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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락 이강휘 Sep 08. 2023

러너는 늘 새 러닝화를 원하지

러닝화 이야기

러닝화 쇼핑은 지속적인 러닝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러닝은 뭐니 뭐니 해도 러닝화를 신고 달리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이런 수요를 볼모로 잡힌 러너들은 스포츠 업계의 주요 마케팅 타깃이 된다. 글로벌 스포츠 업계의 축적된 마케팅에 무분별하게 노출되는 러너의 특성 상 거의 대부분의 러너는 러닝 인생에서 적어도 한 번 이상은 소위 ‘러닝화 쇼핑 중독 현상’을 겪게 된다.(저는 자주 겪고 있고요.) 나의 육체만큼이나 한계가 뚜렷한 내 지갑의 사정을 생각하면 중독을 벗어나기 위해서 외부적 자극이 필요한데 가장 효과적인 제동장치 중 하나가 아내의 잔소리, 또 하나가 <본투런>을 읽는 것이다.

<본투런>의 저자 크리스토퍼 맥두걸은 맨발로 달리는 타라우마라족의 사례를 들어 우리 인간은 오래달리기에 최적화된 몸을 타고났다는 것을 역설한다. 그에 따르면 호모 사피엔스는 침팬지에게는 없는 목덜미 인대와 아킬레스건을 발달시키는 방향으로 진화됨으로써 발달한 오래달리기 능력으로 자신보다 큰 동물들을 사냥할 수 있었다. 힘으로는 네안데르탈인에 비할 바 못 되는 호모 사피엔스가 어떻게 대세 인류가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이유로 높은 사회성과 지능으로 꼽은 경우는 많이 봐왔지만 신체를 중심으로 한 진화론적 접근 방식은 꽤 신선하다.

자, 제동장치는 이 부분부터! 저자는 오늘날 인류가 선사 시대의 오래달리기 능력을 잃어버린 이유를 두 가지로 꼽는다. 하나는 굳이 오래 달릴 필요가 없어진 현대의 생활 문화, 다른 하나는 바로 ‘나이키’. 그는 무릎 통증을 줄이는 나이키 신발의 쿠션이 오히려 달리는 자세를 망치고 부상을 만든다고 주장한다. 보다 오래 더 잘 달리기 위해서는 쿠션으로 고통을 막아낼 게 아니라 고통을 직면해가며 고통받지 않는 자세를 찾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버려진 타이어로 직접 만든 샌들을 신고서 울트라 마라톤에서 우승하는 타라우마라족 러너 아르눌포나 카바요 블랑코의 이야기에 감명하면 이 제공장치가 지나치게 작동해 버린다. 당장 러닝화를 버리고 폐타이어 전문점에 들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이게 오작동할 경우는 비브람 파이브핑거스처럼 미드솔을 제거한 극단적 형태의 신발이나 샌들, 낮고 딱딱한 미드솔을 사용한 신발을 새로 구입해야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막상 실행하기에 쉬운 일은 아니다. 샌들을 신고 마라톤에 출전한 러너를 실제로 영접한 적이 있는데 타라우마라 족은 아니었지만 뭔가 도인 같은 풍모가 있었다. 음, 주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걸 즐기지 않는다면 쉽지 않은 도전이다. 자주 나가는 러닝코스에서 이따금 맨발로 우레탄 길을 뛰는 러너와 마주치는 일도 있다. 그때마다 마치 내 발이 따끔거리는 느낌이 들곤 한다. 맨발이나 샌들이나 나로선 따라 해 볼 엄두조차 나지 않는 것이다.

<본투런>이라는 제동장치가 적절하게 작동하면 자신에게 맞는 러닝화를 신고 맨발로 뛰듯이 달리는 게 가장 현실적인 방안이 아닐까, 하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러닝화의 빵빵한 쿠션을 믿고 뒤꿈치부터 닿는 착지로 무릎에 충격을 주지 않고 맨발처럼 미드풋으로 착지하는 연습을 하면 소중한 발바닥을 보호하면서도 관절에 무리를 주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 문제는 신발이 아니야, 내 육체인 거지, 하는 깨달음으로 신발 욕심을 (아주 조금) 줄일 수 있다.

실은 웬만한 러너들은 러닝용 신발은 세 켤레 정도만 있으면 된다는 걸 알고 있다. 조깅 및 리커버리용 쿠션화, 템포런 및 인터벌용 경량화, 대회용 레이싱화로 분류해 한 켤레씩만 보유하고 수명이 다 되면 용도별로 교체하면 훈련에서 대회까지 모두 다 대비가 가능하다-는 건 이론적인 말이고 경력 있는 러너라면 누구라도 신발장에 쌓인 러닝화에 골치를 썩이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게 다 인간의 소유욕 때문이다. 글로벌 스포츠 업계의 마케팅은 그저 거들 뿐.

모든 소비 품목이 그렇듯 러너에게 신발은 실용의 영역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다. 일종의 기호 품목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누군가의 기호를 비판하거나 비난할 의도는 전혀 없다. 나 역시도 쿠션화가 필요한데도 레이싱화를 산다거나, 실력이 미치지도 못하는데 굳이 레이싱화를 산다거나, 갑작스러운 ‘빅 세일’로 예상에 없는 레이싱화를 또 산다거나, 암튼 계속 레이싱화만 사니까.

근데 나이키 베이퍼 플라이 시리즈나 알파 플라이 시리즈는 아직 구입하지 않았다. 이걸 뭐라 말해야 할까. 지금 끝판왕을 만나면 이후 쇼핑은 뭔가 시시해져 버릴 것 같달까. 더 큰 이유는 이런 최첨단 신발을 신고서도 겨우 이 정도 기록밖에 나오질 않는 건가, 하는 나 자신에 대한 실망감을 느끼고 싶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가끔은 사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있는데 엘리우드 킵초계가 신고서 세계신기록을 달성했다는 소식이 들릴 때이다. 그럴 땐 신발 가격만큼 나이키 주식을 사면 (약간의) 억제 효과가 있다. 물론 주가 하락 시 받을 마음의 상처가 더 클 수 있다는 부작용이 있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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