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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확위 Oct 21. 2024

남아있던 약을 먹고 주말을 보내다

지난 금요일 출장을 갔다가 컨디션이 너무 좋지 않았다. 숨이 막히고 가슴이 답답했다. 문득 가방에 예전에 비상용으로 넣어뒀던 약이 있다는 게 기억이 나서 가방을 뒤져 약을 꺼냈다. 약을 복용하고 한동안 휴식을 취했다. 시간이 지나서 마음이 가라앉은 건지 약의 기운이 돌아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한결 나아졌다. 약을 끊으려 했었다. 하지만 요즘은 내 상태가 괜찮지 않은 것 같아 다시 병원을 찾아가려 한다. 병원에 가서 요즘의 나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폰을 꺼내 메모장에 내 증상들을 적어보았다.


1. 거의 매일 3~4시부터 두통. 길면 자기 전까지 지속됨

2. 종종 숨이 막히고 가슴이 답답함

3. 아침에 잠에서 깨도 일어나고 싶지 않은 생각이 강함. (깨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잦아짐)

4. 수면 시간이 불규칙해짐. 쉽게 잠들지 못함.

5. 자주 팔다리에 힘이 빠지는 느낌

6. 전반적으로 에너지가 없음. 그냥 지친 느낌

7. 평소 즐기던 취미생활이며 많은 것들이 재미가 없음

8. 집중력 감소.. 오래 집중하기가 어려움

9. 멍하고 현실감이 없는 느낌이 종종 들기도

10. 사람들과의 대화가 버겁고 힘겨움

11. 평소보다 밥을 잘 먹지 못함. 조금만 먹어도 입맛이 없음- 그러다가 어느 순간 폭식을 하기도


이렇게 적어놓고 보니 내 생각보다 요즘 나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게 바로 느껴졌다. 막연하게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과 적어두고 정리하면 상황을 판단하는데 확실히 도움이 되는 듯하다. 주말이라 병원에 갈 수 없었기에 남아있는 약들을 복용하며 주말을 보냈다. 약을 먹어서 그런지, 스스로 인식하고 나아지려는 생각의 덕분인지 기분이 한결 나아져 출장에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주말 계획을 세웠다.


토요일 아침에 눈을 뜨고 꽤나 금방 침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미리 예약해 둔 쿠킹 클래스가 있어 강남으로 가야 했다. 쿠킹 클래스 자체는 예상보다 실망스러웠다. 가격대비 메뉴가 너무 심플해서 굳이 이 돈으로 이걸 배워야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도 컨디션이 나쁘지 않아 그곳에 있는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눴다. 사람들과의 소통이 자연스러운 걸 보아, 내 상태가 조금 나아진 걸 알 수 있었다. 그다음으로는 독일 일러스트레이터의 워크숍을 예약해 두었었다. 마감되었던 걸 대기접수해 두고 자리가 생겨 운 좋게 마지막으로 합류할 수 있었던 곳이었다. 그곳에 가니 60여 명의 사람이 모여 시끌벅적했고 서로가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 군중 속의 외로움을 느꼈다. 나만 혼자인 느낌이었다. 워크숍도 그다지 유용하진 않았다. 재미가 없어 기분이 울적해졌다.

그다음으로 계획해 둔 것이 언니네 집에 가서 먹고 싶던 펌킨파이를 만드는 것이었다. 가는 길이 예상보다 쉽지 않았다. 버스를 기다리는데, 이미 만석이 된 광역버스는 계속해서 그냥 지나치곤 했다. 결국 다른 교통편으로 이동하기로 뒤늦게 맘먹으며 거의 한 시간을 더 소모했다. 조금씩 에너지가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힘겹게 언니네 집에 도착했다. 언니네 집에서는 조카들과 그 친구들이 파자마파티를 하기로 해서, 아이들이 7명이나 모여있어 시끌벅적했다. 하지만 그 시끌벅적함 속에서 마음이 오히려 편안해졌다. 언니가 차려준 저녁을 먹으니 몸과 마음이 따뜻해지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요즘의 나의 울적함이 혼자 지내면서 느낀 외로움인가 싶기도 했다.

펌킨 파이를 만들며 언니와 대화를 나눴다. 대단한 주제는 아니고 소소한 얘기들이었다. 생각해 보니 프랑스에서 지내던 때보다 한국에 돌아온 이후에 나는 오히려 대화 상대들이 없었던 것 같다. 주말에 일정한 스케줄이 없고, 홀로 지내는 시간이 전보다 더 많아진 것 같아. 연구실 내에서도 대화할 상대가 많지 않다. 오피스에 대부분 중국인 연구원들이 있어서 그들은 그들끼리만 지내다 보니, 나는 소외되는 경우가 많았다. WHO에서는 건강이라는 것이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인 안녕이라고 정의하더라. 육체적인 것도 좋지 않고, 정신적인 것도 좋지 않은데, 사회적으로까지 내 상태가 좋지 않았던 것 같다.


약을 다시 먹고 나니, 아침에 눈을 뜰 때 몸과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다. 플라시보일 수도 있지만 플라시보면 어떠하냐 싶다. 그저 내가 조금이라도 나아진다면 그걸로 좋은 거다. 주말에 계획을 세워둔 것들을 전부 해내지는 못했지만, 주요한 것들을 끝낼 수 있었다. 약을 먹은 덕분이라 느껴진다. 그러니, 한 주가 시작되면 다시 병원을 찾아가서 다시 제대로 처방을 받으며 일상의 회복을 위해 애써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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