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내게 위로 10화

그래도 뺨은 좀 아프더라

잠시 20년 전으로 돌아간 이야기

by 낙유

조금 일찍 퇴근한 탓에 아이 유치원 하원 시간에 맞춰 직접 데리러 갈 수 있게 되었다. 평소에는 장모님께서 아이의 유치원 등원과 하원을 도와주시는데 나의 퇴근시간이 이른 날이면 직접 데리러 갈 수가 있다.

오후 회의를 마치고 퇴근을 준비하는 무렵에 동료로부터 갑자기 비가 올 수 있다는 소식을 들어 가벼운 마음으로 3단 우산 하나를 가방에 챙겼다. 회사를 나서자마자 가냘픈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이 보인다. 지하철 역이 멀지 않기에 오는 듯 안 오는 듯하는 비실비실해 보이는 비실비를 그냥저냥 무시해 가며 걷는다. 아이를 데리러 갈 생각에 약간의 설렘과 들뜬 마음으로 지하철에서 내렸는데 시간이 조금 남아 지하철 역 의자에 앉아 책 한 권을 살포시 꺼내어 읽는다. 혹여나 삼매경에 빠질까 싶어 자꾸 시계를 들춰보며 일어날 채비를 한다. 지하철역 출구에 가까워질수록 지하철을 타기 위해 들어오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분주하니 비가 오는구나 생각한다. 적당한 비가 내리고 있기에 우산을 챙기도록 도와준 동료에게 마음속으로 감사인사를 하고 아이 유치원으로 걸어간다. 그런데 퇴근시간만 해도 비실비실하던 비가 갑자기 점점 굵어지더니, 급기야 바람까지 불어 하늘이 아닌 옆에서 뺨을 때리기 시작한다. 아이가 우산을 챙겨서 등원했길 바라는 마음이 들지만 아침에는 해가 쨍쨍했기에 그랬을 리 없다는 생각을 한다.

'아이 우산이 있으면 다행이고, 없으면 어쩔 수 없다.'


아이들 하원 시간에 맞춰 항상 같이 인사하시는 원장 선생님께 어색한 인사를 하고, 아이를 기다리며 밖에 있는 우산꽂이를 봤는데 역시나 우산이 없다. 시야가 흐려질 만큼 비가 오는데 설상가상으로 아이가 타고 온 씽씽이도 보인다. 3단 우산 하나로 한 손에는 우산과 내 가방을 들고, 한쪽 어깨에는 아이 가방을 메고, 한 손으로 씽씽이를 들고 아이와 같이 집까지 온전하게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고민하던 찰나에 아이가 나온다. 덩치보다 더 큰 가방을 축 늘어지게 매고 둘레둘레 걸어온다. 표정이 좋지 않은걸 보고선 그제야 생각이 났다. '아빠 다음에 비 올 때 차 타고 데리러 오면 좋겠어.' 다른 부모님들이 아이들을 차에 태워 하원하는 것이 내심 부러웠던 모양이다. 아이는 비가 오니 아빠가 차를 타고 왔는지 걸어왔는지 눈치를 보며 살피는 것이었다. 저 약속을 몇 번이나 했는데 한 번을 지키지 못했거늘, 하필 또 지금 비가 오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의 첫마디는 아빠를 보고도 한참 후에야 나왔다. 고개를 푹 숙이고 신발을 신으며 '아빠 차 타고 왔어...?' 하며 땅이 꺼져가는 목소리로 나지막이 묻는다. 이번에도 집에 들르지 못했다는 핑계로 다음을 약속한다. 서운한 표정을 감추는 아이의 미소와 빗소리를 들으며 한없이 작아지는 나를 느낀다. 감정을 숨길만큼 부쩍 커버린 듯한 아이. 차라리 우산을 챙기지 않았으면 집에 들러서 차를 타고 갔을지도 몰랐을 텐데. 가방에 책이라도 없었으면 비가 더 많이 내리고 있음을 빨리 알고 차 생각이 났을지도 모를 텐데. 이러니 비가 뺨을 때리던 것이 그럴만했고 어쩐지 오늘따라 아프더라. 미끄러져 엉덩방아라도 안 찧은 게 다행이라 생각해야 하나 싶다.

어쩔 수 없이 아이에게 씽씽이를 타게 하고 우산을 씌어주며 걸어가 보는데 10미터를 채 가지 못하고 나무 아래로 몸을 피한다. 이렇게 무섭게 내리는 비는 우산이 정말로 아무 의미가 없다. 말소리조차 가려버리는 투박한 비의 한가운데 있는 이 순간과 고여있는 물웅덩이를 그대로 밟으며 첨벙첨벙하는 아이를 보니 웃음이 났다.


약 20년 전 고등학생 시절에 토요일 하교 후 세차게 비가 내리던 어느 날, 친구 2명과 함께 걸어가는데 우산이 없는 친구가 있었다. 처음에는 우산을 같이 쓰고 가다가 바지도 젖고 어깨에도 빗방울이 떨어지니 결국 세명 다 우산 쓰기를 포기하고 그대로 걸어가기로 했다. 한 명은 비를 안 맞고, 두 명은 애매하게 자꾸 맞으니 셋 다 시원하게 맞기로 한 것이다. 시원하게 젖은 마당에 고여있는 물 웅덩이를 그대로 밟고 가기는 기본이었고 웅덩이만을 골라가며 뛰면서 물을 튀어내 보이기도 했다. 그때 나누었던 대화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진짜 신난다, 우리 정말 어릴 때로 돌아간 것 같다.'라는 말이다. 어느 나이 때에도 당장의 나는 다 컸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면 한없이 어렸고 한없이 몰랐고 한없이 순수했음을 깨닫는다.


이 순간에 우산을 접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내 새끼에게 아빠와 같이 비를 맞자고 할 수는 없으니, 3단 우산을 아이에게 주고 나는 20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온몸으로 비를 맞기로 한다. 아이는 몸보다 큰 우산을 높이 들더니 '아빠도 씌워주려는데 여기까지밖에 안 올라가네?' 하며 웃는다. 두 손으로 들어도 무거울 우산을 아빠도 씌워주고 싶다 하니 세상 부러울 것 하나 없는 순간이다. 나도 신이 나서 연신 같은 말을 내뱉는다. '우와 비 진짜 진짜 많이 온다. 공주야, 재밌지?' 하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모든 사람들이 비를 피하며 걷기를 멈추었는데 나와 딸아이만 비와 하나가 되어 집까지 걸어갔다. 물 웅덩이를 골라 밟으며 가기는 기본. 집 바닥이 한강이 되었음은 당연지사.

다음에 아빠가 데리러 갈 때는 비가 오던 안 오던 무조건 차를 타고 데리러 가기로 약속했다.


잠시 20년 전으로 돌아가니 마음이 푸근하고 따듯하다. 엄청난 비와 부쩍 커버린 듯한 아이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그래도 뺨은 좀 아프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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