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것들로 하루를 엮는 사람에게
기록이 있는 자리에 문구는 늘 함께한다.
독서든 글쓰기든, 곁에는 손에 익은 도구들이 놓여 있다.
스스로를 '문구인'이라 소개하는 김규림 작가(@kyurimkim)의 이야기에는 문구와 소비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이 담겨 있다.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방식으로 드러내고, 그 안에서 자신을 분명하게 포지셔닝해 낸 사람. 그녀는 문구라는 단어에 스스로를 온전히 겹쳐낸다.
문구는 단순한 도구를 넘어, 삶의 리듬과 감정을 조율하는 매개체가 된다. 규림 작가는 "그날 기분에 따라 뷔페처럼 골라 쓴다"라고 말한다. 도구를 고르는 행동만으로도 하루의 감정을 밝게도, 차분하게도 만들어갈 수 있다. 그녀에게 문구를 고르고 사용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이미 기록의 일부다.
그녀가 문구를 수집하고 사용하는 방식은 도구보다 '경험', 물건보다 '감정'에 더 가까워 보인다. 무언가를 쓰기 위해 도구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도구를 고르며 스스로를 더 잘 이해하게 되는 일. 그런 태도에서 '좋아하는 것'이 삶에 어떻게 스며드는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내게 문구에 대한 인상적인 기억은 중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유행했던 '교환일기'가 그 기억의 주인공이다. 친구들과 한 권의 일기를 돌려가며 쓰는 방식이었는데, 단순히 글만 적은 일기는 인기가 없었다. 적어도 색색의 펜을 써야 했고, 스티커를 붙이거나 잡지 화보를 오려 꾸미는 것도 필수였다. 예쁘게, 더 예쁘게. 서로의 꾸미기를 보며 아이디어를 얻고 경쟁하듯 꾸몄다.
그 시절 나는 문구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새로 나온 펜이나 스티커를 탐험하듯 구경했고, 문구점에 갈 때면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사랑이라는 걸 해본 적은 없었지만, 만약 이런 마음이 사랑이라면 꼭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순수했던 기억이 지금까지도 문구라는 매개를 통해 되살아난다.
그 마음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나는 문구점 앞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예쁜 스티커나 펜을 발견하면 이유 없이 마음이 먼저 반응한다. 어릴 적 교환일기 속 꾸미기에서 시작된 이 애정은 이제 일상과 기록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언젠가부터 문구를 고르는 순간이 곧 하루의 감정을 고르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진한 잉크의 만년필을 들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형광펜을 잡으면 괜히 기분이 들뜨기도 했다. 어떤 도구를 쓸지 결정하는 그 짧은 찰나가 기록의 분위기와 방향을 바꾸어 놓는다.
그래서 나에게 문구는 단순히 '도구'라기보다는 감정의 연결선에 가깝다. 어떤 날은 생각이 흐릿해도 노란 형광펜 하나 곁에 두면 그 색이 나를 응원하는 것 같고, 어떤 날은 무채색 노트에 검은 잉크로 또박또박 적다 보면 생각이 더 또렷해진다. 문구를 고르는 일은 단지 예쁘고 실용적인 물건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날의 나와 마주하고 감정의 결을 살피는 일이다.
한동안은 그런 나를 '괜히 사는 사람'이라 생각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안다. 나는 문구를 사기 위해 글을 쓰는 게 아니라, 글을 쓰기 위해 문구를 고르는 사람이라는 걸.
누군가에겐 작고 소소한 문구일지 몰라도, 내게는 삶의 결을 조금 더 부드럽고 또렷하게 해주는 고마운 존재다. 기록을 시작하게 하고, 계속 이어가고 싶게 만드는 따뜻한 격려다.
사진 : Pexels_Arina Krasnikova님의 사진
인터뷰 출처 : EQL 파운드 토크 -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이, 문구인 김규림 편(https://www.eqlstore.com/article/archive/3260/vi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