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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 Oct 18. 2024

#6 - 사람이 내 마음 같지 않습니다.

- 생각지 못했던 이와 치킨에 맥주 한 잔

 사람을 만나는 것이 무척 쉽던 때가 있습니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도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나누고, 친구의 친구는 자연스럽게 내 친구가 되곤 했죠. 어릴 때일수록 더욱 그랬습니다. 동네 놀이터나 학교 운동장에서 만나면 처음 만나는 아이라 하더라도 같이 뛰놀고 흙먼지 좀 묻히면 금세 동네 형아, 누나, 동생, 친구가 되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놀이터에 나와있던 부모들도 그랬습니다. 한두 번 마주치다 보면, 금세 이름보다는 누구 엄마, 누구 아빠로 불리며 가깝게 지내는 사이가 되었죠. 그때는 누군가를 만난다는 게 두려움보다는 반가움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대학에 다닐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같은 수업을 들으며 낯이 익게 된 사람과 오며 가며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하게 되고, 얼떨결에 술자리에서 합석하게 되더라도 학과와 학번을 묻다가 통성명을 하고는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술친구가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같은 학교, 같은 학과라는 이유만으로도 막연한 친근감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방학이나 군복무로 한동안 만날 일이 없다가도 오랜만에 만나면 아무런 부담감이 없이 어울릴 수 있었지요.


 나이가 들어가며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삶의 반경이 넓어진 만큼 어린 시절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과 마주하게 되었죠. 그런데 그게 전보다 어렵습니다. 나이와 직업과 성별과 사회적 지위가 누군가의 이름 앞뒤에 붙게 되었죠. 거기에 맞추어 사람마다 대하는 방식이 달라야 하고, 부르는 호칭이 달라야 하며, 마주 볼 때의 표정과 자세가 달라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누군가를 대할 때 그 많은 것들을 하나씩 고려하다 보면 문득 이전과는 다른 관계들에 '이게 어른의 삶일까' 생각하곤 합니다.


고민을 잘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느 무리에 건 한 명씩은 있더군요. 그들이 자처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격과 관계에 따라 자연스럽게 그런 역할을 하게 됩니다. 주변 사람들은 그에게 이런저런 고민거리를 털어놓으며 하소연을 합니다. 자연스럽게 그는 여러 사람의 생각과 그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알게 되고, 그들 사이에서 때로는 중재자, 때로는 동조자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애석하게도 저 또한 그런 부류의 사람입니다. 타고나기를 정이 많아, 타인의 감정에 무척 민감합니다. 누군가 불편해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걸 보는 제가 불편해지고 맙니다. 결국 자기만족을 위해 누군가의 고민을 청해 듣게 됩니다.


 고민을 잘 듣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냥 듣는 것도 어렵지만 '잘' 듣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그들은 타인의 즐겁고 밝은 이야기보다는 어둡고 우울한 감정을 더 많이 받게 됩니다. 쉽지 않은 일이지요. 그냥 듣기만 해서 되는 일은 아닙니다. 들으면서 동시에 공감과 반응까지 해야 합니다. 공감이 바라는 만큼에서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고민을 털어놓는 사람은 오히려 그에게 짜증이나 분노를 쏟아낼 수도 있습니다. 우스운 일이지요. 혼자서 어떤 반응을 기대하고는 그에 미치지 못하면 부정적 감정을 품게 된다니요.

 

 그렇기에 고민을 들어주는 사람은 속으로 깊어져야 합니다. 자신의 감정뿐 아니라 타인의 감정까지 담아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감정을 담아내는 그릇의 깊이가 깊어지고 용량이 커질수록, 그릇의 벽은 얇아집니다. 당연하지요. 한 사람이 담아낼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니까요. 얇아진 벽에는 쉽게 금이 갑니다. 작은 실금에서도 감정은 넘쳐흐르고, 워낙 많은 양의 감정이 담겨있으니 약간의 틈에도 주체할 수 없이 쏟아져 나옵니다. 주변 사람들은 그의 감정이 넘쳐흐르면 피해버립니다. 그런 걸 받아주던 사람이 막상 터져버리니 누구도 역할을 대신하려 하지 않습니다.


한 번씩 쏟아낸다고 해서 감정의 무게가 가벼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제 아무리 타인의 감정까지 잘 소화하고 담아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가장 무거운 것은 자신의 감정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차곡차곡 쌓아 담다 보면 자신의 감정은 맨 밑에 깔려있게 됩니다. 가장 깊고 가장 어두운 곳에서, 내 감정은 꾹 눌려 나날이 무거워집니다. 그렇게 묵은 감정은 그를 끊임없이 옭아매고, 표출되지 못하는 감정은 썩어갑니다. 고여있는 물이 썩기 마련이듯, 순환하지 못하는 감정도 썩어 악취를 풍기게 되지요. 그렇게 되는 순간 주변 사람들이 그를 떠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남깁니다. "너 변했구나."


 억울한 일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느라 챙기지 못한 감정이 새어 나온다고 해서, 좋지 못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니 말입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고민을 털어놓다가 떠나버리는 주변사람들에게는 잘못이 없습니다. 그냥 편하니까 털어놓았을 뿐이고, 어느 순간부터 불편해졌을 뿐이죠. 그렇게 생각하면 인간관계에 대한 회의감이 생깁니다. 문득 찾아오는 허탈함에 고독해집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그래서 무겁도 또 어렵습니다. 누군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어려워하며 시작하고, 조금 편해졌다 싶다가도 언제라도 쉽사리 무너질 수 있는 모래성 같은 관계이니까요.


 우리가 하루에 마주하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요. 출근길의 버스에서, 점심을 먹기 위해 들린 식당에서, 숨을 헐떡이며 땀을 쏟는 헬스장에서, 그냥 그렇게 보내는 하루의 모든 시간에 지나치는 사람은 얼마나 많을까요. 사람이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가벼울 수도 있는 일이고 그 무엇보다 무거울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렇게 사람을 대한다는 것의 어려움 속에 고민하다 보면, 관계 속에서 차마 행복을 바라지는 못할지언정,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또 상처를 입지 않으려 노력하며 생의 시간을 소진하게 됩니다.


그래서 참 아이러니합니다.


 시간이 흘러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이는데, 쉬워지긴커녕 점점 더 어려워지는 일이라니요. 반복하고 익숙해질수록 기술은 늘기 마련인데, 사람을 대한다는 것은 역시 기술보다는 우연과 요행에 가까운 것인가 봅니다. 새롭게 알게 된 이가 친절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나를 이용하려는 영악한 사람일 때도 있고, 공격적인 사람일 줄 알았는데 섬세하고 사려 깊은 사람일 때도 있습니다. 매번 낯설고 어려우며 적지 않은 시행착오를 반복하게 됩니다. 믿지 말아야 할 사람을 믿는 실수를 하기도 하고, 정말 괜찮은 사람을 미처 알아보지 못하기도 하지요.


 어느 모임에서 가장 가깝다고 여기던 후배가 알고 보니 저를 적대하던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며 저를 조롱하고 있단 것을 알게 된 적이 있습니다. 채팅창을 착각했는지 그가 다른 이들과 나누려 했을 저에 대한 험담을 모두가 함께 있는 대화방에 올렸을 때, 주체할 수 없는 분노와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가깝고 잘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사실은 생각하던 것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니 그에 대한 분노와 함께 스스로에 대한 원망과 후회가 물밀듯 몰려왔습니다. 또다시 사람을 대하는 일에 실패했다는 생각에 얼굴만 벌게져서는 차가운 말을 남기고 대화방을 나왔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같은 방에 있던 다른 이에게 문자가 왔습니다. 저녁에 시간 되면 치킨에 맥주나 한 잔 하자고 말이죠. 같은 모임에 참여하고 있어도 적당한 거리감을 느끼던 사람이었기에 의아함이 먼저 들었습니다. 갑자기 이 사람이 내게 왜 연락했나 하는 의문 뒤에는 그들과 한통속이면서 당황스러운 상황에 중재자로 나서려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도 생겼죠. 그렇게 화가 난 상황인데도, 오히려 관심이 없고 잘 알지 못했던 사람이기에 거부감보다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커지더군요.


일을 마치고 저녁이 되어 그를 만났습니다.


 퇴근 후 삼삼오오 모인 직장인들로 적당히 소란스러운 어느 호프집에 그와 마주 앉았습니다. 평소에도 수더분하던 그의 얼굴은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이 차분했습니다. "왜 만나자고 했어?" 메뉴판을 집어드는 그에게 대뜸 질문부터 던졌습니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답했습니다. "일단 주문부터 할게. 내가 살 거니까 맘대로 시켜도 되지?" 그는 손을 들어 점원을 부르고는 치즈가루가 잔뜩 뿌려진 치킨과 생맥 두 잔을 주문했습니다. 주문을 받은 점원은 금세 얼음장같이 차가운 500cc 생맥주 두 잔을 들고 왔습니다. 맥주잔을 받아 든 그는 손을 뻗어 잔을 내밀었고, 저는 퉁명스런 표정으로 제 몫의 잔을 들어 부딪히며 건배를 했습니다.


 참지 못하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래서 왜 보자고 했어?" 그가 피식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냥, 오늘 열 많이 받았을 것 같아서." 무심한 듯 건네는 그의 말이 당황스러웠습니다. "그게 다야?" "응. 그게 다야. 걔들 하는 짓거리가 웃겨서 나도 그 방에서 나왔거든." 순간 그를 경계하던 제 모습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잘 안다고 생각하던 이가 나를 힘들게 하고, 잘 알지 못한다 생각했던 이가 나를 격려하는 상황이 어이가 없다 못해 웃음이 나왔죠. 그렇게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다시 잔을 내밀며 말했습니다. "고맙다."


 어색하게 몇 마디를 더 나누며 한 잔을 비울 때 즈음 주문한 치킨이 나왔습니다. 사실 후라이드와 양념이 치킨의 전부라 생각했던 제게는 낯선 메뉴였습니다. 그런데, 그게 제법 맛있더군요. 갓 튀겨 나와 바삭한 튀김옷에 짭짤한 치즈가루가 묻어 차가운 맥주와 먹기에 좋았습니다. 포크로 찍어서 먹다가 생맥주를 석 잔쯤 비웠을 때는 그도, 저도 포크는 내려두고 손으로 닭을 집었습니다. 이상한 날이죠. 낯설게 생각하던 사람이 생각보다 훨씬 나를 아껴주는 사람이었고, 낯선 메뉴가 생각보다 맛있다는 것을 한 번에 알게 된 날이라니요.


 그 뒤로 그 친구와는 가까운 사이가 되었습니다. 알고 지낸 지 몇 년 된 사이인데, 그제야 친해졌다는 것도, 그렇게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는 것도 신기하기만 합니다. 언젠가 TV에서 봤던, 타인의 생각을 들을 수 있는 남자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가 떠오릅니다. 근육질 몸매의 멜 깁슨이 주연을 맡았던 것 같은데, 여성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 자신이 게이라고 속이던 장면이 인상 깊었죠. 영화의 결말이 어땠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타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삶은 어떨까요. 편할까요, 아니면 더 많은 상처를 받는 삶일까요. 사람이 내 마음 같지 않은데, 가끔은 마음 같지 않아 더 좋을 때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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