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화혜 Feb 21. 2022

발화

단편소설 11 화

 태양은 지평으로 살포시 가라앉았다. 유리문에 기다란 그림자가 드리웠다. 붐볐던 공기에 열이 식었다. 환자는 썰물 빠지듯 줄었다. 오 국장은 등받이에 기대었다. 유난히 푹신한 의자였다. 발을 굴렀다. 한 바퀴 핑그르르 돌았다. 불룩한 배를 두드렸다. 퉁퉁 튕겼다. 온화를 두고 말했다.

 ― 학생은 말이야. 말이 너무 느려. 말만 느린 게 아니야. 모든 게 느려. 일하려면, 말도, 손도, 입도. 전부 빨라야 해. 타박하는 건 아니고. 걱정돼서 그래.

 그러곤 푸념했다.

 ― 아, 나는 돈도 많은데. 여기서 왜 이러고 있나.

 오 국장은 앵무새였다. 재처방이 아니면 복약지도를 맡지 않았다. 다른 환자가 와도 같은 말만 했다.

 ― 지난번과 똑같은 처방입니다.

 앵무새는 삐딱했다. 정면을 안 봤다. 몸통을 사십오 도 틀었다. 책상에 비스듬히 기대었다. 왼 어깨를 들이밀었다. 왼팔 한쪽만 앞으로 뻗었다. 얼굴 반편만 보였다. 가자미눈을 떴다. 시선은 환자와 어긋났다. 약 봉투를 버리듯 주었다. 질문할 낌새면 딴청 피웠다. 귀찮은 티가 역력했다. 얼른 가라며 손짓했다. 떠돌이 들짐승을 내쫓는 손등이었다. 휘휘.


 반복에 능숙할 즈음이었다. 오 국장은 재처방마저 온화에게 맡겼다. 뇌졸중 환자였다. 지난번과 토씨 하나 틀리지 않았다. 오십육 일 치였다. 팔 주 동안 먹을 약이었다. 환자는 이십팔 일, 사 주 만에 다시 왔다. 온화는 위화감이 들었다.


 약은 세 종류였다. 항혈소판제인 아스피린(Aspirin)과 클로피도그렐(Clopidogrel). 뇌기능 개선제인 콜린 알포세레이트(Choline Alfoscerate). 아스피린과 클로피도그렐은 약포지에 같이 포장되었다. 아침에만 먹어야 했다. 콜린 알포세레이트는 따로 포장되었다. PTP에 든 상태였다. 아침과 저녁에 먹어야 했다. 온화는 복용법을 설명했다.

 ― 환자분, 약포지에 든 약은 아침에만 드시는 건데요. 피떡 안 생기게 해주는 성분이 두 알 들었어요. 상자에 든 약 한 알이랑 같이 아침에 드세요. 상자는 뇌 영양제에요. 저녁에는 뇌 영양제 한 알만 까서 드시면 됩니다. 아침에는 세 알, 저녁에는 한 알 드시는 겁니다.


 환자는 웃었다.

 ― 그게요, 선생님. 약포지에 든 약을 아침에만 먹는 줄 몰랐어요. 전부 아침, 저녁으로 먹었지 뭐예요. 내방 예정일보다 훨씬 전에 약이 끝났죠. 이상하다 싶었어요. 이번에 병원을 가니까 잘못 먹었다고 하시대요. 어쩐지 뒷머리가 아프더니.

 별안간 아득했다. 아스피린과 클로피도그렐을 사 주 간, 두 배 용량으로 복용했다니. 피가 멎지 않아 위험할지 몰랐다. 이전 복약 담당 약사가 잘못 설명했을지, 단순 환자 착오인지. 온화로서 알 수 없었다. 신신당부했다. 용법을 다시 알렸다. 호탕한 환자였다. 개의치 않았다. 사사로운 일이라 여기는 듯했다. 사뿐히 약국을 떴다.

이전 10화 밖으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