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조 화장품을 사서 2년이 지났는데 아직 새것처럼 그대로 남아있다. 매일 화장을 하지는 않지만, 화장할 때를 대비해 파운데이션, 아이섀도, 아이브로우 펜슬, 마스카라, 립스틱을 기본적으로 하나씩 구비해 두었다. 하지만 립스틱과 아이브로우 펜슬을 제외한 나머지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화장품은 개봉한 지 대략 1년 반이 지나면 유통기한이 지나 폐기해야 한다고 하는데, 사용하지 않은 화장품을 선뜻 버리기가 어렵다.
나는 평소에 메이크업을 거의 하지 않는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공식적인 자리에 갈 때나 생일과 같은 특별한 날에는 가벼운 화장을 하지만, 평상시에는 거의 민얼굴로 외출한다. 아이브로우 펜슬로 간단히 눈썹만 그려주고 입술에 립밤을 살짝 바르면 끝이다. 그마저도 하지 않고 로션과 선크림만 바르고 나가는 날도 많다.
원래부터 화장을 안 했던 건 아니다. 처음 싱가포르에 왔을 때는 집 밖에 나갈 때마다 화장을 했고, 심지어 아파트 단지 내 수영장에 아이들을 데리고 나갈 때도 가벼운 화장을 하고 나갔다. 수영장 벤치에 앉아 책을 읽으며 아이들을 기다리는 동안 혹시라도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될 때, 내 민낯을 보여주기 싫었기 때문이다. 슈퍼마켓에 갈 때나 동네 카페에 갈 때도 어김없이 화장을 했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싱가포르 사람들은 내가 굳이 한국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내 국적을 알아맞혔다. 내가 한국 사람인 걸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이렇게 대답했다. "한국 여성들은 화장도 예쁘게 하고 옷도 잘 입어서 싱가포르 여성들과 다르다"라고.
싱가포르에 오기 전, 나는 한국에서 수입 의류 브랜드와 수입 화장품 브랜드의 홍보팀에서 일했다. 대외활동이 많은 홍보팀에서 내 이미지는 곧 회사의 이미지로 보일 수 있었기 때문에, 브랜드 이미지에 맞춰 화장하고 옷을 입었다. 화장한 내 모습이 좀 더 생기 있어 보여 좋았고, 거울을 보면 자신감도 생겼다. 당시 메이크업은 사회적인 강요가 아닌 내 선택이었다. 외모를 꾸미는 데 할애하는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싱가포르에 와서 아이들을 키우며 한동안 전업주부로 살 때도 끊임없이 화장했던 건, 아마도 무의식적으로 몸에 밴 습관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아이들이 현지 유치원에 입학한 후, 싱가포르 엄마들을 만날 기회가 많았다. 대부분의 엄마들은 워킹맘이어서 생일 파티는 주로 주말에 열렸다. 나는 옅은 화장을 하고 옷을 차려입고 파티에 갔는데, 현지 엄마들은 화장하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았다. 옷도 아이들과 놀기 편한 차림으로 왔다. 한국 여행 경험이 있는 엄마들은 한국 여성들은 하나같이 화장을 예쁘게 하고 옷을 잘 입어서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후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매년 학교에 학부모 상담을 하러 갔다. 내 눈에 비친 선생님들과 학부모들은 그저 수수해 보였다. 블링블링한 옷을 입고 치장한 사람들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주말 아침에 브런치를 먹으러 카페에 가도, 주위를 둘러보면 간편한 복장에 민얼굴로 온 사람들이 많았다. 백화점에 가도 화장하고 옷을 잘 차려입은 사람들도 있지만, 소박한 차림으로 온 사람들도 많았다. 남편 회사 동료 모임에 함께 가 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직장동료의 결혼식 하객으로 참석할 때는 풀메이크업에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와서 깜짝 놀랐다. 싱가포르 사람들은 때와 장소에 맞게 화장하고 옷을 입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싱가포르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한국어를 가르친 적이 있다. 대부분의 학생이 젊은 싱가포르 여성 직장인이었고, 학생들은 퇴근 후에 수업을 들으러 왔다. 교실로 들어오는 학생들의 모습을 살펴보니 비즈니스 캐주얼 차림이었지만, 화장기 없는 민얼굴로 온 학생들이 꽤 많았다. 사실, 내 고정관념으로는 그 모습이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싱가포르에서는 회사에 화장하지 않고 가도 괜찮은가?’하는 의문이 생겼다. 학생들과 서로 가까워졌을 무렵, 나는 조심스레 학생들에게 노메이크업으로 출근하는 게 괜찮은지 물어보았다. 학생들은 한결같이 상관없다고 말했다. 언어교육원에서 일했던 몇 년 동안 젊은 직장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싱가포르가 참 캐주얼한 사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적어도 외모를 중시하는 사회는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싱가포르에 오랜 시간 살면서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에 익숙해졌다. 메이크업하지 않고 일을 하러 갈 때도 많다. 50대가 되어 눈가의 주름도 깊어지고 피부 탄력도 떨어졌다. 화장하지 않은 내 얼굴에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점 없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화장으로 내 얼굴을 낯설게 만들지 않는다. 화장을 하는 것도, 하지 않는 것도 내가 주체가 된 내 선택이다. 민얼굴의 모습도, 화장한 모습도 모두 나 자신이다. 민얼굴로 당당히 외출할 수 있는 건 싱가포르의 사회적 분위기에 영향을 받은 덕분인 것 같다. 화장하지 않았을 뿐인데도, 삶이 단순해졌다. 꾸밈없는 삶은 나에게 편리함을 선물해 주었다. 이제 나는 내 본연의 모습을 좋아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