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앞 칼국수 집의 땡초다대기 활용법

점심시간 잡담 노하우

by 바그다드Cafe

주의: 이 글은 절대 먹방 콘텐츠가 아닙니다. 모든 직장인의 직장생활이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직장인 커뮤니케이션(잡담) 노하우를 전달하는 콘텐츠를 담았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절대 먹방 콘텐츠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게 보일 수는 있습니다.


직장인 퀴즈! 직장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간이자, 가장 부담스럽고 힘든 시간은? (이 무슨 난센스 스핑크스 문제란 말인가. 하지만 정답은 있다. 스핑크스 문제의 답이 사람인 것처럼 이번 정답도 사람과 관련 있다. 다 사람이 잘먹고 잘살자고 하는 일이다.)


정답은 바로 점심시간인데, 직장 상사와 함께하는 점심시간이다. 직장 상사 중에서도 사장님과 함께하는 점심시간이다.


나는 종종 점심시간에 회사 사장님과 함께 밥을 먹는다. 다른 직원이나 임원과 함께 먹을 때도 있고, 둘이서만 먹을 때도 있다. 사장님은 좋으신 분이나 함께 밥을 먹으면 조금 불편하다. 그도 그럴 것이 나와는 나이차이도 20년 이상 나고, 회사 얘기를 빼면 딱히 함께하는 주제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장님: 김차장, 아기가 몇 살이고?

나: 34개월 됐습니더.

사장님: 힘들겠구먼.

<끝>


또 예를 들어,


사장님: 김차장, 프로젝트 회수금 받았나?

나: 네, 차질없이 받았습니더.

사장님: 수고했구먼.

<끝>


또또 예를 들어,


사장님: 김차장, 지난 연휴에 머했노?

나: 34개월 된 아이 봤습니더,

사장님: 고생했구먼.

<끝>


이러다 보니, 사장님과 둘이서 함께 하는 점심시간은 조금 어렵다. 하지만 이 땅의 직장인으로 태어나 조금 어렵다고 피할 수 있겠는가? 피할 수 없으면 그냥 해야지.


며칠 전 사장님과 단 둘이 점심을 먹으러 갔다.


사장님: 김차장, 점심 메뉴 머가 좋노?

나: 네, 사장님. 칼국수... (나는 사장님이 면과 얼큰한 국물 요리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장님: 가세.

나: 넵!

<끝>


회사 앞 칼국수 집에 가서는 사장님과 나는 각자 마음에 드는 칼국수를 시켰다. 그리고는 또 침묵. 바로 그때, 나는 잠깐 자리에서 일어나 셀프코너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리고는 고추다대기가 담긴 통을 들고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고추다대기가 있는 셀프코너. 김치와 단무지도 셀프로 가져올 수 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고추다대기가 담긴 통을 살짝 올려놓았다. 사장님이 물으셨다.


사장님: 이게 머꼬? (그렇다. 우리 사장님은 경상도 출신에 경상도 사투리를 찐하게 사용하시는 분이다)

나: 네, 사장님. 매운 고추다대기 양념장인데, 고마 고추를 잘게 썰어 넣어서 칼국수에 다가 조금 올려 넣으면 맛있습니더. 이거는 아는 사람만 가져와서 묵을 수 있습니더. (그렇다. 상대방이 경상도 사투리를 사용하면 나는 더 심하게 사용한다)

사장님: 매운 꼬추라꼬? 땡초아이가 땡초. (경상도에서는 매운 고추를 땡초라고 부른다)

나: 맞습니다. 땡초!

사장님: 함 무보자. (한번 먹어보자)

매운고추 다대기(양념장). 일명 땡초 양념장

땡초 다대기를 칼국수에 넣어드신 사장님은 매우 만족해하셨다. 그리고는 갑자기 말씀이 많아지셨다.


'내가 을라 때는 즌쟁이 막 끝나가꼬, 물게 많이 없었던기라. 그래서 우리 어무니가 반찬이 없을 때... 땡초를 이래 간단하게 쫑쫑 써리가 양념해가꼬, 밥이랑 비비즣든기라... (통역하자면, 내가 어렸을 때 한국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먹을게 많이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가 반찬이 없으면 매운 고추에 양념을 조금 해서 밥에다가 비벼 주셨다...)'


그렇게 사장님은 칼국수에 땡초 다대기를 올려 먹으셨다. 옛날 생각이 나셔서 그랬는지, 아니면 땡초가 매워서 그랬는지 사장님의 크고 맑은 눈(진짜 우리 사장님은 눈이 크고 맑다. 일명 '소 눈')에 눈물이 언뜻 비친 거 같았다. 아니면 노안이라서 그런 건가... 어쨌든 이번 칼국수 땡초 다대기 점심은 완전 성공적이었다. 사장님께서는 점심 먹는 내내 땡초에 얽힌 얘기를 들려주셨다. 하지만 칼국수를 입에 넣고 얘기를 계속하셔서 사실 잘 들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다. 사장님께서 기분 좋게 칼국수 한 그릇을 호로록 후루룩 다 드셨으니깐. 땡초의 마법이다.


땡초 다대기를 살짝 올린 칼국수. 너무 많이 올리면 진짜 맵다.


그렇다면, 나는 땡초 다대기가 셀프 코너에 있는지 어떻게 알았을까? 별 거 없다. 원래 내가 호기심이 좀 많다. 지금은 나이 들고, 병들고, 34개월 된 우량아도 키워야 해서 제약이 있지만, 그럼에도 주어진 여건 내에서는 마음껏 호기심을 부리려고 노력한다. 처음에 회사 앞 칼국수 집에 갔을 때도 일부러 셀프코너에 가서 둘러보고, 진짜 고추다대기가 있는지 저 양철 뚜껑을 열어봤고, 진짜 고추다대기가 있길래 가져와서 칼국수에 넣어서 먹어봤다. 그랬더니 진짜 매콤하고 맛있어서 기억창고에 넣어놨을 뿐이다.


당신, 직장인, 커뮤니케이션을 잘하고 싶은가? 잡담을 잘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회사 앞 칼국수 집의 땡초 다대기 양념장을 잘 활용하자.




p.s. 이렇게 끝내기는 아쉬워 권여선 작가님의 <오늘 안주 머 먹지?>에서 땡초를 묘사한 부분 중 인상적이었던 부분을 발췌했다.



내가 여름에 냉장고에 항상 넣어두고 먹는 음식으로는 '호박잎쌈과 깡장' '양배추쌈과 고추장물'을 빼놓을 수 없다. 이 두세트의 음식이 없다면 어찌 여름을 날까 생각조차 하기 싫다. 두 음식에는 어김없이 매운 땡초가 들어간다. 들어가는 정도가 아니라 땡초가 주재료나 다름없다. 그것도 매운지 만지 한 겨울 땡초도 아니고, 미적지근하게 매운 봄가을 땡초도 아니고, 보기만 해도 속에 꽉 들어찬 매운 기가 섬뜩하게 발산되는 작고 야무지고 반들반들 윤이 나는 한여름 땡초다. 땡초에 조금씩 독이 오르는 속도로, 그렇게 살벌하게 매력적인 걸음으로 여름은 내개 온다. 점점 절정을 항해 치달려가는 땡초의 독한 맛이 없다면 어떤 여름도 있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