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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락 이강휘 Sep 08. 2023

내가 풀코스를 신청하다니

첫 풀코스 이야기 1(100일 ~ 60일 전)

[대회 100일 전]

마라톤 신청 사이트를 몇 번이고 들어가다 나오기를 반복하다 다시 들어왔다. 마우스는 하프와 풀 사이를 서성댄다. 고작 하프의 육체를 가졌음에도―하프 대회 출전 경험조차 없으니 그나마 이것도 추정인데 정신은 이미 풀코스로 향하고 있다. 내가 ‘풀코스주자’가 된다니, 너무 멋들어져서 심장이 터질 것 같다. 그때 우뇌가 소리친다. 이 우유부단한 놈, 폼만 잡지 말고 그냥 눌러 버렷!

마우스 오른쪽 버튼 위에 놓인 검지에 힘을 주려던 찰나 내 좌뇌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대는 아직 준비가 덜 되었다는 것을 모르오? 헛된 욕심으로 신체를 망가뜨릴 작정이라면 내 굳이 말리지 않으리라만, 이번엔 하프 정도로 만족하고 풀코스는 차후를 도모하는 것이 어떠신지.

충동적인 우뇌와 이성적인 좌뇌가 격렬하게 토론을 펼치는 동안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풀코스 주자’는 멋지다. 좌뇌도 굳이 말리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던가,(‘헛된 욕심으로 신체를 망가뜨릴 작정이라면’은 이미 까먹음.) 그래, 누르자, 지르자! 눈을 부릅뜨고 검지에 힘을 준다. 불과 몇 분 사이에 모든 결제가 끝나버렸다. 의자에 등을 기대어 앉아 혼자 중얼거린다.

“아, 사고 쳤네.”    

 

[대회 90일 전]

정식 풀코스를 뛰어본 적이 없었으므로(그럴 계획도 없었으므로) 훈련이 부족한 건 당연한 일. 어디서 어떻게 훈련해야 할지도 막막했다.

일단 내 예상 기록부터 알아보는 게 우선이었다. ‘마라톤온라인’ 사이트에서 유일하게 참가했던 10km 대회기록(43분 15초)을 넣으니 3시간 17분 50초라는 너무 엄청나서 어이가 없는 예상 기록이 나온다! 가민은 한술 더 떠서 3시간 12분 31초면 42.195km를 뛸 수 있을 거란다. 말도 안 되는 소리인 줄은 알지만, 살짝 상기되었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겠다. 그렇지만 나도 최소한의 양심이라는 게 있어서 3시간 20분를 목표로 해서 페이스 계산기를 두드려본다. 뭐? 4분 44초 페이스라고? 안 된다. 이 페이스로는 풀코스는커녕 하프도 자신이 없다. 5분 페이스면 대강 3시간 30분 내외로 들어올 수 있겠다. 5분이라, 지금은 좀 무리겠지만 훈련을 하면 조금은 나아지겠지. 첫 풀코스에서 DNF를 당할 수는 없으니 욕심은 버리고 딱 요 정도만 하자.(이게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목표였는지 나중에야 알게 됩니다.)

목표 기록을 세웠으니 훈련에 들어가야 했으나 지금까지 뛴 게 있으니 대회장을 가면 42.195km 정도야 어떻게든 뛰게 되지 않겠나, 하는 얼토당토않은 자신감에 사로잡혔을까. ‘풀코스 마라톤 완주를 위한’ 훈련을 따로 하지 않았다. 출퇴근에 왕복 2시간 이상 쓰고 야근까지 하면 평일에는 기껏해야 하루나 이틀 정도, 그나마 한 시간 훈련도 힘들었으므로 보통은 주말에 몰아서 달리는 루틴에서 크게 변화를 주지 않았다. 주말에는 장거리보다는 템포런이나 인터벌 같은 포인트 훈련 위주로 뛰었기 때문에 마라톤을 대비해 거리를 늘려가며 착실하게 운동량을 쌓아가는 훈련이라고 보기는 힘든 면이 있었다. 그렇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예상기록이 다소 과장된 면이 없진 않겠지만 예상기록보다 13분, 가민 기준으로는 무려 17분이나 늦춘 정도면 과장을 상쇄시킬 만큼 충분히 여유 있는 목표가 아닌가, 하는 지금 생각하면 손발이 오그라들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발로 찰 생각을 잘도 했던 것이다.     


[대회 80일 전]

계획적으로 훈련 스케줄을 소화하는 러너는 숙명적으로 실패라는 고배를 마치게 된다. 러닝 초심자일 때는 되려 여간해서는 실패하지 않는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자신에 대한 불신으로 실패를 하지 않을 만한 선에서 계획을 세우기 때문이다. 첫 실패라는 녀석은 어느 정도의 경험으로 자신의 몸을 파악하고 난 뒤에야 빼꼼히 문을 열다. 어서와, 실패는 처음이지?

따라서 프로 자애주의자인 내가 훈련 실패를 경험하지 못할 이유는 전혀 없다. 대부분의 실패 경험은 이런 루틴의 반복이다.                     


평생 갈고 닦아온 자만으로 내 실력보다 높은 목표를 설정한다. → 약간의 불안감이 엄습하지만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어?’하면서 더 우쭐대며 훈련을 시작한다. → 훈련의 절반도 채 못 해내고 숨을 헐떡거린다. → 이후에 찾아오는 깊은 후회와 반성 → 망각 → 평생 갈고 닦아온 자만으로 내 실력보다 높은 목표를 설정한다 → ....(이후 반복)


직장인이자 어린아이를 둔 가장인 내 경우, 마라톤 훈련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주어진 시간을 쪼개어 사용해야 한다. 예컨대 이번 주 화, 수, 금은 야근을 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라고 하자.(월, 목은 야근이라는 말이다, 젠장.) 근데 수요일에는 딸이랑 함께하는 그림그리기 놀이 스케줄이 있으니 못 뛰고 금요일은 회식이 있다. 그러면 실제로 훈련을 할 수 있는 날은 화, 토, 일. 고작 주 3일이다. 그 귀한 사흘 중 하루의 훈련을 실패한다면 일주일 치 훈련량의 무려 33퍼센트를 손해보게 되는 것이다. 계획한 훈련을 마무리하지 못할 때, 평범한 아마추어 러너가 심리적 타격을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니까 세운 계획만큼은 다 소화할 수 있도록 실력과 몸 상태에 맞게 설정해야 한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지만 사람이 어떻게 아는 걸 다 실천할 수가 있나. 마라톤 대비랍시고 ‘4분 페이스 200m 인터벌 20회’나 ‘4분 10초 페이스 20000m 템포런 3회’ 같은 거창한 계획을 세웠고 여지없이 실패하기를 반복했다. 평소에야 그러려니 했을 텐데 시기가 시기인 만큼 이번엔 조금씩 불안감이 엄습해오기 시작한다. 나, 이대로 괜찮은 걸까?

서점을 찾기 시작했다. 어째서인지 뭔가를 시작한다고 하면 책을 찾는 습관이 있다. 그간 마라톤 관련 동영상을 보고 연습해 왔고 영상에 담긴 정보가 책보다 신뢰도가 떨어진다거나 영상보다 책이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닌데도 왠지 급할 때 책을 찾는 걸 반복하는 걸 보면 결국 나란 인간은 정보는 활자에 있다고 믿는 옛날 사람인 것이다.

<김철언의 마라톤 100일 트레이닝>이라는 책을 골랐다. 100일이라, 조금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아직 80일이 남았으니 차근차근 따라해보기로 한다. 저자는 초급자(풀코스 완주 목표), 중급자(서브 4 목표), 상급자(서브 3 목표)로 분류해 프로그램을 제시해준다. 3시간 30분을 목표이니 중급과 상급 사이의 실력이지만 첫 풀코스 도전인 만큼 아무래도 중급에 비중을 둬야 했다. 근데 나도 모르게 상급 프로그램을 더 많이 참고하고 있었다. 사람은 쉽게 안 변하고 이놈의 자만은 어디 안 간다.     


[대회 60일 전]

장비 쇼핑 욕구가 슬금슬금 올라오기 시작했다. 풀코스 마라톤을 뛰려면 적어도 싱글렛과 3인치 쇼츠 정도는 입어줘야 할 것 같아 매일 인터넷 쇼핑몰을 들락날락하며 눈요기를 했다. 나이키 기능성 싱글렛과 쇼츠가 눈에 들어오긴 했지만, 소매도 없는 이까짓 얇은 천쪼가리가 9만원이라고? 이런 트렁크팬티 같은 반바지 주제에 12만원을 달라고? 하는 반발심을 이기지 못하고 아울렛 쇼핑몰에서 스파이더 싱글렛과 뉴발란스 반바지를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했다.(저렴한 데 비해 입으면 제법 마라톤주자 같은 느낌이 들어서 만족스러웠다.)

한창 여름이라 LSD를 하고 나면 양말과 신발이 흠뻑 젖어 곤란했다. 발에서 땀이 난다기 보다는 몸에서 난 땀이 아래로 흐르는 거라 카프슬리브(종아리보호대)를 하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했는데, 실제로 신발이 젖는 현상은 확실히 줄어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양말도 샀구나.

이제 하나 남았다. 러닝 장비의 꽃, 러닝화. 수많은 러닝화 중 어떤 신발을 골라야 할지 고민하는 건 즐거운 고통이었다. 러닝화에 아낌없이 투자할 수 있는 경제적 여유가 있는 형편이라면 좋겠지만(정말정말 좋겠지만)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여러 전문 리뷰어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본래 풀코스는 나이키 베이퍼 플라이를 신고, 역시 끝판왕은 나이키였어요, 여러분. 이러고 싶긴 했지만 불행히도(?) 나이키 신발은 전형적인 한국인 족형인 내게는 왠지 불편했다. 차선으로 선택해 거금을 들여 구입한 아디다스 아디제로 프로3는 신자마자 ‘이놈들! 세상에, 신발을 이렇게까지 좋게 만드는 이유가 대체 뭐냐?’라는 탄성(!)이 나올 만큼 좋았지만 고작 10km 남짓 뛰었을 뿐인데 전족부에 물집이 잡힌다거나 독특한 슈레이스 마감이 엄지발가락 뼈를 눌러 저린다거나 하는, 생전 처음 경험하는 현상 때문에 결국 처분해야 했다. 결국 동양인 족형에 친화적인 아식스 제품(메타스피드 엣지 플러스)을 착용하기로 했다. 나이키나 아디다스만큼 신자마자 느껴지는 탄성감과 기술력은 아니었지만 편안하게 발을 감싸는 착용감이나 안정감이 좋았다.

워낙 둔한 편이라 웬만한 러닝화에서 신발이 발에 미치는 영향을 크게 느끼지는 못한다. 사이즈나 발볼만 맞으면 웬만하면 신을 만하다는 느낌을 받는 달까. 그래서 구입한 신발은 별 불만 없이 신는 편이다. 근데 레이싱화를 착용할 때에는 확실히 예민해진다. 신발과의 호흡이 조금만 흐트러져도 금방 발에 문제가 생기거나 불편하다는 느낌이 들어 ‘못 신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레이싱화라는 건 섬세하게 만들어진 신발인 것일 게다. 몇 번의 구매 실패 경험을 통해 레이싱화를 고를 때에는 브랜드의 인지도나 가격, 다른 러너들의 리뷰보다 내 발에 맞는 신발을 찾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튼 이제 쇼핑은 끝났다. 이제 달리기만 잘하면 되는 건가, 하는 순간 모자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가을볕이 얼마나 무서운데. 잠깐 모자 좀 사고 올게요.


2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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