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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 Oct 22. 2024

#8 - 어쩌다 보면 어떻게든 됩니다.

- 왁자지껄한 펍에서 데킬라 한 잔

 재수를 했습니다. 정확히는 다니던 대학을 자퇴하고 반수를 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릴 때부터 학벌은 중요치 않다 생각했기에, 간판을 보고 그런 것은 아닙니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하고 싶은 공부가 있었기 때문이었죠. 처음 갔던 대학은 지방의 어느 한적한 곳에 있었고 인근 원룸은 월세 대신 한 번에 일 년 치의 임대료를 내는 연세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계약기간이 남은 방을 부동산에 내놓기 어려웠지요. 대학에 자퇴서를 내고도 방을 바로 정리하지 못했기에, 네 평 남짓한 그 작은 원룸에서 입시를 준비했습니다. 재수학원을 다니는 대신에 참고서를 쌓아두고 무료 인터넷 강의와 독학으로 공부하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혼자 작은 방에 틀어박혀 수험생활을 하는 건 쉽지 않았습니다. 모든 걸 혼자 해야 했기에 신경 쓸 일이 많았습니다. 꼬박꼬박 빨래와 청소를 해야 했고, 등만 돌리면 있는 침대의 유혹을 이기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먹는 것도 문제였습니다. 당연히 식사를 챙겨줄 사람도 없으니 짜장면을 한 그릇 시키거나 라면 한 봉지를 끓여 간단히 먹는 일이 잦았습니다. 나름의 살림을 꾸리며 생활비도 아껴야 했기에 가장 쉽게 찾은 것은 편의점 도시락이었습니다. 가격은 2천 원대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점심즈음 나가서 편의점에 들러 도시락을 두 개 사 오면 점심과 저녁을 해결할 수 있었죠.


 여러 유명인들의 얼굴을 걸고 출시되는 요즘과 달리, 그때는 편의점에서 파는 도시락은 배만 채우는 부실한 음식이라는 이미지가 강했습니다. 가장 저렴해서 자주 사 먹던 도시락만 하더라도 맨 밥에 볶은 김치 약간과 햄 두 장이 올라간 게 전부였죠. 먹고 나면 배는 불렀지만, 소화가 잘 되지 않아서 하루 종일 더부룩함을 느끼곤 했습니다. 괜히 밥이 더 뻑뻑하게 느껴져서 물을 끓여 같이 먹거나 마트에서 박스로 사다 둔 컵라면을 함께 먹기도 했죠. 그래도 감사히 생각하며 먹었습니다. 자장면 한 그릇 값이면 두 끼를, 치킨 한 마리 값이면 네 끼를 해결할 수 있었기에 가난한 자취생에게 그만한 가성비는 없었거든요.


말하는 법을 잊는 줄 알았습니다.


 집에 틀어박혀 지낸 지 두어 달쯤 지나니 사람과 대화를 나눌 일이 거의 없어지더군요. 공부에 집중하려고 주변 사람들과 연락도 거의 하지 않고 지냈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혼잣말이 늘었습니다. 어릴 때는 살림을 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엄마의 모습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제가 설거지를 하며 "밥풀이 왜 이렇게 안 떨어지냐~"고 흥얼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편의점을 가는 10분 언저리의 짧은 시간이 꽤 좋았습니다.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볼 수도 있고, 이곳저곳에서 들리는 말소리가 있고, 좁은 곳에 갇혀 있다가 탁 트인 곳으로 나오는 기분이었죠. 도시락을 계산하며 편의점 아르바이트생과 "2천8백 원입니다" "네. 여기 있습니다." 하는 대화가 하루 종일 나누는 대화의 전부인 날도 많았습니다.


 자취방에 다시 들어가 도시락을 전자레인지에 1분 조금 넘게 돌리고, 딱 혼자 쓰기 좋은 1인용 접이식 밥상에 앉아 밥을 먹으며 울컥 한 날도 많습니다. 고등학생 시절 엄마가 해준 밥을 먹으며 공부하던 게 얼마나 소중한 일이었는지 깨달았죠. 따돌림을 당하던 학교는 생각도 하기 싫었지만, 학교에 가면 만날 수 있던 몇 안 되는 친구들은 보고 싶었고요. 역시 사람은 없을 때 비로소 귀한 것을 알게 되나 봅니다. 그렇게 찾아온 외로움은 쉽게 가시지 않았습니다. 몇 년씩 고시촌에서 공부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고작 몇 달 가지고 엄살이냐며 스스로를 타박했지만, 어쩌겠습니까. 외로운 건 외로운 거죠.


 애써 달래 가며 꾸역꾸역 공부를 했습니다. 정말 열심히 했어요. 하루에 열 두 시간씩 공부를 했고, 한 달에 한 번 정도 버스를 타고 40분 거리에 있던 시내의 큰 마트를 다녀오는 게 유일한 즐길거리였죠. 힘들었습니다. 이제 막 자유를 만끽하려던 스무 살, 그것도 대학생활을 몇 달이라도 경험했다고 조금씩 놀 줄 알던 때에 족쇄라도 찬 것처럼 틀어박혀 공부만 하려니 얼마나 좀이 쑤셨겠어요. 늦은 밤 건물 옥상에 올라 별이 보이는 밤하늘을 보며 담배를 한 대 태우는 게 마음을 달래는 데 제법 도움이 됐습니다. 너무 힘든 날에는 친구와 통화를 하고, 가끔 기분 전환이 필요할 땐 캔 맥주를 한 캔 마시고 자면서 몇 달을 버텼습니다.


그렇게 본격적인 입시철이 다가왔습니다.


 수능을 보고 다시 대학을 가겠다 생각했지만, 한 편으로는 불안함도 들었습니다. 자취방에 옵션으로 있던 작은 TV로 매일 밤 9시 뉴스를 보곤 했는데 수시원서 접수가 시작된다는 보도를 봤지요. 노트북을 켜고 인터넷으로 막연히 목표로 하던 몇 곳의 학교를 찾아봤습니다. 따돌림을 당하고 방황하던 고3 시절 성적 관리가 하나도 되지 않았기에 만만치 않아 보였습니다. 원서비용도 싸지 않았습니다. 가계부를 열어 여윳돈을 계산해 보고는 딱 세 군데만 원서를 내기로 결정했습니다. 이것저것 준비할 게 많아서 사나흘 정도는 공부를 하지 않고 원서를 작성했습니다. 자기소개서를 쓰고 몇 가지 서류를 첨부하니 접수 마감일 전에 다 제출할 수 있었죠.


 얼마 뒤, 세 곳 중 한 곳은 떨어지고 두 곳의 서류전형에 합격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2차 시험은 한 곳은 논술이고 한 곳은 면접이었죠. 일정상 먼저 본 곳은 면접을 보는 학교가 먼저 있었습니다. 시간을 보니 면접 당일에 지방에서 올라가는 것이 빠듯할 것 같아서 하루 전날 서울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몇 달 만에 마주한 서울은 여전히 왁자지껄하고 활력이 넘쳤습니다. 분주한 도심을 마주하니 그 작은 방에서 도대체 무얼 하고 있나 하는 회의감도 문득 생기더군요. 미리 연락해 둔 친구와 홍대에서 만났습니다. 모처럼이니 긴장도 풀 겸 술도 한 잔 하고 싶었고요.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가볍게 한 잔 만 더 하자며 눈에 들어온 펍으로 향했습니다. 맥주나 칵테일 딱 한 잔으로 마무리하려 했는데, 아뿔싸. 마침 그 펍에서 데킬라 한 잔을 천 원에 파는 이벤트를 하고 있더군요.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지 못하듯 결국 우리는 데킬라를 몇 잔씩 시켰습니다. 금세 샷 잔에 담긴 데킬라와 넓은 접시에 담긴 레몬과 소금이 나왔죠. 사실 데킬라를 그날 처음 마셔봤습니다. 친구와 마주 보며 "이거 어떻게 먹는 거냐"며 이야기하다가 와이파이를 연결한 휴대폰으로 마시는 법을 검색하기도 했죠. 킬킬대며 웃다가 잔을 들어 목에 털어 넣으니 향긋함이 호흡을 타고 올라왔습니다.


결국 완전히 취해버렸습니다.


 싸다고, 또 맛있다고 몇 잔을 시켜 먹었던 건지 잘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달큼하면서도 입에 감돌던 상큼한 향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레몬과 소금은 또 어쩜 그렇게 잘 어울렸던지요. 목을 타고 내려갈 때 느껴지는 화끈한 열감에 낮은 도수의 술이 아니라는 걸 어렴풋이 짐작은 했지만, 소주의 두 배나 되는 것도 모르고 잘도 꼴딱꼴딱 마셨습니다. 오랜만에 친구와 수다를 떠는 것도 좋았습니다. 사실은 그날 모든 일 중 가장 좋았습니다. 외로움을 잊을 수 있었고, 살아있음을 느꼈죠. 그래서 더 많이 마신 것 같습니다. 평소처럼 울적하지도 않았고, 평소처럼 조용하지도 않았고, 평소처럼 혼자도 아니었으니까요.


 만취했으면서 용케도 숙소는 잘 찾아갔고, 수험표나 지갑 그리고 핸드폰 같은 것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제대로 곯아떨어진 덕에 늦잠을 잤다는 겁니다. 시간을 확인하고는 기겁하며 일어나서 나갈 채비를 했습니다. 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하고 면도도 하지 못했죠. 아침 일찍 미용실에 들러 머리를 자르려던 계획도 어그러졌습니다. 덥수룩한 머리에 듬성듬성한 수염, 온몸에서 풍기는 술냄새는 누가 보더라도 면접을 보러 가는 이의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무슨 술을 그렇게 마셨나 하고 자책하며 술냄새를 가려보려 편의점에 들러 구강청결제도 하나 샀습니다.


 학교에 도착하니 캠퍼스는 수험생들로 가득했습니다. 교복을 입고 책이나 자료를 들여다보는 학생들을 보며 제대로 망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와중에도 뭐가 나올지 모르는 면접인데 저 학생들은 무슨 책을 보고 있는 건가 하는 호기심이 들더군요. 제 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는 다른 학부모들의 시선을 느끼며 대기실에 입장했습니다. 점심 대신 생크림빵을 하나씩 나누어주었는데, 술기운이 오를까 싶어 먹지 않고 가방에 그대로 넣었습니다. 한 마디 말소리도 들리지 않는 대기실이 어색해서 보조요원으로 나와있던 어느 재학생과 시답잖은 대화를 잠깐 나누기도 했습니다.


의외로 떨리지 않았습니다.


 긴장을 풀겠다며 전날 마신 술이 머쓱하게도 긴장이 되지 않았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술이 덜 깼던 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한참을 앉아서 기다리다가 수험번호가 불리는 것을 듣고 면접장으로 들어섰습니다. 제 모습을 보고 당황하던 한 교수님의 표정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학생... 맞죠?"하고 묻는 그의 말에 "예. 그, 자퇴한 대학생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면접은 제법 잘 봤습니다. 긴장하지 않으니 청산유수처럼 답변도 잘 나오더군요. 면접은 5분 만에 끝났고, 캠퍼스를 빠져나오며 몰골이 이렇지만 않아도 합격했을 것 같다며 혼잣말을 했습니다. 한참을 걸려 집에 돌아가 바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딱 하루 일상에서 벗어난 생활을 했다고 외로움도 덜 하고 집중도 오히려 잘 되더군요.


 수시는 기대도 하지 않고 공부를 하다 보니 수능시험 날이 가까워졌습니다. 열흘 즈음 남겨놨을까요. 문자가 한 통 왔습니다. 면접 본 학교의 합격 문자였습니다. 기쁨과 허탈함이 함께 몰려왔습니다. 집에 전화를 걸어 합격 소식을 알리고 도시락을 사던 편의점으로 가 술을 몇 병 샀습니다. 그날 밤에는 돈 걱정 하지 않고 족발 세트를 시켜 포식을 하고 잠이 들었습니다. 아직도 10년도 더 된 그때를 생각하면, 전 날에 그렇게 많은 술을 마신 게 결과적으로 잘 된 일이었는지 아닌 지 헷갈립니다. 그렇게 많이 마시지 않았다면 다른 수험생들처럼 잔뜩 긴장하고 버벅거려서 합격하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도 들고요. 꾀죄죄한 모습으로 재수생이라 밝힌 저를 면접장에 앉아 있던 교수님들이 어여삐 봐준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요즘도 가끔 펍에 가면 데킬라를 시킵니다. 한 병에 6~7만 원쯤 하는 데킬라를 주문하면 라임과 소금이 함께 나오지요. 원래 레몬이 아니라 라임에 주로 마신다는 것도 나중에서야 알았습니다. 왁자지껄한 펍에 앉아 일행과의 대화나 주변의 소음에 흘러가는 대로 맡기면, 늘 한구석에 갖고 다니는 외로움이 잊힙니다. 가시 돋친 용설란으로 술을 만들면 이렇게 향긋하다는 걸 누가 알았을까요. 처음 데킬라를 빚은 사람도 어쩌다 보니 어떻게 잘 풀린 게 아닐까 생각하며 샷 잔 입구에 라임을 묻히고 다시 소금을 찍어 데킬라를 채웁니다. 세상 살이 쉬운 일이 정말 하나도 없지만, 어쩌다 보면 어떻게든 풀리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덜 외롭고 덜 힘들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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