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최장 거리(26㎞)를 통과하는 시점에도 그다지 페이스나 몸 상태에 변화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페이스는 여전히 5분 초반을 유지하고 있었고 힘에 부친다는 느낌도 없었다. 느낌이 좋았다. 이런 상태로라면 3시간 30분이라는 목표는 어렵지 않게 달성할 수 있겠다 싶었다. 이걸 어떻게 자랑하지? 누구한테 자랑해야 하나? 이런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면서 3㎞를 더 달리자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는 체력이 인지되기 시작하면서 덩달아 페이스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지금껏 급수대를 기다린 적이 없었는데 1㎞ 남짓 남은 급수대의 봉사 청소년들이 내미는 음료수와 응원 소리가 살짝 그리워졌다. 그렇다. 그 유명한, 마라톤의 반환점이라 불리는 ‘마의 30㎞’ 선에 다다른 것이다.
무릎 이외에는 별다른 말썽을 부리지 않았던 몸뚱이가 30㎞ 표지판을 만나자 기다렸다는 듯 그만 달리라는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다음은 이 지점에서 왼쪽 햄스트링 씨와 나눈 (당연히 가상) 인터뷰 내용이다.
햄스트링 씨: 이제 슬슬 그만 달리시지.
나: 미안하지만 여기서 그만둘 용기를 낼 생각은 없다네.
햄스트링 씨: 여기까지 달려본 적도 없지 않은가. 지금 멈추지 않으면 자네가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고통을 받을 수도 있다네!
나: 난 지금껏 용기라는 놈과 거리를 두며 살았던 인생, 굳이 여기에서 인생의 방향을 바꿀 생각은 없다네.
햄스트링 씨: 흥!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페이드아웃으로 사라진다.)
‘흥’이었는지 ‘풋’이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약간 비웃음이었던 것 같긴 한데. 아무튼 그가 보낸 경고는 완전히 무시할 만한 통증은 아니어서 페이스를 더 늦출 수밖에 없었다. 조금만 긴장을 풀면 곧바로 쥐가 올라올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상태로 5㎞를 더 달려 35㎞ 지점에 이르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이제 7㎞만 달리면 되는 건가.’
그 순간! 갑자기 머릿속에서 문이 쫙 열리는 이미지가 스침과 동시에 (말로만 듣던 헬게이트?) 왼쪽 다리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열린 문틈 사이에 햄스트링 씨의 조롱어린 눈빛이 살짝 보였던 것 같기도 하고. 한 발짝도 뛸 수 없어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느리게 달려도 걷지는 않으려고 했건만, 정신이 아닌 육체의 문제였으므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손 치더라도 약간은 분했다. 햄스트링의 장난 따위에 놀아나다니. 다리를 주무르고 스트레칭을 하자 비교적 빠르게 회복되어 다시 달릴 수 있게 되었다. 물론 페이스는 더 느려져서 이제 거의 6분 페이스에 가까워져 버렸지만. 하지만 그것도 잠시 2㎞ 남짓을 달리자 다시 다리가 굳었는데 이번엔 아까보다 좀 더 심각해서 걷기도 힘들었다. 이제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보도블록에 발을 올리고 스트레칭을 했다. 그러나 좀처럼 좋아지지 않는다.
나를 앞지르는 수많은 러너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무엇 때문에 난 여기서 아픈 다리를 부여잡은 채 달리려 하고 있는가.(네다섯 시간가량을 달리다 보면 누구든 소크라테스가 된다) 42.195km를 완주해야 할 필연적인 이유 따위가 애초에 존재할 리가 없는 것이다. 예전에 마라톤에서 아테네까지 42㎞를 뛰어갔다가 사람이 죽었다잖아. 죽었다고, 사람이.
그럼 질문을 바꿔보자. 그렇다면 여기서 멈춰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달리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여러 가지라고 하지만 실은 두 가지다. 달리기 싫거나 혹은 달릴 수 없거나. 지금 난 달리고 싶지 않은가. 아니다. 이제 불과 5㎞ 남았다. 달려야 하는 이유 따위는 잘 모르겠지만 난 이 레이스를 포기할 생각이 없다. 내가 달리기로 했으므로, 이걸 뛰어보겠다고 2시간을 차를 몰고 비싼 숙박료를 지불했으며 아내의 잠까지 깨우는 소란을 피웠으므로 끝까지 달릴 것이다. 달려야 하는 논리적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근데 언제부터 내가, 우리가 자신이 하는 행위에 가타부타 이유를 찾아가며 살았나. 학교에 입학했기 때문에 등교하는 거고 회사에 취직했기 때문에 출근하는 거고 나라에 태어났기 때문에 세금을 내는 거다.
그렇다면 달릴 수 없는 몸인가. 아니다.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그렇다고 걷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걸을 수 있는데 달리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나. 조금씩 다리가 풀려 제 속도로 걸을 수 있게 되자 ‘걸을 수 있으면 달릴 수 있다.’를 되뇌면서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고 생각했지만 꽤나 절뚝거렸는지 지나가시던 안전요원분이 ‘괜찮으세요?’라며 안위를 물었다. 구급키트 배낭까지 메고 이리저리 분주하게 달리면서도 지친 기색이 없어 보이는 그분을 보니 더 힘을 내야 할 것만 같아 ‘(실은 전혀 안 괜찮습니다만) 괜찮습니다’하고 주먹을 쥐어 보였다.
[37㎞ 지점]
호기롭게 달리기 시작했으나 이미 3시간 40분 페이스메이커에게도 추월당할 만큼 페이스는 엉망이었다. 게다가 39㎞ 지점에서 다시 한번 쥐가 올라와 이번에는 안전요원의 긴급 파스 처방을 받아야만 했다. 언제 햄스트링 씨의 보복이 시작될지 모르는 불안감을 안고 뛰다 보니 힘을 내기 힘들었다. 점점 느려지는 페이스로 달리며 ‘이제 3㎞만 뛰면 안 뛰어도 되는 거다.’, ‘이제 2㎞만 참으면 뛰지 않아도 된다 이거지?’, ‘1㎞만 달리고 나면 러닝 따위는 쳐다보지 않겠어.’를 중얼거리며 꾸역꾸역 달려나간 결과, 드디어 저 멀리서 골인 지점이 보였다.
골인 지점이 보이는 곳부터는 전력 질주로 달려 게이트를 통과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건만, 도무지 그럴 힘이 없었기에 동일한 페이스로 골인을 향해 달렸다. 게이트를 서너 발 앞두고 나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기억력 나쁜 나라도 이 행동의 의미에 대해선 분명히 생각나는데 레이스를 끝낸 나에게 보낸 응원과 격려의 박수가 아니었다. 이제 더 이상 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이었다. 아, 더 이상 달리지 않아도 되겠구나.
정확한 기록은 모르겠지만 게이트의 시간을 봐선 4시간은 넘지 않은 것 같았다. 어쨌든 서브-4는 해냈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옆에서 ‘아빠’하고 달려오는 딸아이와 아내가 보였다. 딸아이는 무얼 느꼈는지 엉엉 울고 있었는데, 이유를 물어봐도 통 대답해주지 않아서 내가 ‘왜? 아빠 너무 불쌍해 보였어?’라고 물었더니 고개를 젓는다. 다행이다. 그 정도 몰골은 아니었나 보다. 펑펑 눈물을 쏟고 있는 게 귀여워서 머리를 쓰다듬고 나중에 아빠랑 같이 달리자고 했더니 이번에도 고개를 젓는다. 뭐, 거부해봐야 어차피 그렇게 될 거야, 딸. 골인하는 풀코스 러너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게 한 그 (말로 설명하기 힘든) 감정을 기억하고 있다면 말이야.
[골인 이후]
핸드폰을 켜보니 기록이 나와 있었다. 3시간 48분 48초. 간만의 차이로 40분대 러너가 되었다는 안도감과 그놈의 쥐만 나지 않았어도 더 괜찮은 기록이 나올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교차했다. 골인 지점을 넘어서면 감동의 눈물이라도 나올 줄 알았는데 마음이 복잡해서 그런지 감동의 눈물은 구경하던 딸내미가 대신 다 울어버려서 그런지 눈물 비슷한 것도 나오지 않았다.
첫 공식 풀코스 기록인 만큼 기록이 나오는 전광판을 배경으로 사진으로 남겨볼까 하며 잠시 줄을 서봤지만 가만히 서 있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 내 다리로 그 긴 줄을 기다리는 건 아무래도 무리였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끌고 대회장 옆 건물에 넓은 계단으로 가 앉아 쉬었다. 뛰지 않아도 되는 기쁨은 한껏 만끽하며. 완주했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내 인생에서 운동으로써 만족감을 얻은 적이 있었던가. 지금껏 나라는 인간은 도무지 운동에 적합하지 않은 존재인 줄 알고 살았다. 운동이라는 것은 내게 자괴감을 낳는 오리알이었다. 어느 종목, 어떤 팀이든 주전으로 들어간 역사가 없었고 내가 결장한다고 해서 아쉬워하는 동료를 본 적도 없다. 승부를 보는 스포츠에서 언제나 패배는 나의, 혹은 우리 팀의 몫이었으니까. 운동 자체를 싫어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에 수반되는 결과에 대한 거부감이 결국 운동과 거리를 두게 만드는 결정적인 이유였다. 이런 내 엄혹한 과거와 저주받은 몸뚱이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지인들은 내가 마라톤을 완주했다는 사실을 알고 다들 놀라워했다. (굳이 서브3 하는 친구를 들먹이는 밉상도 물론 있었지만) 심지어 풀코스를 달리는 게 자신의 버킷리스트였다며 진심으로 부러워하는 반응을 보이는 이도 있었는데 그때는 왠지 으쓱거리는 어깨를 참아내느라 애를 먹었다. ‘대강 네 시간 안에 들어왔어.’라고 말해봐야 그게 빠른 건지 느린 건지도 모르는 비러너는 물론이고 ‘서브4정도면 첫 완주치고 괜찮았구만.’하는 러너들에게까지도 내 기록은 (한국 신기록을 갈아치울 정도가 아니라면) 별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누가 내 앞에 있었는지, 누가 내 뒤에 있었는지도 마찬가지. 단지 마라톤을 완주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과분한 축하를 받는다. 이토록 축하에 관대한 스포츠를 난 지금껏 경험해본 적이 없다.
달리기가 주는 만족감은 오롯이 기록이나 순위에서만 오는 것은 아니다. 물론 달리기라는 운동도 엄연히 기록이 있고 순위 경쟁도 있는 스포츠이지만 엘리트 선수나 그에 준하는 실력 있는 마스터스 러너라면 모를까, 나와 같은 지극히 일반적인 러너에게 기록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달리기를 지속하기 위한 보조 수단일 뿐 주된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그것보다는 훨씬 소박한 만족감. 어제의 나보다 조금 더 나은 달리기를 할 수 있는 오늘의 나를 만날 때 만족감은 찾아온다. 이런 소박하지만 확실한 기쁨을 주는 달리기를 나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아쉽지만 다음엔 더 잘할 거예요.
3시간 48분 48초. 조금 아쉬운 기록이었음이 분명하지만 내 풀코스는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생각하니 받아들일 만하다. 자고로 조금만 노력해도 성장 폭이 팍팍 보여야 도전할 맛이 생기는 법! 거듭 극복해 나가야 할 어제의 내가 너무 강하면 아무래도 곤란하다. 이번 레이스에서의 문제점을 알았으므로 겨우내 장거리 훈련을 약간만 추가하면 이보다 좋은 기록을 획득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생겼다. 풀코스를 달리기 전에는 이번 레이스를 완주하면 목표 의식이 사라져 한동안 슬럼프에 빠져버릴지 모른다는 우려는 다행히도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만족할 만한 레이스였다고 할까.
아직도 햄스트링은 살짝 불편하다. 살살 달래가며 훈련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햄스트링 부상 이거, 운동선수들만 생기는 것 아니었어? 부상 부위로 운동선수와 나를 동격화하는 섣부른 일반화에 혼자 만족해하며 오늘도 쿠션화에 발을 넣는다. 달리자, 달려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