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락 이강휘 Sep 08. 2023

그런 용기는 사양합니다.

첫 풀코스 이야기 2(30일전 ~ 당일 30K 지점)

[대회 30일 전]

구입한 책 내용대로 훈련에 들어갔지만 상급 훈련을 따라갈 만큼의 시간적 여력은 쉽사리 나지 않았다. 주말은 그렇다쳐도 평일 훈련은 소화할 시간이 여간 부족한 게 아니었다. 상황이 이러한데 남은 시간은 별로 없으니 두려움이 엄습해오기 시작한다. 이거 3시간 30분은커녕 서브4도 간당간당한 거 아닌지, 나아가 완주가 가능할는지 확신이 없어졌다.

지금껏 달려본 최장 거리는 22km. 더 이상 속도가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드니 스피드훈련을 줄이고 대신 거리를 늘여가는 전략으로 바꾸었다. 일주일에 2km씩 늘이면 28km까지는 달려볼 수 있겠다 싶었다.(22(4주전)→ 24(3주전)→26(2주전)→28(1주전)→출전!) 그러나 결국 그 거창한 계획은 결국 다 지킬 수 없게 되었는데, 일주일 전에는 무리해서 훈련을 하면 안 된다는 걸 뒤늦게 책에서 본 것이다. 책을 끝까지 쭉 훑어보고 난 후에 다시 앞으로 돌아와서 차근차근 훈련하면 되는 건데 당일치기 분량만 읽고 훈련하는 걸 반복하다보니 뒤에 제시되는 중요한 사실을 놓쳐버렸다. 결국 26km밖에 못 달리고 출전을 대회 전 마지막 주, 준비 기간으로 들어가야 했다.

아, 불안하다, 불안해.

     


[대회 일주일 전]

‘카보로딩’이라는 걸 들었다. 3일간 단백질 위주의 식단으로 탄수화물을 줄이고 훈련으로 남은 탄수화물을 태워버린 후, 나머지 3일간 탄수화물을 섭취함으로써 더 많은 탄수화물을 채워넣을 수 있는 몸으로 만드는 방법이라고 했다. 오, 멋진데? 하고 생각했지만 이내 포기했다. 초심자는 부작용이 심하다는 얘기도 물론 마음에 걸렸지만 굳이 먹는 걸 포기하면서까지 달리고 싶지는 않다. ‘난, 죽을 때까지 맥주를 마실 수 있는 몸을 만들기 뛰는 남자다!’라는 신념을 되뇌며 감자튀김(어차피 탄수화물!)에 맥주를 마셨다. 대신 이번 주만은 조금 줄이는 걸로.

대회 일주일 전부터는 무리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조언 정도는 쉽게 지킬 수 있을 줄 알았다. 운동이야 더 하는 게 어렵지 덜 하는 게 뭐가 어렵나. 근데 이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이 시기에 무리하는 건 오히려 독이라는 걸 이성적으로야 충분히 이해하지만 불안감 때문에 가만있기가 힘들었다. 이따위 몸뚱이로 제대로 뛸 수 있을까? 훈련량이 지나치게 부족했던 건 아닌가? 이런 생각들 때문에 발생하는 벼락치기 본능을 자제하는 데 꽤 애를 먹었다.     


[대회 전날]

사흘 만에 달리기에 나섰더니 몸이 가벼웠다. 자신감이 급격하게 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이때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자제했어야 했는데 나도 모르게 약간 흥분을 했는지 속도도 올랐고 거리도 생각보다 많이(무려 10㎞!) 달려버린 데다가 세 번 정도만 해도 될 질주는 다섯 번이나 해 버렸다.(이렇게 쓰고 보니 정말 무식한 짓을 했구나 싶네요.)

샤워를 하고 예약해 둔 호텔로 이동했다. 호텔을 좋아하는 딸아이가 굉장히 설레했는데 나도 그만큼 설렜다. 드디어 내일이다. 운전 내내 페이스를 계산했다. 5분 페이스로 달리면 10㎞에 50분, 40킬로면 50 곱하기 4는 200분, 42킬로면 거기에 10분 더해서 210분. 한 시간이 60분, 180분은 세 시간 210분에서 180분을 빼면 30분 그러면 3시간 30분. 뭐 이런 걸 2시간 동안 반복해서 머릿속으로 계산하고 검산하고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결국 ‘한 시간이 60분이면 210분이면 도대체 몇 시간인 거냐!’라는지 ‘50분에 42㎞를 곱하면…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요?’ 같은 혼돈의 카오스의 수렁으로 빠져 버렸지만.(원체 숫자에 약한 체질이라)

저녁 식사는 탄수화물 위주로 먹어야 했기에 뷔페에서 불고기를 포기하고 밥이나 퍼먹는, 전에 없는 사치(?)를 부렸다. 맥주가 살짝 당겼지만 이것도 잘 참아냈다.(세상에, 이걸 어떻게 했지?) 하지만 생전 처음 겪어보는 식단 조절(이걸 식단 조절이라 해야할지 모르겠지만)의 부작용인지 몸이 살짝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응?) 감기 기운처럼 살짝 한기가 돌아서 감기약과 쌍화탕을 먹고 얼른 누워 잠을 청했다. 그렇지 않으면 맥주를 안 마셔서 몸이 가라앉는 것이 틀림없다는 기적의 논리를 내세워 맥주를 사왔을 게 틀림없었으므로.

평소 같으면 좀 뒤척였을 텐데 감기약 덕분인지 일찍 잠들 수 있었다.     

드디어 대회 당일

대회 두 시간 전에는 도착해야지 싶어서 5시 즈음에 일어나서 살짝 몸을 푼 후 미리 챙겨온 바나나를 누텔라에 찍어 먹었다. 역시 최고의 맛! 아침을 먹고 뛰는 습관이 없기 때문에 굳이 아침을 차려 먹지는 않았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는 안 하는 짓을 하면 안 된다는 건 수능을 망쳐본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특히 먹는 건 더더욱 그렇고.

몸이 쳐져서 살짝 긴장했었지만 몸은 완전히 정상 컨디션으로 돌아왔다. 편의점 감기약 효과에 감탄하며 무릎 테이핑을 했다. 평소에 차던 무릎 보호대의 무게를 줄여보고자 유튜브로 테이핑을 연습했는데 익숙지 않아서 간단한 테이핑이었는데도 시간이 꽤 걸렸다. 안내자료를 통해 대회장에 테이핑 부스가 있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무료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미리 알았다면 그냥 조금 더 일찍 가서 전문가에게 테이핑을 받았을 테고 경기 도중에 테이핑이 떨어지는 참사는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짐을 다 싸고 택시를 부르려는데 믿었던 카카오택시가 그날따라 먹통이었다.(네, 카카오먹통 사건 당일입니다) 혼자 당황해 동동 구르는 발소리에 잠에서 깬 냉철한 아내의 빠른 조치로 콜택시를 불러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고마워, 여보!)

레이스 시작이 한 시간 반 남짓 남은 이른 시간이었지만 대회장에는 이미 많은 러너들이 도착해 있었다. 테이핑 부스 곁에 자리를 잡고 전문가의 테이핑을 구경하면서 옷을 갈아입은 후에는 짐을 맡기고 출발점과 맞닿아 있는 조깅 코스로 나가 몸을 풀었다. 인산인해를 이룬 준비운동 코스에서 영상이나 SNS에서 본 친숙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유튜브에서 만나던 운영자와 출연진을 실제로 보니 뭔가 연예인 보는 것 같달까. 구독자라며 인사를 건네려 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쑥스러워 살짝 들뜬 기분만을 만끽하며 천천히 달렸다. 각종 러닝크루에서는 멋들어진 깃발을 연신 흔들어 대며 대회 분위기를 고취하고 있었다. 거대한 에너지를 거침없이 내뿜고 있는 그들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왠지 기운이 돋았다. 아! 놀라운 청춘의 힘이란!

출발을 예고하는 방송이 들린다. 출발점을 향해 뚜벅뚜벅 걸었다. 사방에서 수많은 응원이 쏟아진다. 42.195Km를 달리면 죽을 수 있다고 했던 내가 풀코스를 뛰는 날이 오긴 하는구나! 새삼 실감이 났다. 사회자 배동성 씨의 마지막 당부의 말이 들린다. “힘들면 레이스를 그만두는 것도 용기입니다.” 되도록 그런 용기는 내고 싶지 않았다, 죽을 정도가 아니라면.


[레이스 출발]

‘초반은 5분 10초 정도로 잡고 15㎞ 이후로는 5분 페이스로 유지하며 골인. 힘이 남으면 마지막 5㎞에서 페이스를 올리면서 3시간 30분으로 안착!’

출발 전 세워뒀던 내 전략은 초반부터 허무하게 무너졌다. 힘차게 달리는 러너들의 분위기에 휩쓸려 나도 모르게 전략보다 10초나 빠른 페이스로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초반부터 무리하면 안 된다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쉽사리 페이스를 떨어뜨릴 수가 없었다. 괜찮아, 10초 정도야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거야. 지금 생각해보니...내 몸을 너무 과신했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그만큼 몸도 가볍고 기분도 좋았다. 내 앞을 쓩 하고 지나가는 러너들의 뒷모습을 경탄과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며 나름(이라고 하지만 계획보단 약간 빠른)의 페이스를 유지하며 나아갔다. 익숙한 유적지가 나올 때마다 추억에 젖기도 했고, 여길 내 발로 뛰어서 와보는구나, 하는 만족감에 취하기도 했다. 간간이 들리는 사물놀이 어르신들의 경쾌한 징과 꽹과리 소리도 흥을 돋우었다.

경주 중앙 시장에 다다르자 시장 상인분들이 나와서 양동이, 소쿠리 등을 들고 ‘멋지다, 파이팅’을 외쳐주셨다. ‘어, 예전에 저분한테서 사과를 산 것도 같은데.’나 ‘야, 저기 통닭이랑 저 집 밀면 진짜 끝내줬는데.’하는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면서 시장을 벗어났다.

음료는 목이 마르지 않아도 기회가 되면 일단 마셔두라는 충고를 착실하게 따를 생각이었기에 5킬로미터마다 설치된 급수대를 만날 때마다 물과 에너지음료를 한 잔씩 마셨다. (어디서 못된 것만 배워서) 물을 마신 후에 종이컵을 꾸깃 접어 땅바닥에 내팽겨치듯 버리는 걸 정말 하고 싶었는데 실제로 해보니 표현 못 할 쾌감(!!)이 있었다. 옆에 쓰레기봉투라도 설치되어 있으면 약간 서운할 정도랄까.(죄송합니다, 봉사요원 여러분들.)

20㎞ 지점이 지나자 슬슬 더위가 느껴지기 시작했다.(이 날은 가을치고는 더운 날씨였다고.) 그러나 급수대 사이에 설치된 물에 적신 스펀지가 큰 도움이 되었다. 햇볕을 받은 어깨와 목덜미, 땀에 전 겨드랑이를 닦아주거나 정수리에 대고 눌러 물로 몸을 식혀주었다. 스펀지 봉사활동 청소년들의 응원도 더할 나위 없이 좋아서 나도 파이팅, 파이팅 하며 답을 해주어가며 25킬로 지점을 통과했다. 이제 곧 내 러닝인생 최장거리에 도달하게 될 예정이었다.


3부에 계속

이전 08화 내가 풀코스를 신청하다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