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다

by 하늘위로

김이분 할머니가 유독 아끼는 찻잔이 있다. 흰 바탕에 연분홍 잔꽃이 촘촘히 전면을 채우고 있는 홍차 잔이다. 할아버지와 신혼여행 갔을 때 구매한 이 잔은, 세월의 흐름만큼 여기저기 낡긴 했어도 이 나간 곳 하나 없이 지금도 할머니의 오후 티타임을 든든하게 맡아주고 있다. 구매시기가 그렇다 보니, 찻잔은 꼭 두 사람의 결혼생활과 같은 나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행여나 깨질까 이 잔을 들고서는 딴생각하는 일이 없었는데, 그날따라 찻잔이 스르륵하고 할머니 손을 벗어났다.


쨍그랑


찰나의 순간, 할머니는 저걸 어쩌나 싶기보다 알 수 없는 공포감에 휩싸였다. 몸이 덜덜 떨린다. 내가 왜 이럴까 하다 조심히 찻잔 조각을 치운다.


"고마웠어. 수고 많았어."


할머니는 소리 내어 찻잔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작은 롤케이크 빈상자에 조각들을 전부 담고서, 할머니는 이 조각들을 묻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예뻐서 못 버리고 있던 롤케이크 빈상자는 찻잔의 관이 되었다.


할머니는 찻잔 조각이 든 빈상자를 옆에 놓아두고 멍하니, 마당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럴 리 없는데, 벌써 가을인가... 살짝 한기가 돌아 몸을 떨었다. 할아버지가 오면 새 찻잔을 함께 사러 가자고 해야지, 두 번째 홍차 잔을 사는 거니까 우리도 두 번째 신혼이 시작되는 거라고 이야기해줘야지. 혹여나 할아버지가 깨진 찻잔을 두고 마음 쓸까 싶어, 할아버지에게 해 줄 말도 미리 생각해두었다. 정작 서운한 건 할머니인데도 말이다.


그런데, 그날 할아버지는 할머니 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부부를 아는 이웃이 빠르게 할머니네 집으로 뛰어가 소식을 전했고, 곧이어 경찰이 할머니를 모셔갔다. 그리고 할머니는 차가운 침대 위에 누워있는 할아버지와 만나게 됐다. 할아버지는 눈을 감고 있었다.


"여보, 저 왔어요."


할아버지는 눈을 뜨지 않았다, 할머니의 심장이 빠르게 뛴다.


"어서, 집에 갑시다."


할아버지는 대답이 없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 가슴에 귀를 댔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할머니의 세상이 무너졌다. 숨이 턱 막힌다.


"이제, 더는 숨을 안 쉬는 거예요?"

"집엔 걸어서 못 가는 거지요?"


아무도 대답을 못했다. 순간, 할머니의 눈에 할아버지의 손이 보였다. 참 다정했던 손이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폭포수처럼 눈물이 쏟아졌다. 아니, 할머니 본인이 의식하지 못했을 뿐 처음부터 계속 울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할머니는 정신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지금은 안돼, 이분아, 지금은 할아버지를 지켜야 해... 지금 한시라도 할아버지 얼굴을 더 봐야 해. 정신 차려. 김이분.


"할아버지와 인사를 가능한 더 길게 하고 싶어요, 최대한 빨리 집에 모셔와서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히고 싶은데... 그럴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무너진 자신의 마음보다 지금은 할아버지를 챙기는 게 먼저라 생각했다. 할아버지의 보호자는 할머니 단 하나다. 그래서 할머니는 마음을 꾹꾹 누르며 침착하려 애썼다. 할아버지를 얼른 집으로 모셔가고 싶었다. 안아주고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둘이서 천천히 작별하고 싶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많이 찌른 거래요? 우리 할아버지, 많이... 아팠겠죠."


68세 김이분 할머니는 통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