내가 그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시간이다.

삶은 앞으로만 걸어가야 하는 줄 알았지만,

가끔은 이렇게 멈춰서

뒤를 돌아볼 때 비로소 중심이 선다.


오늘은 그런 날이다.


바람은 포근히 불고,

햇살은 강하고,

마음은 잠시 숨을 고른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글을 쓴다.

아빠가 남긴 문장처럼,

진심을 담아 한 줄, 한 줄.



그리고 나는 안다.

아빠에 대한 이야기는

오늘로 끝나지 않을 거란 걸.

그 생각은 늘 나를

내면 깊은 곳까지 산책하게 만든다.

언제고 다시 걸음을 옮기게 할 것이다.

다시 써 내려갈 수 있도록,

다시 마음을 심을 수 있도록.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이들을 기억하며,

지금 이 순간 살아 있는 마음에게

작은 씨앗 하나를 건네본다.



지난 6월 5일은 환경의 날이기도 하다.

자연을 지키는 일도,

생명을 기억하는 일도,

결국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다는 걸

나는 이 계절에 조금씩 배워간다.


심는 마음,

지키는 다짐,

기억하는 애도.


이 모든 감정은

6월이라는 계절 안에서 하나로 이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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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