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청춘의 의미에 대한 짤막한 고찰
청춘
새싹이 파랗게 돋아나는 봄철이라는 뜻으로,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에 걸치는 인생의 젊은 나이
또는 그런 시절을 이르는 말.
청춘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지금.
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쓴다.
나의 10대 후반에서 20대 중반을 생각한다.
나의 정체성을 찾고 나의 주변은 어떤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지를 인지하고 나서 일어났던 모든 일들은 나의 암흑기를 빼곡히 채우는 일들이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나 같은 사람이 사회에서 어떤 대우를 받는지 알게 된 것, 그리고 내 주변의 사람들의 상태. 이런 것들을 알게 되면서 나는 청춘이라는 빛나는 시기를 지나왔다기보다는 나 혼자 방 안으로 수그러드는, 내 내면 안으로 수그러드는 기간을 지냈다. 내가 그림을 잘 그릴 줄 알았다면 그 기간의 나를 묘사하는 그림들은 대부분 낮은 채도의 무채색으로 그려냈을 것이다. 그리고 나의 주변은 어지러운 낙서들로 가득찬 정신없는 공간으로 묘사되었을 것이다.
새싹이 파랗게 돋아나는 봄철이라니, 나의 10대 후반 20대 중반은 그런 귀엽고 사랑스러운 새싹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시기다. 그러한 암흑기를 보냈던 사람으로서 청춘이라는 단어 뜻의 반 이상을 허황되게 보낸 것 같아 입이 쓰다. 이런 생각을 하는 데에는 나의 억울함도 일조한다. 내가 원해서 이런 곳에서 태어난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런 삶을 살아야만 했다는 것이 억울함의 주 이유다.
약을 거의 줄여가는 단계이지만 나는 정신건강의학과도 다니는 중이다. 무기력함이 주 증상인 우울증과 공황장애. 그것이 나의 병명이다. 어린 나이에 약을 꾸준히 먹어야 한다는 사실이 가끔은 지긋지긋하게 여겨질 때도 있다.
쉼터에서의 생활 이후 지난한 싸움 끝에 다시 본가로 돌아와 사는 일상은 사실 매일 매일 힘이 든다. 내가 온 힘을 다해 피하려고 했던 사람들과 독립을 하기 전까지 다시 한 번 삶을 살아나가야 한다는 것 때문에 친부의, 친모의, 남동생의 어떤 작은 행동마저도 나에게는 큰 분노로 다가올 때가 많다.
내가 한동안 글을 쓰는 것을 멈췄던 이유는 학업 때문에도 있지만, 나의 이런 과거를 계속 캐올려야 하는 작업이 무의미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의 자아 속에 머물러 있는 어둠이 계속 눈으로 드러나는 것 같아 자괴감이 들 때도 많았고, 이제는 과거가 되어버린 일을 더 이상 반추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반추가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 자체가 나의 우울증이 낫는 것이라는 말을 듣고 나서 나는 글쓰기에 대한 목표를 다시 설정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과거를 털어놓고 나의 묵은 감정을 해갈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 좀 더 나은 내일을 위한 글을 써보고 싶다. 내가 쓰던 소설을 자유연재 형식이라도 길게 길게 끌고 가보고 싶다. 나는 언제나 무언가에 쫓기는 삶을 살았다. 친부의 이상에 쫓기듯이 나의 10대를 버렸고, 쉼터에 살 적에는 내가 삶을 살아야 하기에 경제적 여건에 쫓기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제는 쫓기는 삶을 더 이상은 살고 싶지가 않아졌다. 마감에 쫓기는 삶도 이제는 그만. 그냥 내가 쓰고 싶을 때 쓰고 그렇지 않을 때는 쓰지 않는 그런 삶. 무언가가 되어야만 하는 삶이 아니라 그 자체로도 좋은 삶을 살아보고 싶어졌다. 그냥 여유로운 삶. 나의 삶을 있는 그대로 즐기는 삶을 살아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이제는 글을 쓸 때 라이킷 수나 구독자 수에 연연하고 싶지 않아졌다. 어차피 이건 나의 생각이고 나의 성장 과정일 뿐 누군가의 판단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삶을 긍정하는 것. 뭔갈 더 더하지 않고 오히려 가지 치기 할 것을 찾아내고 삶의 빈 공간을 찾는 것. 그게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