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까지만 해도 새벽에 일어나 달렸는데 일하는 시간이 변하는 바람에 올해는 약간 변동이 생겼다. 그래도 주말엔 되도록 아침에 뛴다. 오후에는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가장으로서의 책무를 수행하기 위해서이다. 전날 술을 마셔도 되도록 7시 이전에는 일어나는 편이다. 습관이 된 건지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건지 예전보다 아침잠이 없어져 뛰는 건 그다지 힘들지는 않다. 뛰고 나서는 또 다른 문제지만.
그날은 가까운 공원에서 LSD를 하고 난 후였다. 아침을 먹고 나니 심심했던 딸내미가 오늘은 캠핑가는 날이라 제멋대로 정해놓고서는 캠핑을 가자고 졸라댔다. 갑작스럽게 캠핑장 예약이 쉬운 일도 아니거니와 캠핑 도구도 전혀 없으니 아내와 협심해서 피크닉 정도로 합의를 보고 아침에 뛰었던 러닝 장소로, 이번엔 차를 타고 다시 들렀다. 적당한 곳에 돗자리를 펴고 자리를 잡고 오는 길에 새로 구입한 커다란 배드민턴 라켓(협상 조건에 있었다.)으로 셔틀콕을 열심히 줍고 있을 때였다.
직선으로 뻗어져 있어 걷기에도, 달리기에도 그만인 산책로이지만 말 그대로 산책을 하는 사람이 대부분인, 특별한 것도 없는 코스인데 그날은 공원에 자리잡은 피크닉객의 시선이 산책로로 모였다. 몸 좋은 젊은 남정네 세 명이 웃통을 벗은 채 러닝을 하고 있는게 아닌가. 온통 근육질이라 체중이 꽤 나가 보이는데도 발놀림이 경쾌했다. 포즈도 안정되어 있었고 발디딤도 좋았다. 셔틀콕을 주워든 채 나도 모르게 감탄 어린 시선을 던지고 있는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 뒤로 젊은 여성러너가 모자 사이로 낸 포니테일을 찰랑거리며 뒤를 따르고 있었다. 아니, 이후 한참 더 달린 걸로 봐서 뒤를 따랐다기보다는 자신의 페이스로 쭉 달리고 있었다는 게 맞겠다.
찬란한 젊음을 내뿜으며 달리는 그들을 한참 바라보며 혼잣말 같은 해설(오, 저 가벼운 발놀림을 보라지, 뒷발을 제대로 당기고 있어. 끌림이 전혀 없잖아! 저렇게 뛴다면 한참을 뛰어도 지치지 않겠어. 등등)을 해대자 옆에 있던 아내가 ‘누가 보면 대단한 전문가인 줄’하며 웃었다. 아, 멘즈플레인을 할 생각은 없었는데 나도 모르게 흥분을 했나보다.
마흔을 넘어 본격적으로 달리다보니 아무래도 실력이 느는 속도도 더디고 회복도 느리다. 특히 인터벌 같은 빠른 훈련을 할 때면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다 못해 이러다가 여기서 혼자 쓰러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간에 받았던 안전교육 영상과 심폐소생술, 예전에 보았던 <긴급출동 119> 영상(이 프로그램을 아신다면… 건강 유의하세요.)이 주마등처럼 떠올라 발을 멈출 때가 있다. 훈련을 시원하게 말아 잡숫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끌며 복귀하는 길이면 늘 <슬램덩크>의 정대만의 대사를 되뇐다.
‘왜 난 그렇게 헛된 시간을…. 젠장….’
방황 끝에 코트로 돌아와 혼자 20점을 퍼붓고 팀 승리를 이끌었지만 2년의 공백으로 캔마저 딸 수 없을 만큼 체력이 바닥난 자신에게 던진 자조 섞인 말. 지금 저 젊은이들은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 없지만) 신체를 다듬고 심폐 능력을 신장시키고 있는데 난 저 나이 때 뭐 했는지 되뇌어보니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아, 어쩌자고 난 그렇게 대책 없이 술만 퍼마셨던 걸까.
아마 부러웠나보다. 저들의 탄탄한 허벅지나 힘찬 종아리 근육보다, 젊음이라는 선물을 충분히 즐기고 있는 저들의 모습과 태도가 부러워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나 보다.
러닝을 좀 더 일찍 시작하지 못해 아쉽다는 말을 하면 아내는 늘 내게 이렇게 말한다. 지금이라도 시작한 게 어디냐고. 우리 집 현자 말마따나 이제라도 시작하게 되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긴 한다. 조금만 늦었다면 아이고, 그거 무릎 상해서 못해, 하고 포기하고 말았음에 틀림없다. 배 나온 친구들에게서 나이를 거꾸로 먹는다는 얘기를 들을 때만 그런 게 아니다.(물론 기분은 좋습니다만) 너무 늦지 않은 시점에서 평생 할 만한 운동을 만났다는 것에 대한 만족감이다. 계획한 훈련이 성에 차지 않으면 뭐 어때. 안 다치는 게 제일이지, 평생 할 텐데. 하고 말할 수 있는 여유도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고. 아, 이런 자기 합리화 때문에 실력이 안 느는 걸까.
운동을 마쳤는지 어느새 네 젊은이가 보이지 않는다. 운동 마치고 맥주 마시러 갔나 보다, 하고 생각한다. 어휴, 나란 놈은 대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