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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릭스 leex Aug 13. 2024

[신입의 직격] 3루에서 태어났으면 운에 감사하라

Ⅰ장. 直격_ 자기관리 3_ 운

40대 이전까지 내 인생은 대체로 무난한 편이었어. 큰 성공도 그렇다고 감당 못할 좌절도 없이 인생의 변곡점들을 비교적 스무스하게 넘어왔던 것 같아. 무색무취의 초중고 시절을 보냈고, 엄청 좋지도 그렇다고 또 나쁘지도 않은 인서울 대학에 들어갔고, 서울 근교 모사령부에서 나름 꿀보직으로 군생활을 했고, 대학 졸업 후에는 1년의 공백이 있긴 했지만 엄청 좋지도 그렇다고 또 나쁘지도 않은 회사에 들어가 17년을 일했으니 평균 이상의 삶이었다고 봐도 무방하지


다들 그렇게 사는 줄로만 알았어. 그런데 45세에 자의 반, 타의 반 퇴사를 하고 4년이 넘도록 반백 생활을 이어가면서 삶을 반추해 보니 이제야 알겠더라고


"운이 좋았던 거구나"


참으로 다양한 성장배경과 성격과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한 곳에 모인 회사라는 소사회에서 나 같이 까칠하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17년이라는 시간을 버텨낸 데에는 크고 작은 '운'이 따르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거라는 결론에 도달했어.


물론 불운도 있었지. 퇴사직전 2~3년은 개인적으로 최악의 시기였어. 회사 사정이 급격히 나빠졌고 수차례의 구조조정으로 내부 분위기는 그야말로 살벌해졌지. 조직문화 책임자로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한계를 느끼고 손을 놔버린 시점이기도 했고, '의도'하지 못하는 성격 탓에 이런저런 구설수에도 휘말려 몸과 마음이 피폐해졌어. 그 사실을 그때는 미처 몰랐지. 그저 제 앞가림에만 급급한 경영진에 대한 분노, 내 진심을 알아주지 않는 주변인들에 대한 실망 따위 모든 것이 그저 환경 탓, 남 탓일 뿐이었어


지금 돌아보면 불운을 합리화의 도구로 악용했던 것 같아. 하필 그 시점에 칼 세이건의 '창백한 푸른 점'에 대해 알게 된 것도 한몫했지.


"...저 점이 우리가 있는 이곳입니다. 저곳이 우리의 집이자, 우리 자신입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당신이 아는, 당신이 들어본, 그리고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사람들이 바로 저 작은 점 위에서 일생을 살았습니다... '슈퍼스타'나 '위대한 영도자'로 불리던 사람들이, 성자나 죄인들이 모두 바로 태양빛에 걸려있는 저 먼지 같은 작은 점 위에서 살았습니다."


이 지점에서 확 하고 꽂혔던 것 같아. 그래 그 대단한 사람들도 고작 먼지 한 톨 보다 작은 푸른 점 위에서 지지고 볶다 그렇게 가는 거구나. 싶었어. 그때부터 사람이 염세적이 되더라고.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100년 이상 살 수 있나? 돈과 명예를 거머쥔 사람도 알 수 없는 이유로 스스로 목숨을 저버리기도 하고.


문제는 염세적인 사람은 노력도 하지 않게 된다는 거야. 일종의 체념 같은 거랄까? 어차피 회사는 이모양이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고 그냥 운이 없었을 뿐이라고 단정해버리니 아무 일도 하기 싫더라고. 만사 부정적이 되고 마치 투덜이 스머프처럼 돼버렸지. 임원들에게도 할 말을 다한다는 명분으로 감정적인 대응으로 일관하고 제무덤을 파기 시작했지


그 사이 내 실력은 제자리에서 맴돌았어. 어차피 아무리 열심히 해도 변하지 않을 거 열심히 해서 뭐 하나? 퇴근 후 술자리를 만들어 폭음을 하며 불평하고 누군가를 씹고 그런 비생산적인 일에만 열심이었지. 결국 남은 건 건강악화와 무기력뿐이었어


그 상태로 "더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라고 대표와 임원들 앞에서 선언해버린 순간, 내게 남아 있던 마지막 운까지 모두 사라졌던 것 같아. 그해 연말 팀은 해체됐고 나는 마케팅 팀 일반 팀원으로 발령이나 한 달 후 퇴사하고 말았으니까


운이 없었을 뿐, 내 실력이 모자랐을 뿐 긍정적 인식을 갖고 뭐라도 해보려고 노력하고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애썼다면 어땠을까? 운은 스스로 준비된 사람에게 찾아온다고 하지. 준비는커녕 모든 것을 놓고 탓탓탓만 하던 나에게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몰라




마키아벨리의 유명한 저서 [군주론]에는 '포르투나'와 '비르투스'라는 개념이 등장해

포르투나는 운명의 여신인데, 한쪽발은 육지의 공위에 또 다른 발은 배 위에서 한쪽팔로는 돛을 받치고 있는 여신의 외양을 묘사해 운명은 어떻게 될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는 명제를 명확히 제시하고 있지


마키아벨리는 포르투나는 비르투스에 의해 다스려진다고 했는데, 비르투스는 의역하자면 강인함, 밀어붙이는 완력 등을 뜻해. 운명의 힘은 강력하지만, 그 운명이 어디로 흐를지는 알 수 없고 이를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은 비르투스라고 주장하고 있어


나는 이 대목을 이렇게 해석해. 비르투스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실력을 뜻하고 실력을 쌓다 보면 행운이 찾아왔을 때 그것을 알아보고 캐치해서 더 큰 성공에 이를 수 있게 된다 라는 메시지로 말이야


군주론은 '악마의 지침서'로 불릴 만큼 시대와 국가를 초월한 요서로 불리지. 요즘 시대에 들으면 헉! 할만한 노골적이고도 위험한 주장들이 곳곳에 들어있기 때문이야

군주는 사랑받는 대상보다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이 낫다 - 17장
군주는 사자의 용맹함과 여우의 교활함을 갖춰야 한다 - 18장


히틀러와 무솔리니 등 근대 최악의 독재자들이 애독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악명은 더 높아졌지. 그러나 [군주론]은 당시 마키아벨리가 살았던 중세 피렌체라는 도시국가의 주변 상황을 감안해서 보지 않으면 오해가 생길 여지가 클 수밖에 없어. 프랑스, 스페인, 신성로마제국 등 강대국에 둘러싸여 언제 외세에 침략당할지 모를 피렌체가 모국이었던 만큼, 적어도 그들과 상대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일시적으로 공포정치를 표방하더라도 강력한 군주가 나타나길 바랐던 거지


실제 [군주론]에도 어지러운 정세를 단번에 제압해 외세의 위협에 대처할 수 있게 됐다면 공포 정치는 단 한 번에 그치고 자애로운 정치를 펼쳐야 한다라고 못 박고 있는 사실을 대부분 간과하더라고


[군주론]의 모델이 된 체사레 보르자는 교황 알렉산드르 6세의 아들로 강인함의 상징과도 같은 자였어. 마키아벨리는 체사레 보르자를 따라 전장을 누비며 상대적으로 약했던 교황군이 어떻게 적들을 복속시키는지를 세심히 관찰했어. '사자와 같은 용맹, 여우와 같은 교활함을 배워야 한다'라는 말은 바로 체사레 보르자의 강력한(어찌 보면 공포스러울 정도의) 리더십을 통해 얻은 깨달음이었지

  

그렇게 승승장구할 것 같았던 체사레 보르자는 1503년 알렉산데르 6세가 말라리아로 인한 고열과 구토로 쓰러져 선종하면서 꺾이기 시작했어. 나라에서 추방당하고 적들에 쫓기는 신세로 전락해 1507년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돼


[군주론]의 또 다른 모델로 알려진 율리오 2세는 로마를 포함한 교황령의 정치적 안정과 독립을 획득함으로써 교황의 권위를 강화하는 데 성공했어. 교황령 확장을 목표로 직접 갑옷을 갖춰 입고 선봉에 서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던 호전적 교황이었던 율리오 2세 역시 운명 앞에 무기력했어. 1513년 매독으로 선종하면서 이탈리아반도의 독립과 통일의 꿈은 끝내 이루지 못했지


아무리 용맹하고 뛰어난 군주, 업적이 뛰어난 리더라도 그 성취가 오롯이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행운이 따른 결과임을 잊지 말라는 메시지가 바로 포르투나와 비르투스를 통해 [군주론] 전체를 관통하고 있음에도 이 역시 종종 간과되더라고


우주적 시각으로 보면 먼지 한 톨 보다 못한 '창백한 푸른 점'에서 100년도 채 못 사는 존재들이 그저 남보다 조금 나은 정도의 능력과 알량한 힘을 가졌다고 마치 군림하듯 뻐기고 목에 힘주는 일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지 깨달아야 하는 이유야




세상사 모두 운칠기삼이야

운이 좋은 것도 제 복이지. 좋은 환경에서 일체의 경제적, 사회적 어려움도 없이 인생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신이 준다면 누군들 마다하겠어? 그런데 말이야 순전히 운으로 유리한 고지에서 시작했으면서 그렇게 얻게 된 것들을 마치 제가 잘해서 얻은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도 종종 보이더라고. 억울하면 좋은 부모 밑에서 태어나지 그랬냐며 어쩌다 얻은 한 줌 행운이 영원할 것처럼 여기는 못난 종자들 말이야. 이들이야말로 그저 운이 좋아 3루에서 태어났으면서 제가 잘해서 3루타를 친 줄로 아는 사람들이지


나는 인생 만사가 운7, 노력3으로 이루어진다고 믿는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운에 내 운명 전체를 걸고 싶지는 않더라고. 그런 의미에서 복권도 사지 않아. 내 운을 복권당첨 따위에 쓰고 싶지 않기 때문이야. 로또 1등? 물론 부럽지. 좋은 꿈을 꾸면 혹시나 하는 기대로 복권을 안 사본 것도 아니야. 그런데 정말 운이란 게 있다면 겨우 그런 일에 운을 쓰고 싶지 않더라고. 나 개인의 준비, 노력도 없이 순전히 운에 의해 얻게 된 그 무엇(돈이든 기회든)은 장기적으로 약일까? 독일까? 나는 주저 없이 후자라고 말하겠어 


대신 실력을 키우기로 했지. 시간은 지나고 나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가장 소중한 자원이란 사실을 깨닫고는, 1분 1초라도 허튼 생각과 행동에 낭비하고 싶지 않게 됐어. 내게 올 운이 있다면 내가 평생 몸담을 일에 찾아왔으면 하는 마음뿐이야. 묵묵히 읽고 쓰면서 실력을 쌓을 뿐이야


찰나의 성공과 실패에 크게 일희일비할 필요도 없어. 인생은 굴곡이 있을 수밖에 없고 해가 지면 또 해가 뜨는 게 세상 진리야. 운은 아무리 용을 써도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사실만 안다면 나의 불운과 타인의 행운을 매 순간 비교하는 일이 얼마나 하찮고 무의미한 일인지 깨닫게 돼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영역은 오직 비르투스 즉, 실력과 추진력 그리고 과감한 행동뿐이야. 그 사이 몇 번의 포르투나가 내 곁을 지나갈지 모르지만, 내 실력과 운과 타이밍이 절묘하게 맞을 때가 분명 한 번은 올 거라 믿어


운도 스스로 만드는 거야

오오타니 쇼헤이는 현시점 세계 최고의 야구선수야. 올해는 세계 최고의 리그인 미국 메이저리그(MLB) 최초로 50(홈런)-50(도루)을 달성했고 타자에만 전업해 MVP급 활약을 펼쳐 소속팀을 월드시리즈(결승전)로 이끌었어. 투타를 겸업하는 이도류로 작년까지 투수와 타자를 겸업해 준수한 성적을 냈지만 부상으로 올해는 타자로만 전념해 압도적 성적을 냈어. 야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내로라하는 포지션별 괴물들이 득실거리는 MLB에서 투수와 타자를 겸업하는 걸 넘어 준수한 성적까지 내는 일이 얼마나 만화 같은 일인지 잘 알 거야. 작년(2023년)에는 우리에게도 친숙한 LA다저스와 7억 달러에 달하는 천문학적 금액으로 FA 계약해 세상을 놀라게 했지


야구 역사상 유례가 없는 변종이 등장한 셈인데 무엇이 오오타니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일단 오오타니의 피지컬 자체가 압도적이야. 190이 훌쩍 넘는 키에 균형 잡힌 몸매로 백인 선수들에 전혀 밀리지 않아. 딱 보기에도 훤칠하고 훈훈한 외모까지 겸비했지. 그게 전부일까? 더 놀라운 건 바로 오오타니의 마인드야


위 계획표는 오오타니가 고등학생 시절 손수 작성해서 실제로 이행했다는 만다라트 계획표야. 나는 처음 이 계획표를 보고 입이 떡 벌어졌어. 총 8개 카테고리 64개의 계획이 촘촘하게 적힌 것도 놀랍지만 그 모든 걸 하나도 빠짐없이 이행해 왔다는 사실에 일단 입이 벌어졌어


그다음 눈에 들어온 건 운과 인간성이라는 항목이야. 운동선수를 포함해 자신의 계획에 이런 항목까지 집어넣고 실천하는 사람이 있을까? 난생처음 보는 내용에 기괴하기까지 했지


오오타니는 언젠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어

"쓰레기를 줍는 건 다른 사람이 버린 운을 내가 줍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계 최고의 프로야구 선수가 된 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어. 이미 피지컬적으로 갖춰진 상태에서 부단한 노력을 통해 기술적 완성도를 더했고 거기에 인성과 운까지 관리를 했으니 말 다했지. 엄청난 실력도 실력이지만 조금도 거만하지 않고 예의 바른 오오타니를 향한 찬사는 그의 운과 인성을 대하는 태도에서 비롯된 건 아니었을까?


오오타니 같이 타고난 사람도 이 정도로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운과 인성까지 철저히 관리하는 모습을 보며 부끄러워지더라고. 그저 운, 안 좋은 환경, 남 탓이나 하며 제자리에 머무른 것은 그 누구의 탓도 아닌 내 탓이라는 반성. 준비된 사람에게 운도 따라온다는 진리를 절감하게 된 순간이었어


이제 우리 계획표에도 쓰레기 줍기, 인사하기 정도는 넣고 내 운과 인성을 관리해 보는 게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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