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otion _Social _3. 갈등
'갈등' 하면 어떤 생각이 먼저 들까? 그다지 긍정적은 아니다. 그 인간, 그 놈 혹은 그녀와의 안 좋은 기억이 떠올라 눈살이 절로 찌푸려지기도 한다. 불필요한 감정소모가 생기고 종종 갈등을 봉합하지 못해 파국으로 치닫는 등 부정적 결말의 주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연인이든 친구사이든 회사 생활이든 인간이 만들어내는 모든 관계에서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갈등은 위기의 상황에서 더 도드라진다. 평소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막상 위기가 닥치면 서로의 이해관계가 충돌되는 지점에서 그 본색이 드러난다. 사적, 인간적 교류보다 공적, 경제적 교류를 위해 만들어진 회사에서라면 개인 간, 부서 간 갈등은 피하려야 피할 수 없다.
특히 '나는 절대로 틀릴 리가 없는 사람'이라고 믿는 거만할 리더들이 득실거리는 조직은 갈등의 온상이나 다름없다. 자신의 입장, 이익, 욕구만이 앞서는 이기주의까지 더해진다면 빼박이다. 어느 한쪽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다 쳐도 남는 것 상처 뿐이다. 회사라는 전체의 합으로 보면 반드시 마이너스가 된다. 그 결과는 아무리 잘 쳐줘도 두 당사자간의 공멸 혹은 전체의 패배다.
그렇다면 갈등은 어떤 식으로든 애초에 생기지 않는 게 좋은 것일까? 이를테면 갈등의 무균실을 만들어 그 안에서만 관계를 맺고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인식 속에 천년만년 유지해 나갈 수 있다면 말이다. 미국의 위대한 투자가이자 헤지펀드 매니저, 브리지워터 어소시에이츠 CEO인 레이 달리오는 이와 관련해 전혀 생각이 다른 모양이다.
"갈등은 생산적이다. 갈등을 피하려 하지 마라, 그리고 논쟁에서 이기려고 하지 마라. 내가 틀린 상황은 매우 가치 있는 경험이다. 한 가지라도 배우지 않았는가?"라고 말했는데 이는 갈등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수많은 컨설턴트들이 공통으로 주장하는 명제이기도 하다.
갈등은 양날의 검이다. 이왕 없앨 수는 없는 기본 값이라면, 어떻게 이 갈등을 활용할 것이냐? 의 문제에 골몰하는 게 더 생산적이다. 갈등을 기회로 여기고 서로의 입장을 고려해 상호작용할 때, 생각지도 못했던 해결책을 발견해 서로 win-win 하는 해피엔딩으로 이어진 증거와 사례는 셀 수 없이 많다. 혹 실패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얻는 통찰 역시 상당하다.
웹툰 [미생]의 한 장면.
영업부장은 재무부장과 대치중이다. 영업팀에서 올린 업체 선정 기안이 재무팀에 묶여 있는 탓이다. 재무팀은 숫자적으로 부실한 부분이 있으니 이를 채워 넣거나 업체를 아예 교체하라는 입장이다. 영업팀은 이미 업체 검토를 끝냈고 더 이상 대안은 없다고 사정해 보지만 재무부장은 완강하다. 영업팀도 이 건 때문에 발목이 잡혀 일이 진척이 안 된다.
영업부장은 기분이 상한 채 사무실로 돌아와 오 차장에게 문자를 보낸다
[자네가 재무팀 부장 좀 만나고 와]
오 차장은 뜨악해하면서도 먼저 재무팀 사람들에게 연락한다.
"김 과장. 난데. 자네 팀 요즘 별일 없나?"
"박 차장, 부장님 요즘 스트레스가 많으시다며?"
몇 차례 통화를 통해 재무부장이 신재생 에너지팀과 갈등 상황이라는 정보를 사전에 입수한다.
미팅룸.
오 차장은 커피 한잔을 탁자에 놓아두고 재무부장을 맞이한다.
눈앞의 커피를 멀찌감치 밀어내고 맞은편에 앉은 재무부장.
"자꾸 이렇게 졸라 봤자인데..."
"조르다뇨. 그렇지 않습니다"
오 차장은 신재생 에너지팀과의 이슈를 먼저 꺼내며 재무부장의 입장을 거든다. 재무부장은 기다렸다는 듯 이야기를 쏟아내고 오 차장은 경청한다. 중간중간 추임새도 넣고 맞장구도 친다. 한참을 격정적으로 감정을 토로하던 재무부장. 문득 자신이 제쳐둔 커피잔에 시선이 간다. 손을 뻗어 제 앞으로 가져온다. 그리고는 한 모금 마신다.
"음...맛 좋은데요? 자 그럼 투덜거림은 이 정도로 하고 업무 이야기 할까요?"
"아닙니다. 듣고 보니 저희 역시 이해와 설득에서 좀 서툴렀던 것 같습니다. 다시 준비해서 찾아뵙겠습니다."
"일단 봐요..."
오 차장은 검토 자료를 건넨다
"문장이 눈에 들어오네요..."
어떻게 깐깐한 재무부장을 설득했는지 묻는 장그래와 김동식 대리.
"나는 정말 들어보고 안되면 다른 업체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었거든."
상대의 입장에서, 진정성을 가지고 일이 되게 만들 줄 아는 사람. 정말로 무서운 사람이다.
갈등은 그렇게 서로 win-win하는 해피엔딩의 재료가 된다.
갈등은 기회다
우물 안 개구리라는 말이 있다. 좁은 우물에 처박혀 그 안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살아가는 편협한 사람을 일컫는 속담.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발칙한 의문이 생긴다. 개구리인 상태로 우물밖으로 나오는 건 괜찮을까? 굶주린 독수리, 뱀, 오소리들이 득실거리는 바깥세상에서 세상 물정 모르는 개구리는 과연 살아남을 수나 있을까? 우물 안에 있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개구리인 것이 문제가 아닐까?
갈등은 자신의 세계와 타인의 세계를 충돌시키는 일이다. 원시지구와 충돌한 외계의 혜성들이 일으킨 화학작용이 생명탄생의 발원이라는 과학적 가설을 감안하면, 갈등으로 인한 사회적 충돌은 좁은 시야에 갇혀 있는 개구리와 같은 존재를 변화시키는 원천이 된다. 말하자면 갈등을 포함한 관계의 희로애락은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나 자신의 내면과 외연을 확장하는 일이다. 이는 어떤 방식으로든 충돌이라는 이벤트 없이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내 연인과 친구와 동료와 갈등이 생기면 내심 기뻐하라. 내가 못 봤던 내 모습과 그동안 미뤄뒀던 상대의 내면을 진지하게 알아보고 탐험할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겨라. 현재에 머무르지 않고 더 확장된 세계로 향할 수 있는 다리가 놓였다고 생각하라.
갈등은 배움의 장이자 나를 확장할 절호의 기회다.
마중물을 넣고 기다려라
현역시절, 리더급 워크샵을 주최하면서 '마중물 세션'으로 이름 붙인 사전 프로그램을 진행한 적이 있다.
1)회사에 대한 불만 2) 리더십을 발휘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장애요인 3) 당장 회사와 경영진에 바라는 바
이 세 가지 주제를 준비해 자유롭게 토론하도록 기회를 준 것. 시간은 두 시간. 리더십 전체 과정 총 8시간 중 1/4을 마중물 세션에 배정했다.
당시 회사는 그룹 오너의 잘못된 투자결정과 마침 불어닥친 중국발 위기로 5년 연속 적자를 기록하며 '생존'의 위기에 내몰린 상태였다. 그 피해는 현장 리더들에게 고스란히 전가되었는데, 책임은 늘고 권한은 대폭 축소됐다. 두 차례의 구조조정으로 인력난도 심해졌다.
리더들은 회사가 망가진 책임을 오너와 경영진들이 아닌 자신들에게 떠넘긴 조치라며 반발했다. 사사건건 회사와 경영진에 날을 세웠고 경영진의 몸 받은(그렇다고 믿는) 인사, 조직문화팀과도 불화했다. 회사=경영진=인사팀(사무직)이라는 인식 속에 우리와 그놈들로 나뉘어 서로를 반목하고 부서 이기주의는 극에 달했다.
현장에서 이들과 직접 회사의 오더를 실행해야하는 조직문화팀 입장에서는 마치 전전긍긍 살의를 품은 적대국과의 전선에 나가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겉으로는 서로 웃고 넘겼지만 뒤에서는 쌍욕을 뱉기 일쑤였다. 모든 제도와 정책, 메시지와 조직문화적 활동들에 영이 서지 않고 표류했다. 패배주의, 냉소, 불신, 보신주의, 부서이기주의가 팽배했다.
그런 상황에 리더십 과정을 진행하라니? 허를 찌르는 수밖에 없었다. 먼저 판을 깔고 속마음을 터놓게 하는 것이 먼저라고 판단했다. 마중물 세션을 설명하며 여기서 나온 모든 의견은 익명으로 전달되고 그 어떤 불이익도 없을 것 이라며 다독였다. 내 직책을 걸고 약속하겠다 확언해 주었다.
"그냥 두고 보려고 했는데, 회사가 이렇게 하면 안 되는 거죠...이왕 판이 깔렸으니 속시원히 한번 말해봅시다. 어디..."
불신의 눈초리로 머뭇거리고 말을 아끼던 리더들은 누군가의 첫 발언을 시작으로 속속 불만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두 시간이 넘도록 회사와 경영진의 잘못을 조목조목 지적하는 성토가 이어졌다. 나는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고 모든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때로는 맞장구도 치며 그들의 편에서 들으려 노력했다. 계획된 두 시간이 지나도록 열기는 가시지 않았고 강제로 쉬는 시간을 부여하기 전까지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질주했다. 결국 휴식 시간 이후 30분의 시간을 추가로 주기로 했다.
"그래요. 뭐 회사도 경영진도 좋아서 그랬겠습니까?"
휴식 후 이어진 세션의 분위기는 거짓말처럼 뒤바뀌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마음껏 속마음을 털어놓은 리더들은 마침내 마음을 조금 열었다. 앉은 자세부터 달라졌다. 얼굴을 붉히며 목청을 높이던 그들이 차분해졌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어떻게 하면 좋을지, 건설적 대안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아주 작은 관점의 전환. 그들의 속마음부터 듣겠다는 '마중물'이 기대 이상의 변화를 이끌어냈다. 물론 그 세션 한 번으로 모든 문제가 일거에 해결되고 회사와 현장의 사이가 급격히 좋아졌을 리 없다. 여전히 회사와 현장은 삐걱댔고 한동안 대립과 갈등은 이어졌다. 그러나 불신과 비아냥, 냉소로 일관했던 조직문화 활동에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으려 했다는 진정성이 전해지며 약간의 우호적 시선을 얻을 수 있었다.
내 요구를 먼저 내세우고 강하게 주장할수록 이미 틀어진 관계에서 반발심리는 더 커지게 마련이다. 외려 원하는 것에서 더 멀어질 뿐이다. 자신이 바라는 바가 명확한 상황에 대뜸 자신의 요구부터 들이미는 상대가 곱게 보일리 없다. 여기서 밀리면 손해라는 대결 양상으로 치달으면 어떻게든 맞받아치려는 저항력만 커질 뿐이다. 상호작용이 아닌 극한 대립의 끝은 대개 win-win이 아니라 lose-lose의 새드 엔딩이 되고 만다.
마중물을 넣고 기다려라. 혹여 전혀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어도 일단 묵묵히 경청하라. 그들이 다 털어놓고 나면 그때 마음의 빗장이 비로소 열리고 본심이라는 저 깊은 곳 지하수가 콸콸 쏟아져 나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